소록도의 역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픈 섬, 한(恨)이 서린 섬, 비극적인 섬으로 기록되고 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한센인 시인으로 잘 알려진 한하운의 대표작 ‘전라도길(소록도 가는 길)’이다. 한 시인은 걷다 발가락이 하나씩 없어지는데도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을 걸어서 소록도로 가야 했다. 지형이 작은 사슴을 닮았다고 해서 ‘소록도’란 예쁜 이름을 가진 고흥의 이 섬은 지금은 아름답고 평화롭게 느껴지지만, 한하운 시인을 비롯해 이곳에 살았거나 살고 있는 한센인들의 아픔과 상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이 때문에 소록도의 역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픈 섬, 한(恨)이 서린 섬, 비극적인 섬으로 기록되고 있다.

▲ 소록도자료관에 전시된 한센인 한하운 시인의 사진과 작품. (사진=마재일 기자)

고흥 소록도는 일제강점기였던 1916년 자혜의원(국립소록도병원 전신)이 들어선 이후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한센인 집단 생활시설이 됐다. 한 때 6254(1947년)명의 환자들이 거주했만, 지금은 500여 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살아가고 있다. 신체 변형으로 거동이 불편하거나 고령으로 노환을 앓는 한센인이 대부분으로 평균 연령은 75.6세다.

나을 수 있고 전염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제대로 알리지 않은 일제와 국가 탓에, 여기에다 무지와 편견으로 거대한 벽을 쌓았던 세상 탓에, 그곳에서의 지독하고 처참했던 인권유린과 탄압, 착취는 당연하게 여겨졌다.

소록도 한센인의 처절하고 고립된 삶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소설가 故 이청준이 발표한 <당신들의 천국>(문학과 지성사, 1976년)을 통해서다. 육지에서 추방된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소록도를 배경으로, 병원장과 환자들의 갈등과 화해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 지난 2016년 병원 설립 100주년을 맞아 소록도로 들어가는 입구 주차장에 남아있던 1970년대 집 한 채를 원형 상태로 다듬어 안내소 겸 쉼터로 만들었다. 한센인 시인 한하운(1920~75)의 시, 옛 지도 등이 담긴 집은 한센인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한 눈에 보여준다. (사진=마재일 기자)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길 ‘수탄장’

소록도는 격리와 억압의 공간이었다. 섬 곳곳에는 사회의 냉대와 핍박 속에 고생했던 한센인의 ‘한(恨)’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 나병에 걸려 소록도에 강제 수용된 한센인들은 강제 노역에 시달렸고, 낙태와 단종(정관절제) 수술 등 모진 세월을 겪어야 했다. 인권은 없었다. 사후에도 검시의 수난을 당했다.

섬 전체가 병원인 소록도는 현재 과거 한센인들의 어둡고 슬픈 역사를 간직한 채 생생한 인권 교육의 현장으로 탈바꿈해 있다. 현재 일반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병원 초입의 수탄장 일대와 관사 지대, 병원 건물 주변 정도다.

병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 옆으로 늘어선 소나무 숲길은 소록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면서도 가장 슬픈 길이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탄식의 장소로 불렸던 ‘수탄장(愁嘆場)’은 한센인 부모와 ‘미감아’(한센병에 감염되지 않은 아동이란 뜻)들이 눈물로 상봉하던 장소다.

▲주차장을 지나 병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 옆으로 늘어선 소나무 숲길은 소록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면서도 가장 슬픈 길이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탄식의 장소로 불렸던 ‘수탄장(愁嘆場)’은 한센인 부모와 ‘미감아’(한센병에 감염되지 않은 아동이란 뜻)들이 눈물로 상봉하던 장소이다. (사진=소록도자료관)
▲주차장을 지나 병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 옆으로 늘어선 소나무 숲길은 소록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면서도 가장 슬픈 길이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탄식의 장소로 불렸던 ‘수탄장(愁嘆場)’은 한센인 부모와 ‘미감아’(한센병에 감염되지 않은 아동이란 뜻)들이 눈물로 상봉하던 장소이다. (사진=마재일 기자)

소록도는 1950∼70년 직원지대와 병사지대로 나뉘어져 경계선에 철조망이 쳐 있었다. 당시 환자 자녀들은 직원지대에 있는 보육소에 격리됐다. 병사지대의 부모와 한 달에 단 한 번 만날 수 있었다. 면회시간은 5분. 자녀와 부모는 도로 양옆으로 도열한 채 눈으로 마주 보기만 했다고 한다. 전염을 우려해 아이들은 바람을 등지고 섰고, 부모들은 그 반대편에 섰다. 탄식과 설움의 철조망은 1974년에야 철거됐으며 한 해 앞서 미감아 보육소도 문을 닫았다.

소록도의 모든 소나무는 사연을 갖고 있다는 말이 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한센인들이 절망 때문에 삶을 포기하고 나무에 목을 맨 일이 많아 전해진 이야기라고 한다. 2009년 소록대교 개통 이후 소록도 방문객이 증가해 수탄장 옆으로 산책로가 마련됐다.

강제 단종·낙태 수술…일제, 낙태시켜 해부된 아이 장기 유리병에 담아 보관

소록도병원에는 한센인들을 동원해 조성한 중앙공원, 일제강점기에 인권 유린이 자행됐던 소록도갱생원 검시실(등록문화재 66호)과 감금실(등록문화재 67호), 단종·낙태 수술대, 인체해부대, 화장터 등이 아픈 기억을 간직한 채 그대로 남아 있다.

한센인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와 이동권을 박탈당했고, 병의 대물림을 우려해 생식기능을 없애는 단종과 낙태를 강요당했다. 지난 2013년 보건복지부 등이 밝힌 한센인 피해 진상조사 결과를 보면 1945년 8월 16일부터 1963년 2월 8일까지 수용시설에 격리 수용돼 폭행과 부당한 감금, 또는 본인의 동의 없이 단종·낙태수술 등을 당한 한센인이 6462명(신고당시 사망 1758)으로 조사됐다.

▲ 감금실. 한센인은 당시 소록도 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노역을 거부하거나 탈출을 시도한 한센인은 감금실에 끌려가 금식이나 체벌 등의 징벌을 받았다. (사진=마재일 기자)
▲ 감금실. 한센인은 당시 소록도 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노역을 거부하거나 탈출을 시도한 한센인은 감금실에 끌려가 금식이나 체벌 등의 징벌을 받았다. (사진=마재일 기자)
▲ 감금실. 한센인은 당시 소록도 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노역을 거부하거나 탈출을 시도한 한센인은 감금실에 끌려가 금식이나 체벌 등의 징벌을 받았다. (사진=마재일 기자)
▲ 감금실. 한센인은 당시 소록도 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노역을 거부하거나 탈출을 시도한 한센인은 감금실에 끌려가 금식이나 체벌 등의 징벌을 받았다. (사진=마재일 기자)

소록도 한센인들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남긴 곳은 1935년에 만들어진 감금실이다. 일제가 만든 ‘조선나예방령’에 따라 한센인은 당시 소록도 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노역을 거부하거나 탈출을 시도한 한센인은 감금실에 끌려가 금식이나 체벌 등의 징벌을 받았다. 환자를 외부와 철저히 격리하기 위해 붉은 벽돌로 높은 담을 쌓았다. 변기가 없는 감금실은 1973년 내부를 개조해 신체부자유 한센인을 위한 숙소로도 사용되기도 했다. 감금이 끝난 후에는 단종수술까지 받기도 했다.

소록도병원에는 당시 상황을 담은 ‘단종대’라는 제목의 시(詩)가 걸려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동이라는 한센인이 소록도의 감금실에서 출감하며 단종수술을 받고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 단종수술과 시신해부가 이뤄진 검시실 건물. 소록도에서 생을 마감한 한센인들의 시신은 이곳에서 해부됐다. (사진=마재일 기자)
▲ 단종수술과 시신해부가 이뤄진 검시실. 소록도에서 생을 마감한 한센인들의 시신은 이곳에서 해부됐다. (사진=마재일 기자)

일제는 병에 걸린 손발도 절단했다. 한센인들은 인체실험 대상자인 ‘마루타’에 지나지 않았다. SBS TV ‘그것이 알고 싶다’가 지난 2016년 7월 30일, 정부 주도로 사회적 낙인과 차별을 받으며 가장 기본적인 권리마저 박탈당해야만 했던 한센인들과 그 자녀들의 삶을 방영해 충격을 줬다. 소록도에서 사람의 인체를 표본으로 만들어 보관한 유리병 122개를 찍은 사진이 공개됐고, 그중 14개의 유리병에는 태아의 사체가 담겨 있었다.감금실 바로 옆에는 검시실이 있다. 모든 사망 환자는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검시실에서 사망 원인에 대한 해부절차를 마친 뒤 간단한 장례식을 거쳐 섬 내 화장장에서 화장 후 납골당에 유골로 안치됐다. 시신을 올려놓았던 수술대, 세척 시설 등이 인권유린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소록도 한센인들은 이러한 수술이 1970년대까지 이뤄졌다는 증언도 했다.

지난 2016년 6월 20일 소록도병원 별관 2층에서 열린 정관·낙태 수술 피해 한센인들의 국가 상대 소송 특별 재판에서 현장검증 설명을 맡은 한센인 이남철(당시 66세)씨는 낙태를 시켜 해부된 아이 장기 등을 유리병에 담아 옆에 있는 수납장에 보관했다고 증언했다.

▲ 일제가 수감자를 상대로 강제 정관수술을 자행한 도구 ‘단종대’. (소록도자료관)

처절하게 무너진 한센인의 꿈

한센인들은 병사 신축 등 각종 공사에 동원됐다. 독한 약을 먹기 때문에 영양소 공급이 중요했지만 일제는 충분한 음식을 주지 않았다. 제대된 음식을 먹지도 못하면서 각종 작업에 강제 동원된 한센인들의 불만이 커져가면서 소록도를 탈출하는 환자도 생겨났다. 치료는커녕 가혹한 노동에 내몰린 한센인들은 어선을 타고 800m 남짓 떨어진 녹동항으로 도망쳤다. 무조건 바다에 뛰어들어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은 한센인도 상당수였다고 전해진다.

소록도 한센인들은 1937년 중일전쟁 때 굶주림을 견디며 매일 수만 장의 벽돌을 구워내는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해방 전까지 송진 채취, 가마니 생산, 숯 생산 등 전쟁 군수물자 생산에 동원됐다. 현재 공원 한편의 벽돌공장 굴뚝 터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1935년부터 소록도에서 생활한 한 한센인은 200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센병, 고통의 기억과 질병 정책>이란 자료집에서 당시의 고통을 이렇게 회고했다.

“(병원) 확장 공사할 때는 새벽에 나가서 어두워져야 들어와요. 사람들이 많이 맞았어요. 당시 (일제는) 환자를 인간 취급을 안 했거든요. 동물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죠.”

▲ 탈출하는 한센인. (사진=소록도자료관)
▲ 소록도병원 중앙공원 기원의 탑인 ‘구라탑’. 구라탑은 미카엘 천사가 창으로 한센균을 찌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사진=마재일 기자)
▲ 해방 직후 자치권을 요구하다 희생당한 한센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애한의 추모비. (사진=마재일 기자)

소록도 중앙공원 안에는 구라탑(救癩塔), 다미안공적비, 한하운시비 등의 기념물이 있다. 구라탑은 미카엘 대천사가 한센병 원인균인 나균을 박멸하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하단에는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탑은 1963년 국제캠프단이 오마도 간척공사를 도와 근로봉사를 하던 중 소록도 한센인들을 조속한 치유를 기원하며 세웠다.

특히 ‘오마간척지’ 사업은 한센인들에게 깊은 좌절과 분노를 안겼다. 1962~64년 소록도의 한센인은 고흥 도양면의 다섯 섬을 잇는 ‘오마도 간척사업’ 공사에 동원됐다. 소록도 근처 오마도 앞 바다를 메워 자신들의 생활터전을 마련하려 했다. 한센인들은 자신의 땅을 갖고자 하는 열망으로 맨주먹으로 돌멩이를 날라 바다를 메웠다. 사업이 완료되면 간척한 토지를 나눠 주겠다는 달콤한 약속과 달리 완공 직전 군사정부의 개입으로 한센인들은 간척지에서 쫓겨났다. 새 터전에서 새 삶을 살아보려던 나환자들의 꿈은 허무하게 좌초됐고 오마간척지는 1989년 완성돼 일반 주민들에게 분양됐다. 이후 어떤 보상도 이뤄지지 않았다. 330만 평의 광활한 농토는 지금 이청준의 소설 제목처럼 ‘당신들의 천국’으로 남아 있다.

▲ 오마간척 한센인 추모공원 내 조각상. (사진=고흥군)

‘84인 학살사건’은 1945년 해방 직후 치안공백 상태에서 병원 내부 갈등이 직원과 한센인 갈등으로 번졌다. 당시 병원 직원들은 자신들이 끌어들인 외부 치안대와 함께 한센인 84명을 끔찍하게 살해했다. 나중에 밝혀진 희생자까지 공식 사망자만 85명이다. 사건이 외부로 알려진 건 반년 정도가 지나서다. 진상조사가 이뤄졌지만 직원들을 면직하는 데 그쳤다. 제대로 된 피해보상은 없었다. 2002년 이들이 묻혔던 자리에 ‘애한의 추모비’가 세워졌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5년 이 사건을 직원들에 의한 한센인 학살사건으로 규정했고 관련 피해보상법은 2007년 마련됐다.

소록도엔 아이가 없고 무덤이 없다

소록도 한센인들은 ‘3번 죽는다’는 말이 전해진다. 한센병 발병으로 가족과 생이별로 한 번 죽고, 시신 상태로 해부 당해 두 번 죽고, 화장터에서 불태워져 세 번 죽었다. 그리고 소록도 병원엔 입원하는 사람만 있다. 한센인은 죽음으로써 이 섬을 떠난다고 한다.

또 ‘소록도엔 두 가지가 없다’는 말이 있다. 아이와 무덤이다. 한센병이 유전된다는 오해로 오랜 시간 정관·낙태수술이 자행되면서 어린아이가 없다. 또 오랜 섬 생활로 육지 가족과 인연이 끊겨 이곳에서 죽은 이들을 기억해 줄 무덤이 없다. 소록도에서 생을 마감한 한센인은 섬에 있는 ‘만령당’에 안치된다.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삶을 살다 간 소록도 한센인. 정부는 앞으로 30년 뒤엔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이 모두 사라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소록도자료관 내부 모습. (사진=마재일 기자)
▲ 소록도병원 뒤쪽에 설치된 벽화 ‘아름다운 동행-소록도 사람들’의 한 부분. 450명의 한센인과 비한센인의 얼굴이 어우러져 새겨져 있다. (사진=마재일 기자)
▲ 병원 건물 입구 산책로에서 바라본 소록도 해안. 멀리 소록대교가 보인다. (사진=마재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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