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희생자 위령제...유족회, 경우회, 군·경 수뇌부, 여야정치인 참석 화해·상생으로
여·순사건 위령제 장소 두고 지역별로 다른 입장, '주도권 싸움 혈안'
향후 실무 위원회 구성 등 법, 제도 보완 작업위해 한 목소리 내야

▲2014년 10월 19일 여순사건 66주기 합동위령제가 여수지역에서 개최됐다. (사진=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
▲2014년 10월 19일 여순사건 66주기 합동위령제가 여수지역에서 개최됐다. (사진=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

희생자 합동위령제, 상징성과 역사성 갖춘 지역에서 개최해야

여수·순천 10.19 (여순사건)의 공식 추념 행사 장소를 두고 각 지역 유족회별로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어 상징성과 역사성을 갖춘 장소에서 개최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동안 위령제는 각 시·군 유족회가 각각 진행해 왔다. 여수는 10월 19일, 순천은 10월 20일, 구례는 21일로 여순사건이 발발한 일시와 다르게 진행해 왔다. 급기야 전남도가 2019년부터 6개 시·군 유족회와 합의해 매년 피해 지역을 순화하면서 도가 주관하는 합동위령제를 열고 있다. 2019년에는 순천, 지난해에는 구례에서 열렸다.

이런 배경에는 그동안 유족회 구성과 추진 과정을 따라가 보면 어떤 지역에서 위령제를 개최해야 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유족회 구성 배경에는 복잡한 환경과 구조로 되어 있다. 특히 유족회와 위령제는 여수지역사회연구소와 궤를 같이한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주관 1998년 50주년 최초 개최
연구소 유족회와 위령제 위한 활동 현재까지 

여순사건의 공론화를 통해 최초로 개최된 위령제는 1998년 50주년 행사였다. 당시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주관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여·순사건이 세상의 물 위로 떠오르게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시대적 상황이었다. 보수, 안보 단체들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위령제를 해오고 있었다.

유족회 구성도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핵심 사업인 여·순사건으로 여수와 순천 지역 피해자 실태조사를 통해서 소재파악이 되면서 피해자를 모으게 됐다. 3차례 걸쳐 6개월 동안 준비를 했지만 1, 2차 전부 실패하고 겨우 유족협의회를 단일 조직으로 구성했다. 각기 다른 지역이 아닌 ‘여수 유족협의회’로 조직하게 됐다.

당시 여수, 순천, 구례 지역은 유족들만 있는 상태였지만 비자발적 조직인 셈이었다. 그 과정에서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역할이 매우 컸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유족들이 존재했지만 서로 누군지를 모르는 상태로 여순사건 자체를 지역사회로 발원하지 못하는 레드컴플렉스가 강한 지역으로 숨죽이고 지내 왔었다.

▲여수‧순천 10‧19사건 72년을 맞아 희생자 넋을 추모하고 유족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한 전라남도 주관 민간인 희생자 합동 위령제가 최초로 개최됐다.(사진=전남도 제공)
▲여수‧순천 10‧19사건 72년을 맞아 희생자 넋을 추모하고 유족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한 전라남도 주관 민간인 희생자 합동 위령제가 최초로 개최됐다.(사진=전남도 제공)

그래서 98년부터 2002년까지 3개 지역 합동제를 여수에서만 지내게 됐다. 이런 배경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역의 거리와 여건상 운영의 합리적인 측면에서 단위 개념으로 여수 유족, 순천 유족, 구례 유족으로 나누게 된다. 중심은 단일 조직인 여수 유족협의회의 산하 조직으로 볼 수 있다.

여수 유족협의회는 1998년부터 5년 동안 여수지역에서 합동위령제와 국제학술대회를 이 기간에 개최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배례 차원에서 구례를 포함해 순천유족회들의 요청으로 지역을 돌아가면서 위령제를 개최하고 있다. 더불어 전남 동부지역까지 조직을 확대하면서 순천, 광양, 구례, 고흥, 보성 지역 유족까지 아우르게 됐다. 특히 이 시기 위령제는 10월 19일로 치러졌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와 서울 유족회가 국회 앞에서 특별법 제정을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당시 이영일 이사장과 서울유족회 회원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사진=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
▲여수지역사회연구소와 서울 유족회가 국회 앞에서 특별법 제정을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당시 이영일 이사장과 서울유족회 회원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사진=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

2007년까지도 고흥과 보성유족회가 없는 상태였지만 올해 들어 논란 끝에 보성유족회가 다시 조직됐다. 그런데 2008년 60주년이 된 해에 유족회가 합의한 대로 여수 차례가 되었는데 이때 순천유족회가 합의를 번복하면서 현재처럼 지역별로 다른 날짜에 위령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영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은 “2008년부터 현재까지 지역별 위령제를 계속하고 있다. 제삿날이 오늘, 내일, 모레, 이런 식으로 되는 것이다”며 ”2016년에 개별 유족회들의 한계와 문제점들을 느껴 특별법에 대해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니까 연구소가 다시 소집해서 이번에 여수, 순천, 광양, 구례, 보성유족회가 들어왔다. 이렇게 해서 다시 여순사건유족회가 재건된 거다“고 설명했다.

▲여순사건 61주기를 맞아 구례에서도 정부 지원을 받은 위령제가 처음으로 봉행됐다. 구례군은 여순사건 구례유족회 '제2회 여순사건 구례지역 희생자 위령제'를 열었다.
▲여순사건 61주기를 맞아 구례에서도 정부 지원을 받은 위령제가 처음으로 봉행됐다. 구례군은 여순사건 구례유족회 '제2회 여순사건 구례지역 희생자 위령제'를 열었다.

여·순사건 전국화 위한 서울 유족회 피나는 싸움 전개

이에 따라 유족회 회칙에 공동대표 중 상임대표는 지역별로 순번제 1년 임기로 한다고 명시했다. 연장자순으로 했기 때문에 구례, 여수, 순천, 광양, 보성 순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후 고흥과 서울 유족회가 2019년도 이후에 합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전남도가 70주년을 맞아 전남도 차원에서 예산을 들여 치르게 됐다. 전남도의 예산을 들여 여순사건의 전국화를 위해 서울 광화문에서 서울 지역 시민사회의 동력을 받아 추모위령제를 치르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런 사업 진행의 배경에는 촛불 집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고 문화공간 ‘온’이라는 협동조합을 만들어 문화공간 카페를 만들어 서울 지식인들의 모임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됐다.

이들은 여수항쟁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시민위원회를 조직해 여순사건 70주년 행사를 개최하게 된다. 이후 국회 특별법 제정을 위해 여수, 순천 등 전남 동부지역의 시민사회나 유족회의 한계가 드러나자 서울 유족회를 조직했다.

2018년부터 조직을 세우려고 노력했지만 1년 만에 조직 구성을 마치게 된다. 서울 유족회는 전국에 있는 유족들이 오염된 진흙이 실질적인 전국 유족회로 지방에서 올라간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수, 순천, 구례, 광양, 고흥, 보성, 전주, 강진, 해남지역 등으로 구성된다.

서울 유족회의 활동은 지역에서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피나는 싸움을 현재도 전개하고 있다. 국회 앞에서 매일 1인 시위를 통해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알렸고 국회의원들을 설득하고 정보를 획득하는 등 치열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여수경찰서가 여순사건 제69주기 순국경찰과 위령제를 가지고 있다. 향후 군·경과 유족회합동 위령제는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사진=여수경찰서 제공)
▲여수경찰서가 여순사건 제69주기 순국경찰과 위령제를 가지고 있다. 향후 군·경과 유족회합동 위령제는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사진=여수경찰서 제공)

유족회 분열, 일부 지역 중심 주도권 다툼 혈안
유족회장 임기 순번제 합의 여겨 갈등 깊어

21대 국회에서 특별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순천시 소병철 의원, 그리고 구례 유족회장과 순천 지역 시민사회진영이 중심이 되면서 각 지역이 소통의 부재 현상이 일어났다.

유족회장의 임기가 순번제로 돌아오게 되면 7년마다 한 번씩 돌아와야 하는데 1기 때 구례가 하고 다시 여수, 광양, 순천하고 5기 때 보성유족회 차례였지만 또 구례 지역에서 맡게 된다. 6기 임기는 2022년 6월까지인데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다. 급기야 유족들이 임시총회를 거쳐 보성유족회장을 추대하게 된다. 그러나 순천 지역 유족회와 시민단체들은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주도권 다툼에 혈안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이영일 이사장은 “이런 구조 때문에 유족회가 분열이 된 거다. 자기 세력들을 순천은 물론 광양까지 아울러서 패거리 싸움을 하는 아주 볼썽사나운 모습들이 돼버렸다“며 ”이렇게 하면 유명무실이 된다“고 우려했다.

제주 4.3사건 유족회와 위령제

제주 4.3사건은 반세기 가까이 금기의 영역으로 묻혀 있었다.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있는 시국이었다. 이로 인해 유족들은 희생자들을 위령하는 행사조차 공개적으로 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4.3진상규명에 대한 유족과 도민 및 4.3 관련 단체들의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1989년 도내 11개 시민사회단체가 제주 4.3사월제공동준비위원회(이하 사월 제공 준위)를 구성해 ‘제1회 4.3 추모제’를 봉행함으로써 위령제를 비롯한 관련 행사 등이 거행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4.3사건 희생자들의 위령제는 특별법 제정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

▲1992년 4월 3일 제주시 탑동광장에서 사월제 준비위원회가 주최한 제44주년 4.3 추모제 모습.(사진=제주4.3위원회 백서)
▲1992년 4월 3일 제주시 탑동광장에서 사월제 준비위원회가 주최한 제44주년 4.3 추모제 모습.(사진=제주4.3위원회 백서)

4.3 특별법 제정은 이전, 1988년 10월 무장대에서 희생된 유족들을 중심으로 ‘반공유족회’가 발족하였다. 이 반공유족회를 근간으로 1990년 6월에는 토벌대에게 희생된 유족들까지 포함해 제주 4.3사건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가 결성되었다.

1991년 제주 4.3추모행사는 유족회의 ‘제1회 4.3 희생자 합동위령제’와 사월 제공 준위의 ‘추모제’로 양분되어 거행되었으며 이는 1994년까지 지속하였다. 1993년에는 제주도의회에서 4.3 특위를 구성하고 유족회와 사월제공준위 양측에서 지내는 위령제와 추모제를 한 곳으로 공동으로 봉행할 것을 제안했으나 무산되기도 했다.

1994년에 이르러 도의회에 ‘4.3피해신고실’이 설치되고 국회에서는 여야 의원 75명이 ‘4.3 특위 구성결의안’을 제출하는 등 4.3사건에 대한 범도민적, 국민적 관심이 고조됐다. 유족회와 사월제공준위 간에 극적인 타결이 이루어져 ‘제주 4.3 희생자 합동 위령제봉행위원회’가 구성 되어 합동위령제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2006년 노무현 대통령 최초로 국가 원수 자격으로 합동 위령제 참석

▲2006년 4월 3일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4.3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했다. (사진=제주 4.3위원회 백서)
▲2006년 4월 3일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4.3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했다. (사진=제주 4.3위원회 백서)

1994년 4월 3일 ‘제46주기 제주 4.3 희생자 위령제’는 제주 4.3희생자합동위령제봉행위원회가 주최하고 제주도와 제주도의회가 후원하여 제주시 탑동광장에서 명실상부한 범도민적 행사로 거행되어 제주 4.3의 해결에 대한 도민들의 열망과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후 통합된 4.3 희생자 위령제는 제주종합경기장, 신산공원 등지로 옮겨 봉행 되었다.

2000년 특별법 제정 이후 범도민 추진위원회 주최
현재 유족회, 경우회 합동 참배, 군·경수뇌부, 여야정치인, 정부측 인사들 참석

4.3 특별법 제정 이후는 2000년 1월 12일 제주 4.3 특별법이 제정·공포되면서 ‘제주 4.3사건 희생자 52주년 범 도민위령제’부터 ‘제주 4.3사건 희생자위령사업범도민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제주도와 제주도의회가 후원해 제주 4.3평화공원 부지에서 봉행 되었다. 2003년 4월 3일 ‘제55주년 4.3사건 희생자 범도민 위령제’는 정부 측에서 고건 국무총리와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 됨으로써 위령제의 위상이 한층 격상되었다.

▲지난 8월 2일  제주4.3평화공원. 제주 4.3사건의 진실규명을 통해 제주가 평화의 섬으로 어떻게 가고 있는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다. 이날 이념 갈등의 골이 깊게 패였던 희생자유족회와 제주경우회와 합동참배는 이 지역 군인, 경찰 수뇌부까지 참석해 제주4.3의 실존적 위치와 역할, 그리고 위상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사진=김종호 기자)
▲지난 8월 2일  제주4.3평화공원. 제주 4.3사건의 진실규명을 통해 제주가 평화의 섬으로 어떻게 가고 있는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다. 이날 이념 갈등의 골이 깊게 패였던 희생자유족회와 제주경우회와 합동참배는 이 지역 군인, 경찰 수뇌부까지 참석해 제주4.3의 실존적 위치와 역할, 그리고 위상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사진=김종호 기자)

2006년 ‘제58주년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는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함으로써 국가적 행사로서의 위상을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이 추도사를 통해 다시 한번 국가권력의 잘못을 사과하고 4.3 관련 사업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2008년 ‘제60주년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는 한승수 국무총리 등 정부 측 인사와 여야 지도부 등 정치권과 1만여 명의 유족회가 참석한 가운데 봉행 되었다.

합동위령제와 별도로 지역별·마을별 유족회 위령제 거행

한편 합동위령제와는 별도로 지역별 혹은 마을별 유족회를 매년 4.3당시의 희생 시기에 맞춰 위령제를 거행하고 있다. 섯알오름 합동위령제=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합동위령제 봉행위원회(음력 7월 7일), 삼면원혼 합동위령제=6.25 예비검속 피학살자 삼면유족회 (음력 6월 15일), 현의합장묘 위령제=현의 합장묘 4.3유족회 (음력 8월 24일), 제주북부 예비검속 희생자 유족회=제주북부 예비검속 희생자유족회 (6월 25일), 북촌리 4.3희생자 합동위령제 (북촌리 4.3사건 희생자 유족회), 성산읍 4.3 희생자 위령제=성산읍 4.3사건 희생자 유족회 (11월 17일)


김종호기자naver5979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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