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수필문확회 '민들레 홀씨' 제3집

①임병식 수필가 "민들레 홀씨"

민들레는 꽃이 지고 나면 하얀 날개에 달린 씨앗을 멀리 날려 보낸다. 그런 씨앗은 땅에 떨어져서 새로운 자리에 터를 잡는다. 그 광경을 연상하면 옛날 한양의 사대부 출신으로 시골 오지 낯선 고을에 귀양 와서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다 간 인물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대부분이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급격한 정세의 변화로 하루아침에 처지가 곤두박질쳐진 경우였다. 그런 분으로 우선 생각나는 사람은 1895년에 벌어진 역변(逆變)과 경복궁 화재와 관련해 연루가 되었다는 이완용 등의 모함으로 10년 넘게 낙도 진도에서 귀양살이를 한, 조선의 문형(文衡)이라 평을 받은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 1858-1936) 선생을 비롯해,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선생, 강진 고을에 귀양 온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 등이 있다.

먼저, 무정 선생은 진도로 귀양을 와서 허백련 선생을 가르쳐 유학의 길을 터주고, 손재형 선생을 지도해 서예의 대가로 만들었다. 또한, 이건창(1852-1898) 선생은 한말에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주장하다 고종의 미움을 사 1892년 보성 고을에서 귀양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송명회와 설주(雪舟) 송운회(宋運會) 형제를 가르쳤다. 그들은 선생에게 경서와 서법을 익혀 크게 이름을 떨쳤다. 이건창 선생은 보기 드문 수재였다. 그는 일찍이 15세 때 강화도에서 치러진 문과별시에 급제했다. 당시는 나이가 어려서 벼슬길은 18세가 되어서야 홍문관 주서로 입직을 했다. 그는 문장이 출중해 청나라에 동지사 서장관으로 갔을 때 비록 나이 23세의 약관이었으나 접빈사를 감동시켰다. 한편, 그는 성품이 청렴 강직하여 공무를 봄에 있어서 한 치의 부정비위도 눈감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기준에는 친척과 친구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그는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당시, 청국인과 일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부동산을 사들이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를 금지시키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를 두고 그들은,

"조약상, 외국인에게 가옥이나 토지매도를 금하는 조항이 없는데 왜 금지를 시키려 하느냐?"라고 따졌다. 이에 이건창 선생은,

"우리가 우리 국민을 금지 시키는데 조약이 무슨 상관이냐"라며 일축했다고 한다. 선생은 한때 고종의 신임을 받았다. 나랏일이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임금이 나서서 "내가 그대를 아니 전과 같이 잘하라"라고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선생은 외세를 등에 업은 모리배들의 모함으로 유배 길에 오르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때는 고종도 변심하여 지켜주지 못했다. 선생은 귀양지에서 후학을 지도했다. 그때 가르침을 받은 두 형제가 크게 이름을 떨쳤으니 선생의 빛나는 업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나는 또 한 분은 윗세대를 거슬러 올라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있다. 이때 만난 수제자 치원(卮園) 황상(黃裳)과는 각별한 관계였다. 1801년, 선생이 강진 땅으로 유배를 오자 몇 명의 아전 자식들이 배움을 청했다. 해서 어렵게 주막집 봉놋방에 서당을 열게 되었는데 거기에 15세인 황상이 끼여 있었다. 황상은 선생으로부터 삼근계(三勤戒. 부지런하라)를 받고, 선생이 18년 유배 생활을 마치고 한양으로 떠날 때까지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학문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그런 그를 두고 사람들은 "벼슬길에 나가지도 않으면서 무엇 하려 공부를 계속 하느냐"라고 했지만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는 다산의 수하에서 공부하며 선생의 두 아들과도 깊이 우정을 쌓았다. 나중에는 정황계(丁黃契)를 만들어 이어갈 정도였다. 그런 황상을 추사도 높이 인정했다. 그 정황은 1848년 추사가 귀양에서 풀려나 뭍으로 나오면서 먼저 황상을 만나려고 백석동까지 찾아간 행적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때는 만나지는 못했다. 그 아쉬움은 추사가 다산의 장남인 정학연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난다.

"황상의 시를 음미해보니 두보를 골수로 하고 한유를 근골로 한 것이었습니다. 다산의 제자를 두루 꼽아보아도 이청 이하 모든 사람이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중략) 서울로 갔다고 하여 구슬피 바라보며 돌아왔습니다. 이제 내가 서울로 오니 그는 이미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는군요. 제비와 기러기의 어긋남과 같아서 혀를 차며 안타까워할 뿐입니다."

그러한 황상은 어느 날 주민의 참상을 목격하고 스승에게 알렸다. 때는 1803년 봄, 바닷가 노전리에 사는 어느 백성이 군정(軍政)의 횡포로 살 수 없게 되자 자기의 남근을 잘랐는데 그 사실을 말한 것이다. 이것을 보고 다산이 지은 시가 그 유명한 애절양(哀絶陽)이다. 한편, 황상은 거문도의 대문장가 귤은(橘隱) 김류(金瀏) 선생과도 교류하면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귤은보다 26세가 많았던 황상은 이 밖에도 호남의 영재들과도 두루 교류하며 학문과 시문을 전파했다. 실로 민들레가 홀씨를 뿌려 곳곳에 꽃을 피우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를 생각하면 귀양 와서 고생한 당사자는 낯설고 물선 머나먼 객지에서 고통이 많았겠지만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지역민에게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는 더없는 배움의 기회이지 않았나 한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당신들의 불행은 또 다른 면에서는 학문의 전수, 문화의 전파자로서의 귀한 역할을 톡톡히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계속>

저작권자 © 뉴스탑전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