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수필문학회 '민들레 홀씨' 제3집

②엄정숙 수필가 "외할머니의 붕어빵"

추억 속의 겨울은 언제나 따뜻하다. 오래된 추억일수록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자주 꺼내 보지 않은 흑백사진을 보면, 배경이 된 벽이나 마루에 따사로운 햇살이 있다. 사는 일이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날은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한 모퉁이를 더듬더듬 찾아가는 버릇이 생겼다.

엄동이었다. 동네 한가운데 있는, 호수보다 작고 웅덩이보다는 큰 연못에도 얼음이 얼었다. 아이들도 냇물처럼 시퍼렇게 얼어서 웃어도 우는 것처럼 보였다. 오빠는 인근 학교에서 내다 버린 나무 의자를 거꾸로 눕혀서 썰매를 만들었다. 의자 썰매에 나를 태우고 겨울 한복판을 쌩쌩 달리면 동네 아이들도, 겨울바람도 길을 터주었다. 든든하고 따뜻했던 오빠의 등 뒤에서 세상 물정 모르고 보낸 한 시절이 어제처럼 선명하다. 지칠 때까지 놀고 싶지만, 집으로 가야 하는 날이 있었다. 외할머니의 붕어빵을 사러 가야 했다.

다시 붕어빵의 계절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길모퉁이에 일 년 내내 붕어빵 부스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내 눈에는 겨울이 되어서야 보이기 시작한다. 싸한 바람결에 붕어빵 익는 냄새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구태여 사지 않아도 나는 그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어김없이 내 어린 시절의 한 부분이 생각나고, 외할머니의 적막한 시간을 염려하던 어머니의 마음이 이제야 제대로 읽어진다. 외할머니를 떠올리기에는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가 버렸다. 내게도 외할머니가 계셨는지 잊고 있다가도 붕어빵을 보면 외할머니의 존재가 확실히 떠오른다. 외갓집은 우리 집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별로 크지 않은 동네여서 큰 기와집이 더 크게 보였다.

 

외삼촌의 살림살이가 기울어질 때쯤인가,근방에 있는 15 육군병원의 군의관이 식구들을 데리고 아래체에 세 들어 살았던 기억이 난다. 내 또래의 정수라는 도시 아이는 카스텔라나 양갱을 먹었다. 나는 볼일이 없는데도 외갓집을 들락거렸다. 경수가 건네주는 양과자를 맛볼 수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네가 다른 애들보다 그 아이와 친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경수와 친구가 되었지만, 동네 아이들만큼이나 친하지는 못했던 거 같다.

그때만 해도 외할머니는 마루에 나와 햇볕 가운데 앉아 계셨다. 경수와 나는 나무 그늘에서그림 숙제를 하곤 했다. 나는 몽당이가 된 크레용을 썼지만, 경수는 일제 크레파스를 썼다. 좀 써도 된다고 해서 덧칠할 때 살짝 써 보기도 했다. 바로 그때쯤 외할머니가 마루를 탕탕 치시는 동시에 손짓으로 우리를 불렀다. 높은 마루를 기다시피 올라가면 곶감이나 전병 같은 파삭파삭한 과자를 주셨다. 입이 합죽하고 은색 머리를 쪽진 외할머니는 경수 보는 데서 나를 다듬거나 과자를 더 주시거나 하지는 않으셨다. 다행이었다. 그런 면이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나의 내력에서 애써 찾아낸 닮은 점이라고 생각하면 따뜻한 물 한 잔 마신 것처럼 마음이 편하다.

외할머니가 손수 방문을 여닫지 못하고 놋요강이 있는 방안에만 틀어박혀 사신 지가 얼마나 길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외숙모와 어머니가 번갈아 가며 외할머니의 방안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외갓집 밭이 있는 구봉산 언덕으로 꽃상여가 요란한 선소리를 따라가는 걸 보았다.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여기까지가 전부인 것은 쓸쓸한 일이다. 어머니 살아 계실 때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하신 듯도 한데 귀담아들어 두지 않은 것은 순전히 나의 실수요 불찰이다.

그리움의 끈을 잘라버린 꼴이 되었다. 뚝뚝 부러진 추억의 조각들을 애써 주워 보아도 외할머니의 붕어빵만 떠오른다. 붕어빵은 맛이 있다. 외할머니의 붕어빵은 더 맛이 있었다. 천방지축 앞뒤 가리지 않고 뛰놀던 내가 가장 성실하게 책무를 다한 것은 어머니가 시킨 붕어빵 심부름이었다. 그중에서도 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비 오는 날 붕어빵을 사러 다니던 일이다.

신작로가 되기 전의 큰길은 비만 오면 질퍽거렸다. 15 육군병원으로 오가는 지프가 가끔 흙탕물을 튀기며 지나다녔다. 유독 비가 오는 날에 어머니는, 입이 궁금한 외할머니를 위해 붕어빵을 사 오게 하셨다. 그 일을 내가 도맡아 했다. 길에서 태어나서 길엽이라는 이름을 가진 먼 친척 언니가 붕어빵 장사를 했다. 밀가루 포대 종이에 붕어빵을 싸주며, "꽉 보듬고 가거라."하면 나는 "예"라고 대답했다. 가슴에 품은 붕어빵의 온기가 으슬으슬한 몸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참기 어려운 고소한 냄새, 그것은 경수가 주던 고급 과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때 그 냄새가 내 걸음을 붙잡고 있는 길모퉁이에서, 나는 먼 데 어머니

심부름 갔다 오듯 추억 속으로 들어간다. 어김없이, 햇살 바른 대청마루에

서 붕어빵을 오물오물 씹고 있는 외할머니를 만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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