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존 상태 양호·일제강점기 유적 관리 대책 절실
여수시, 땅 소유주와 협의해 답사 코스로 개발

천편일률적인 관광 패턴을 유지하거나 대규모 관광 시설을 짓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관광 자원의 다양화와 차별화이다. 특히 이미 알고 있는 관광 콘텐츠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알려져 있지 않은 숨어 있는 여수의 콘텐츠를 발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수가 이순신과 거북선의 도시라고는 하지만 다른 지자체에 선점을 당하거나 크게 차별화된 콘텐츠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아직 가치를 드러내지 않았거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묻혀 있는 역사문화유산 자원이 적지 않다. 숨은 보석(콘텐츠)들을 발굴해 얼마만큼 다양하게, 짜임새 있게 만들어 내놓느냐도 관건이다.

<동부매일>은 여수지역 곳곳에 아픈 역사로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유적과 여순사건, 한국전쟁 등의 흔적을 찾아 다크투어리즘의 가능성을 모색해 본다. 특히 이번호부터는 여수지역의 일제강점기 유적의 실태를 들여다보고 활용 방안 등도 함께 모색할 계획이다.

▲ 일제강점기 일본군 지하벙커 입구. 여수시 주삼동에 위치한 일제 강점기 여수 주둔 일본 해군의 임시사령부로 사용되던 지하벙커상부가 최근 공사로 흙이 파헤쳐져 있다. 길이 100m의 이 벙커는 일제강점기때 여수 신월동에 위치한 일본해군 202부대가 미국과 연합군의 공습을 대비해서 만들었던 지하벙커로 알려졌다.
▲ 일제강점기 여수 주둔 일본해군 지하벙커 내부.

여수지역의 일제강점기 일본군 군사시설을 활용해 새로운 관광수요를 창출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여수에 주둔했던 일본 해군의 지하벙커가 훼손될 위기에 처하는 등 여수시는 지역 내 일본군 군사시설 현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있어 체계적인 관리가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역사학자 주철희(52, 순천대학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연구센터장) 박사는 지난 26일 여수시 주삼동 여천초등학교 뒷산에 있는 일본 해군 임시 지하사령부용 콘크리트 지하 구조물을 덮고 있던 흙이 공사로 인해 파헤쳐져 훼손 우려가 있다며 여수시의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주철희 박사의 저서 <일제강점기 여수를 말한다>(흐름, 2015)에 따르면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여수시 신월동에 위치한 일본 해군 202부대가 미국과 연합군의 공습을 대비해서 만들었던 지하벙커로 알려졌다.

지하벙커(벙커Bunker는 콘크리트로 군사적 목적을 위해 만든 요새를 말한다)는 타원형 형태로 2개의 입구가 연결돼 있으며 2.5m, 높이 3m, 길이 100m 정도 규모다.

▲ 일제강점기 일본군 지하벙커 입구. 여수시 주삼동에 위치한 일제 강점기 여수 주둔 일본 해군의 임시사령부로 사용되던 지하벙커상부가 최근 공사로 흙이 파헤쳐져 있다. 길이 100m의 이 벙커는 일제강점기때 여수 신월동에 위치한 일본해군 202부대가 미국과 연합군의 공습을 대비해서 만들었던 지하벙커로 알려졌다.
▲ 일제강점기 여수 주둔 일본해군 지하벙커 내부.
▲ 일제강점기 여수 주둔 일본해군 지하벙커 내부.
▲ 일제강점기 일본군 지하벙커 환기구.
▲ 여수시 주삼동에 위치한 일제 강점기 여수 주둔 일본 해군의 임시사령부로 사용되던 지하벙커 내부 물탱크.

지하벙커는 웬만한 폭탄 공격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주 박사가 만난 주민들에 따르면 야산을 절개해 콘크리트 지하 벙커를 만들고, 다시 흙을 덮어 그 위에 관목을 심어 위장했다고 한다. 이 지하벙커는 1990년대까지 민방위 방공호로 사용됐으며 일제강점기 때 정확히 언제 만들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한반도는 일제의 군사요새였다>(나남, 2014)의 저자 KBS 이완희 PD는 일본의 전쟁유적 연구가 츠카사키 마사유키의 자문을 통해 이 벙커를 해군 지하 사령부로 추정했다.

벙커 중간 왼쪽의 높이 5m, 폭 5m, 길이 10m 규모로 굴착된 공간은 지하 사령부의 주요 공간으로 이용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에는 오랫동안 지하에서 체류할 수 있는 물탱크가 만들어져 있다. 아울러 취사 때 발생하는 연기가 빠져 나갈 수 있는 환기구와 화장실 용도의 하수구도 있다. 중앙 바닥에는 발전기를, 벽에는 전기 배선을 설치한 흔적이 남아 있다. 지하 공간을 칸막이로 나누어 시설한 흔적도 발견된다. 이 지하벙커를 육군이 아닌 해군 사령부로 판단한 근거는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해군은 육군보다 시멘트와 철근 등의 물자를 훨씬 풍부하게 보유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100m정도 떨어진 곳에는 통신시설용 지하벙커가 따로 있어서 여수시 신월동(당시 신월리) 본 주둔지가 공격 받을 때 임시로 피신해 사용할 수 있는 지하사령부라는 점이 확인된다.

천연 요새로 여수항공기지(해군 202부대)가 있었던 신월리에는 수상비행장의 활주로, 공장, 격납고 등 다양한 군수시설이 즐비해 적에게 노출될 위험성이 컸다. 이에 비상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내륙 깊숙한 곳에 제2의 지휘부가 필요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 일제강점기 일본군 통신시설용 지하벙커.

여수시농업기술센터 입구의 방공호로 알려진 이곳은 전신소電信所를 지하에 구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완희 PD는 이 전신소가 해군 지하 사령부의 통신을 담당했던 시설로 봤다. 전신소 건물 역시 견고한 콘크리트로 구축돼 있으며 지상에는 굴뚝 형태의 구조물 6개가 있다. 구조물 안을 들여다보면 지하 공간과 연결돼 있다. 이 굴뚝은 안테나를 지상으로 올리기 위한 통로로 추정된다. 전신소는 여수시농업기술센터에서 버섯 등의 배양시설로 활용했으나 최근에는 안전상의 이유로 입구를 폐쇄한 상태다.

해군 지하 사령부 벙커의 왼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는 수생식물을 키우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다. 구조물의 위치와 쓰인 자재로 봤을 때 지하벙커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두 곳에 사용된 자갈 모두 ‘강자갈’이다. 이 구조물의 용도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깊이가 깊지 않아 야외 목욕시설로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천초교 진입 도로 건너편 논 한복판에도 일제 강점기 시설이 남아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이곳에서 해군 사령부 벙커까지 송수관이 있었으며, 이 같은 구조물이 주변에 3곳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이완희 PD는 덮개가 있는 우물로 추정했지만 현재 우물로 사용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 해군 지하 사령부 벙커의 왼쪽으로 50m 떨어진 곳의 콘크리트 구조물. 구조물의 위치와 쓰인 자재로 봤을 때 지하벙커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두 곳에 사용된 자갈 모두 ‘강자갈’이다. 이 구조물의 용도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깊이가 깊지 않아 야외 목욕시설로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최근 땅 소유주가 창고 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파는 과정에서 콘크리트 벙커 구조물 상부가 드러났다. 현재까지 구조물은 파괴되지 않았지만 보존을 위한 후속 대책이 절실한 실정이다.

여수시 관계자는 “13명 명의의 이 땅이 최근 소유주 한명으로 정리되면서 창고 건물을 짓기 위해 공사가 시작됐다”면서 “소유주와 협의해 보존 가능하고 근대 문화유산 답사 코스로 개발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땅 소유주도 전기 시설 설치 등 보존에 동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철희 박사는 “구조물은 일제강점기 여수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하며 후세에 역사 교육장으로도 손색이 없다”면서 “시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의 사회와 생활상, 군사시설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답사 장소이기 때문에 반드시 보존하려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여수에는 이곳을 포함해 여순사건이 최초 발생한 신월동 군부대 부지, 신월리선과 넘너리 철도굴, 자산공원 고사포진지, 마래터널 등 40여 곳의 일제강점기 군사시설이 있으나 제대로 관리 되지 않고 있다.

일제강점기 여수는 수산업의 항구도시로, 1941년 아시아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여수에는 요새사령부와 중포병연대가 배치됐으며 여수수상항공기지(해군 202부대)가 자리 잡았다. 이는 일제가 여수를 경제적·군사적 주요 요충지로 인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자료 출처=<일제강점기 여수를 말한다>(흐름, 2015) 주철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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