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단 설립 논의가 필요하다] ① ‘여수다움’을 구현할 문화 비전을 제시하고 여수를 창의성 높은 도시로 가꿀 지역 문화·예술 활동의 대표적 거점, 여수가 가진 다양한 유·무형의 자원들을 재구성하는 작업 과정에서 도시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다양한 창의력이 발휘되도록 정책 의제를 만들어내고 이끌 전문 조직이 필요하다.

전남 여수시 전경. (사진=뉴스탑전남)
전남 여수시 전경. (사진=뉴스탑전남)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우리 일상은 물론 지역 문화예술의 생태계 또한 바꿔놓고 있다.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문화예술 활동이 축소되면서 온라인 공연과 전시가 이제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 온라인은 시간·장소 제한 없이 작가와 관객을 만나게 해줬지만,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작품의 감동, 작가와 관객이 같은 공간에서 나누는 교감의 기회를 앗아가고 있다. 특히 코로나는 재정과 콘텐츠 경쟁력이 약한 예술단체 등 생산자 간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코로나19는 지역 문화예술인들에게 기회이면서 위기다. 온라인에서 국내는 물론 전 세계 문화예술인과 경쟁을 해야 하는 데 자본, 기획력, 기술력, 경쟁력이 약한 상태에서 그들과 경쟁하기에는 사실상 어렵다. 다양한 실험을 해 볼 수 있는 지원과 투자가 필요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다. 일례로 아카이빙을 위한 플랫폼 제작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언감생심이다. 온라인 공연과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예술에 접목하는 공연이 활성화되면서 콘텐츠 제작과 장비 지원이 절실하지만 이를 실현할 인적‧재정적 자원이 턱없이 부족하다.
 

여수여술제. (사진=여수시)
여수여술제. (사진=여수시)

한편에서는 관 지원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자생력이 약해져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둔감해졌다는 지적도 있지만, 애초부터 기반 자체가 약해 시도조차 해 볼 수 없었다는 푸념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배고픈 삶을 선택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예술은 배가 고파야 한다는 전근대적인 생각도 여전하다. 그러나 창작의 불씨마저 꺼지게 만드는 열악한 현실이 이들 탓만의 탓일까.

포스트코로나 시대 문화예술 활동 방식이 변화하면 이에 따른 문화예술정책도 바뀌어야 한다. 공급자 중심, 시 주도의 톱다운(하향식) 방식이 아니라 생산자·소비자 중심, 지역에 맞는 정책과 비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코로나19가 부른 또 하나의 현상은 우리가 사는 지역, 동네에서 생활하고 소비하고 노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자생적으로 지역의 미래를 가꾸고 개척하는 로컬이 강조되고 있고 경제‧관광과 연계한 문화예술 선순환의 생태계 구축이 절실해지고 있다.
 

여수마칭페스티벌 모습. (사진=뉴스탑전남)
여수마칭페스티벌 모습. (사진=뉴스탑전남)

파편화된 문화예술 정책, 가치 중심 재설계로 전환 시급

여수의 문화예술정책은 과연 이런 흐름에 대처하고 있는 것일까. 품격 있는 문화예술 도시는 시설 몇 개 갖춰놓고 ‘구호’로만 되는 게 아니다. 국내 도시들은 문화와 예술을 미래 먹거리의 하나로 보고 도시 경쟁력에 문화예술의 옷을 입히는 데 혈안이다. 매력적인 문화 기반 조성을 통해 도시의 문화적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도 힘을 쏟고 있다.

그 도시가 가진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밑바탕에 깔고 기업과 자본, 사람을 유치하려는 도시 간의 경쟁이 가속화하고 있다. 지역의 문화적 유산을 제대로 활용하는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다른 도시와 차별화를 위해서는 정형화된 틀을 벗어난 다양한 실험적 문화예술 사업이 필요하다. 그 속에서 상상력이 발휘되고 우리 지역만의 독창적인 콘텐츠가 나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관광산업도 이제는 문화예술과 융합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세계의 선진 도시를 보면 그 중심에는 새롭고 창의적인 예술 공간과 독창적인 ‘소프트웨어’ 중심 전략이 있다. 경제적 부가가치까지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제는 문화정책을 도시정책의 최상위 개념으로 둬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파편화된 문화예술 정책을 단위 사업 중심에서 가치 중심 재설계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여수시는 지난 2020년 ‘TV조선 경영대상’에서 문화예술도시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사진=여수시)
여수시는 지난 2020년 ‘TV조선 경영대상’에서 문화예술도시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사진=여수시)

돌파구는 무엇일까. ‘문화예술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관광 위기만을 위한 돌파구가 아니다. 이제는 일상 속에서 문화예술이 꽃피는 도시를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돌파구가 필요하다.

먼저 온갖 이름으로 진행되는 문화예술 정책이나 행사에 앞서 가장 선행해야 할 것은 여수시민의 문화적 안부를 묻는 일이다. 일방적으로 시설과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누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시민에게 필요한 문화 예술적 처방은 무엇일까?’ 이 물음부터 던져보자는 것이다. 문화와 예술이 시민의 삶 속에서 어떻게 안전망 역할을 할 것이며 파편화돼 가는 사회를 어떻게 끈끈한 연대로 이끄는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말이다.

또 여수가 연거푸 문화도시 지정에 실패한 것은 문화도시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가시적인 성과에 집착했던 것은 아닌지 성찰이 필요하다. 행정이 문화예술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부터 요구된다.

일상에서 문화예술을 꽃피우는 도시

여수는 수산과 공업 등으로 성장한 산업 도시이기 때문에 사실 산업·경제와 인문·문화의 격차가 크다. 시민 개개인의 가치관은 물론이고 도시 발전 방향에 대한 공감대 형성도 쉽지 않다.

국내 대표적인 인문·문화도시로는 통영과 수원, 전주 등이 꼽힌다. ‘예향의 도시’ 통영은 온화한 기후, 풍부한 수산자원, 수려한 자연경관, 섬과 리아스식 해안, 바닷길, 청정해역을 자랑하는 수산·관광자원의 보고(寶庫)로 국내 최고의 관광지로 꼽힌다. 여기까지는 여수와 비슷하다. 통영은 지역 문화예술 콘텐츠를 관광 자원화하고 도시의 품격을 높인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통영시는 일찌감치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기념공원과 국제콩쿠르를 비롯해 소설가 박경리 기념관, 시인 유치환 문학관, 시인 김춘수 유품 전시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통영시 윤이상 음악마을 축제. (사진=통영시)
지난해 11월 통영시 윤이상 음악마을 축제. (사진=통영시)
통영국제음악당 (사진=통영국제음악재단 홈페이지)
통영국제음악당 (사진=통영국제음악재단 홈페이지)

통영과 비교하면 여수는 여러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인문적·문화적 매력은 따라가기 어렵다. 그동안 여수지역에서도 인문학과 문화예술 도시로서 저변확대를 위한 노력들이 진행돼 왔으나 도시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기엔 여전히 부족하다는 평가다.

<인문도시 통영, 그 아름다움에 빠지다>의 저자 정은영은 인문도시를 ‘일상생활에서 인문 교육 및 체험을 통해 지식기반 사회와 창의성에 기반을 둔 인적 사회 구축을 지향하는 도시’라고 정의한다. 책은 통제영 400년 역사와 삼도수군통제영, 이순신과 한산대첩 등 통영의 역사‧철학, 남해안별신굿과 이순신 장군의 춤 ‘승전무’ 등 전통예술, 박경리‧유치환‧유치진‧김춘수 등 통영의 문학, 윤이상‧이중섭‧전혁림 등 현대예술, 통영의 자연과 섬 등을 소개하면서 이야기로 풀어낸다.

2011년부터 인문도시를 표방해온 수원시는 2013년 전국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인문학 전담팀’을 만들었고 ‘인문학 도시 조성 조례’를 제정했다. 인문도시 사업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문도시주간을 운영하는 등 10여 년간 인문도시를 조성한 경험을 기반으로 문화도시를 설계하고 있다. 수원시는 지난해 제3차 문화도시로 지정됐다. 거의 대부분 수원문화재단이 주도한다. 여수시는 의원 발의로 2017년 인문학 진흥 조례를 제정했으나 평생학습 조례와 비슷하다며 기본계획도, 위원회도 없는 상황이다.
 

수원문화재단 도담도담 토론회. 지역 예술인과 정기적인 대화와 토론회를 통해 문화예술 정책 방향과 지역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문화예술 지원방향을 수립한다. (사진=수원문화재단)
수원문화재단 도담도담 토론회. 지역 예술인과 정기적인 대화와 토론회를 통해 문화예술 정책 방향과 지역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문화예술 지원방향을 수립한다. (사진=수원문화재단)

10여 년 전부터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인문도시를 표방한 전주시는 인문학중심도시 조성 중·장기 발전계획을 마련하고 각종 인문학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전주시는 올해 ‘책의 도시’를 선포하고 인문도시 구축을 위해 도서관과 평생교육을 통합하는 조직개편을 통해 4급 사업소인 ‘책의도시 인문교육본부’를 신설했다. 본부 산하에 책의도시 여행과, 도서관시설과, 인문평생교육과 등 3개 과와 기존 시립도서관 2곳을 책의도시 정책과, 책의도시 운영과로 변경했다.

이들 도시를 언급한 것은 시민이 문화시민으로서 문화적, 미학적 덕목을 갖추는 일상에서 문화예술을 꽃피우는 도시, 먹고 사는 문제의 고달픔을 문화예술에서 위로를 받는 도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도시의 출발점이 도시 구성원들의 인문적·문화적 소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기초과학이 뒤지면 산업 전반에서 경쟁력이 떨어지게 되듯 인문학이 뒷전인 사회는 정신적 토양이 빈약할 수밖에 없고 문화적 경쟁력에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인문학 토대가 강하면 창조적 역량과 발전적 혁신이 발휘될 수 있는 성숙한 여건이 될 수 있다.

문화적 저력과 자긍심을 가진 도시, 그곳이 ‘여수’였으면 한다. ‘여수다움’을 구현할 문화 비전을 제시하고 여수를 창의성 높은 도시로 가꿀 지역 문화·예술 활동의 대표적 거점, 여수가 가진 다양한 유·무형의 자원들을 재구성하는 작업 과정에서 도시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다양한 창의력이 발휘되도록 정책 의제를 만들어내고 이끌 전문 조직이 필요하다.
 

한국예총 여수지회는 지난 12월 22일 ‘여수세계섬박람회 문화예술 프로그램 아젠다’를 주제로 문화예술 심포지엄을 열었다. (사진=임호상)
한국예총 여수지회는 지난 12월 22일 ‘여수세계섬박람회 문화예술 프로그램 아젠다’를 주제로 문화예술 심포지엄을 열었다. (사진=임호상)
여수 범민문화재단은 지난해 12월 29일 ‘여수문화예술 100년 복합콘서트’를 열었다. (사진=페이스북)
여수 범민문화재단은 지난해 12월 29일 ‘여수문화예술 100년 복합콘서트’를 열었다. (사진=페이스북)

시작은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이 해야 한다

그동안 문화재단 설립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구체화하지 못했다. 여수시에 문화재단이 부재한 것은 ‘문화’가 개발, 건립, 조성 등 하드웨어 구축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개개인은 행정의 문화예술 정책이나 지역의 관행‧행태를 열렬히 비판하면서 공정하고 미래지향적인 문화예술 정책과 비전을 제시할 컨트롤타워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파편화된 목소리가 응집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현실로 구현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여수의 문화예술 토양이 수도권 등지에 비해 척박하다고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현실이 그러하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 없지 않은가.

그동안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나 사실 지금까지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 계획과 정책은 여수시가 주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그 틀을 벗어나 지역 문화예술인 창작과 복지 지원 등을 넘어 문화예술 전문기관으로서 다양한 정책 기능을 담당할 컨트롤타워 필요성을 논의할 시점이 됐다. 노력의 주체와 결실의 주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존의 틀을 깨고 보이지 않는 장벽을 허무는 작업은 역사적으로 문화예술인들의 몫이었고 숙명이기도 했다.
 

‘요절한 천재 조각가’ 불리는 故 류인 작가의 전시회가 여수 예울마루에서 지난 7일부터 2월 20일까지 열린다. 류인 작가는 여수 돌산 출신 서양화가 고 류경채 화백의 아들이다. (사진=하태민 기자)
‘요절한 천재 조각가’ 불리는 故 류인 작가의 전시회가 여수 예울마루에서 지난 7일부터 2월 20일까지 열린다. 류인 작가는 여수 돌산 출신 서양화가 고 류경채 화백의 아들이다. (사진=하태민 기자)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 저서 <고도를 기다리며>는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아무 것도 없고 아무도 없는 황량한 곳에서 50년 동안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부조리극의 고전이다. 내일은 고도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하루를 마감하지만 고도가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도 없다. 작가 또한 책에서 고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고도는 각자에게 다를 수 있다. 정답이 없다. 그러나 우리 지역의 문화예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논제를 던지는 것은 아닐까. 오지 않을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푸념만 늘어놓을 것인지, 아니면 무엇을 어떻게 현실화해 당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길을 만들어갈지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이 묻고 답할 차례다.

마재일 기자 killout133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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