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반월·죽점·도원·가곡·무선·사벽마을이 쌍봉면 선원리로
선원동은 ‘무선’과 ‘도원’의 끝 자
화장동은 ‘화산’과 ‘군장’마을에서 한 글자씩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고락산에서 바라본 (구)여천시 전경. (사진=여수시)
▲고락산에서 바라본 (구)여천시 전경. (사진=여수시)

⑰ 여천동

여천동은 옛 여천군 시기 선원·여천·화장리가 합쳐진 지역이다. 동쪽 비봉산과 중앙 테미산이 월평들판을 만들고, 서쪽 무선산과 북쪽 전봉산 사이의 석창들판, 무선산과 소라면 비봉산을 두고 화장들판이 형성된 분지 지형이다.

석창들판은 『여수잡영』에 ‘석보평’으로 기록하고 시로도 남겼다. 석창 주위의 들판을 말한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들판은 인간의 생명줄로 옛날에는 낮은 언덕은 깎고 얕은 바다는 막아 농토를 일구어 사용했다. 석보들은 사방이 트여 있고 물길도 이용하기 유리하여 여수에서는 가장 넓은 생명의 땅이다.

농사에서 가장 주요한 것 중의 하나가 관개시설이다. 백거白渠는 반듯하게 뻗어 있는 도랑이다. 석보들에는 물을 댈 수 있고 빼기에도 쉬운 물길이 마치 꼬치처럼 끊이지 않고 연결되어 흐르며 지세가 높고 낮음이 없이 대패로 민 듯이 평탄하다.

여천동을 흐르는 쌍봉천은 호랑산에서 물줄기가 처음 생겨 봉계동에서 하천이 시작됐다. 여천동·해산동을 거쳐 광양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바다로 들어가기 바로 앞서 소라면 대포에서 내려온 소라천이 합쳐진다. 여천동의 한 법정동에 속한 선원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반월·죽점·도원·가곡·무선·사벽마을이 합쳐져 쌍봉면 선원리가 됐다.

▲옛 진남주공아파트를 허물고 여수 최초 재건축 단지인 무선 
▲옛 진남주공아파트를 허물고 여수 최초 재건축사업. (사진=여수시)

‘무선’과 ‘도원’의 끝 자를 따 선원동이 됐다. 선원동은 옛 쌍봉면의 중심부로 무선산과 테미산 사이에 있었다. 무선과 도원 마을은 무선산, 반월과 가곡 마을은 테미산 자락, 사벽 마을은 그 중간에 있었다. 무선·도원·사벽·가곡 마을이 택지개발 조성 지구에 포함돼 1977년 사벽이 가장 먼저 철거됐다. 1984년 가곡, 1989년 도원, 1990년에는 무선이 철거돼 반월 마을만 옛 모습대로 남아 있다.

여천동은 선원동과 화장동을 담당하는 행정동이자 법정동으로 도시와 농촌이 섞인 도농 복합 형태의 지역이다. 법정동으로써 여천동은 내동·월평·석창·월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여천’이라는 땅 이름은 1914년에 생겼다. 여수현의 ‘여’와 안골과 대곡에서 흐르는 물이 맑고 깨끗하였을 뿐만 아니라 월평 마을 뒤의 용못이 아름다워 ‘내 천’자를 붙인 것이다.

화장동은 1789년 작성된 『호구총수』에 여수면 상도의 ‘대통려’라는 땅 이름으로 표기됐다. 1905년 성산리·군장리·대통리 3개 마을이 쌍봉면에 속했다. 1908년 현내면에 포함된 군장과 입덕 2개 마을이 보인다. 화장동은 1914년 ‘화산’과 ‘군장’마을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든 땅 이름이다.

『호구총수』에 따르면 여수면 상도의 원랑동려·석보려·내동려·평촌리·죽산려·신촌리·대통려와 같은 땅이름이 나타나는데 이 가운데 일부는 지금의 여천동에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87년 여수군이 새롭게 생길 때 여수군 현내면에 포함된 뒤 1908년 여수가 현내면과 쌍봉면으로 나뉘면서 쌍봉면에 그대로 남게 됐다.

선원리 가곡, 도원, 사벽, 무선, 반원, 죽점 

여천리 내동, 월평, 석창

화장리 화장, 군장, 대통, 협곡

선원동과 화장동은 무선산 지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산은 ‘신선이 소매를 높이 쳐들고 춤추는 것 같이 보이는 산’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호남정맥이 지나는 순천 계족산에서 나뉜 여수지맥이 무선산을 지나 백야 곳까지 이어진다. 산 정상에는 기우제를 지내면 터가 있었다. 인구수는 1981년 선원리, 반월과 가곡마을이 합쳐진 월곡리, 화장리, 여천리 순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1977년부터 시작된 여천공단 배후도시 건설을 위해 사벽 마을 등의 철거가 영향을 끼쳤다. 1990년부터 인구수는 점차 증가했다. 택지개발을 마친 뒤 공단 사택을 비롯해 주택 단지와 아파트 등이 세워져 인구가 집중됐다.

▲선사유적공원. (사진=여수시)
▲선사유적공원. (사진=여수시)

● 청동기 시대

화장동 지역을 여수시에서 여수산단 지역 이주민을 위한 택지로 개발하던 곳이다. 고인들이 확인됨으로써 1996년 7월부터 11월까지 순천대·목포대·성균관대 박물관이 1차 발굴 조사를 했다. 2000년 2월 23일부터 6월 21일까지 세 기관이 2차 발굴을 마쳤다.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유적은 동서 방향의 가늘고 건 구릉과 이 구릉 방향과 일치하게 7기의 고인돌이 2열로 배열되어 있었다.

덮개돌이 없는 11기의 무덤방이 확인돼 모두 18기의 무덤방이 조사됐다. 출토 유물은 대롱옥 3점, 자루달린 돌칼 3점, 돌화살촉 2점, 숫돌, 돌끌 등의 석기류와 무늬 없는 토기 1점을 비롯한 토기 조각이 출토됐다.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는 대통 마을 입구에 분포되어 있던 27기를 발굴했다.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유적이 있던 구릉의 아랫부분에 해당했다.

고인돌은 대부분 등고선 방향과 일치한 동북-서남 2열이다. 형식상으로는 굄돌이 보이지 않는 개석식이다. 덮개돌이 있는 27기의 고인돌 가운데 무덤방 형태를 간직하여 하부 구조가 남아 있는 것은 8기였다. 이 가운데 3호 고인돌의 경우는 하나의 덮개돌 아래 무덤방을 나누는 돌과 둘레돌에 의해 구분되는 4기의 돌덧널이 조사됐다.

적량·평여·봉계·오림동 등 여수 지역에서 여러 차례 발굴, 조사된 비파형동검이 화장동 지역에서도 출토돼 우리나라에서 여수반도가 비파형동검 문화의 중심 지역임을 확인시켜 줬다. 화장동 유적은 청동기 시대 주거지와 철기 시대에서 조선 시대까지 이어지는 역사 시대 주거지 및 각종 유물이 발견돼 ‘선사 시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죽음’을 주제로 선사 유적 공원을 만들었다. 2001년 11월 공사를 시작해  2003년 12월 완공됐다.

● 철기 시대

여천동 지역에서 살았던 철기 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화장동 유적에서 발굴된 토기들을 들 수 있다.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1점은 경질 무늬없는 토기로 평평한 바닥으로 몸체 부분은 벌어져 올라가다 위쪽 부분에서 약간 줄어들었다. 몸체 부분에는 아가리 일부를 내밀게 하여 물을 따를 수 있는 부리를 만들었다.

철기 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토기로서 후기 무늬를 두드려 넣는 단계의 깊은바리모양 토기와 비교할 때, 그릇의 형태는 별 차이가 없으나 무늬를 두드려 넣은 흔적이 보이지 않는 점이 다르다. 무늬를 두드려 넣은 토기가 나타나기 전의 경질 무늬없는 토기 단계에 해당돼 철기 시대 편년에 중요한 자료다.

▲선원동 테미산에 있는 백제시대 산성. (사진=여수시)
▲선원동 테미산에 있는 백제시대 산성. (사진=여수시)

● 삼국 시대

여천동의 대표적인 삼국 시대 유적으로 테미산성이 있다. 테미산은 해발고도 135.4m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여수시청 건물과 옛 여천시의 중심지를 비롯해 가막만 바깥쪽에 있는 개도 백야도 등의 섬들까지 볼 수 있다. 테미산성의 동쪽은 고락산성과 계함산성, 북쪽에 호랑산성·당목산성·반월산성·여수석 보가 분포하고 있다.

서쪽 화장동에는 고인돌, 청동기 시대 주거지, 통일 신라 시대의 기와를 굽던 곳 등이 발굴돼 테미산성의 지리적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테미산성이 있는 산은 고어 ‘더미’에서 비롯돼 ‘테미’ 또는 ‘퇴미’ 등으로 불렸다. 한자로 표기하면서 토끼 꼬리 모양을 닮았다 하여 토미산이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여수 지역에서는 테미산에 있는 산성이기 때문에 ‘테미산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나,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이 성이 있는 곳의 행정구역인 여수시 선원동을 따서 ‘선원동산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테미산성은 135.4m의 토미산 정상에서 해발 110m 높이까지 내려오는 곳에 쌓아진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은 흙으로 쌓은 부분과 돌로 쌓은 부분이 함께 나타난다. 총 둘레는 474m로 가장 넓은 곳은 11m 정도로 추정된다. 성벽과 관련된 시설인 문지 1곳과 성내 건물 흔적으로 추정되는 4곳이 조사돼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테미산성을 쌓았던 방법은 흙을 깎아 만든 삭토법과 석축 및 흙을 쌓아 다지고 다시 쌓아 다지는 판축법 등이 사용됐다. 테미산성을 쌓았던 방법은 흙을 깎아 만든 삭토법과 석축 및 흙을 쌓아 다지고 다시 쌓아 다지는 판축법 등이 사용됐다. 흙으로 쌓은 부분은 조밀한 판축 기법을 사용하고 있어 석성도 그 쌓는 방법이 전남 동부 지역의 백제 산성에서 흔히 볼 방법이기 때문에 백제 시대 처음 쌓아진 것으로 추정될 뿐만 아니라 기와나 토기 조각도 백제 시기의 것들이 주로 출토돼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산성에서 흙으로 쌓은 부분의 일부를 자른 결과, 판축 기법 위에 흙을 다시 쌓을 때 백제 기와 조각들이 들어가 2차례에 걸쳐 성이 쌓아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통일 신라 시대 증축됐음을 알려준다. 백제 시대에는 기와을 만들 때, 멍석무늬·문살무늬·선무늬 등을 주로 새겼다. 테미산성에서 발견된 기와는 만들 때 무늬를 새긴 뒤, 다시 물손질로 다듬어 무늬를 지우는 방법, 안쪽에서 확인되는 멍석무늬와 통쪽 흔적, 자르는 방법에서도 전면을 자르거나, 전면을 자른 후 안쪽과 바깥쪽을 다시 자르는 기법 등 백제 기와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 통일 신라 시대

화장동 유적을 발굴할 때 순천대학교 박물관 발굴 지역에서 2기의 기와를 굽던 가마가 확인됐다. 경작으로 인하여 가마의 천정 부분은 사라졌지만, 입구에 해당해 재와 같은 폐기물이 쌓인 부분인 회구부와 장작을 태우는 연소실, 기와를 굽던 공간인 소성실, 연기가 빠지는 공간인 연도 등의 유구가 아주 짜임새 있게 드러나 있었다.

▲여수 석보 사적 제523호. (사진=여수시)
▲여수 석보 사적 제523호. (사진=여수시)

● 조선 시대

석창성은 여천동에 있다. ‘여수석보’라는 이름으로 국가사적 제523호로 지정됐다. 여수석보는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반도 지형으로서 남해안과 순천 등 내륙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만나는 결절점에 있어 바닷가의 평평한 지역에 돌로 쌓아 육군들이 방어하던 ‘보’의 기능을 담당한 성이다. ‘보’란 각 지방을 지키던 군사들이 주둔하던 작은 규모의 군사시설로 영-진-보의 체계다.

여수석보는 1454년 이후 1457년 정월 사이에 쌓아졌다. 1522년 돌산포만호진에 흡수돼 폐지됐다. 관청용 물자를 보관하는 석창과 지방 장시로 기능이 변화됐다. 성벽의 길이 약 705m, 너비 5.7m로 부속 시설물로는 성문 3개, 성문 좌·우에 설치하는 치인 적대 1개, 해자, 연못, 건물지 10여 개소가 있다. 적대는 성문과 용성을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안에 높이 대를 쌓아 만든 시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평지에 쌓은 평지성으로 전체적인 형태는 정사각형이다.

▲서쪽 벽에서는 ‘구례시면’이란 글자가 새겨진 성돌이 확인됐다. (사진=여수시문화원)
▲서쪽 벽에서는 ‘구례시면’이란 글자가 새겨진 성돌이 확인됐다. (사진=여수시문화원)

성벽은 외벽 바깥쪽 1m 범위에서부터 내측의 약 4.15m~4.5m까지 약 5~5.5m 구간의 지면에 20cm 내외의 쪼갠 돌을 거칠게 다듬은 할석재와 판석재를 깔고 성벽 등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터에 쌓은 돌인 지대석을 놓은 뒤 외벽을 돌로 쌓았다. 그 뒷면을 잡석과 자갈 등으로 채우는 뒤채움을 한 다음 성벽의 윗부분과 성벽 안쪽으로 흙을 경사지게 덮어 마무리 한 내탁법으로 축조했다. 서쪽 벽에서는 ‘구례시면’이란 글자가 새겨진 성돌이 확인됐다. 석보성을 쌓을 때 내륙 지역의 고을 주민들이 동원됐음을 알려주고 있다.

성안의 물은 지대가 낮은 서벽 쪽에 치우쳐 있는 연못에 1차로 모이고, 물길을 땅속으로 파서 보이지 않게 만든 도랑형 배수로와 서쪽 벽 하단에 설치된 수구를 통해 성 밖의 해자로 빠져나가도록 처리했다. 수구를 통과한 물은 지대석보다 낮은 위치의 물받이 시설에서 받아낸 뒤 윗부분이 트인 배수로를 통해 해자로 흘러나가게 처리하는 한편 해자로 들어오는 물 역시 경사를 낮추어 자연스럽게 물이 유입되도록 과학적·기술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 화장동 선사유적공원

선사유적공원은 이 지역에서 발굴된 유적을 보존하고 지역민들에게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산책로를 중심으로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의 주거지를 재현해 놓았다. 선사 마을 고인돌·통일 신라시대 기와를 굽던 곳·움집 등으로 구성됐다. 선사 시대와 고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죽음을 주제로 하여 공원 전체를 상징적인 형태로 재구성해 역사를 체험하기 쉽게 만들었다.

선사 마을은 부족을 지배하는 족장의 정치 생활, 일상생활, 철기를 가공해 제작하는 생활 영역, 일반 부족민들의 농경 생활 영역으로 크게 구분해 구성했다. 선사 시대 사람들이 마을의 안과 밖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망루, 농사를 지은 수확물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만든 고상가옥, 침입 방지용 울타리, 신앙을 관장하는 제사장 시설 등의 부대 시설들을 재현해 놓아 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원시생활을 느껴볼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성산공원은 1997년 무선지구 택지개발 과정에서 농업용수를 공급하던 저수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원이다. (사진=여수시)
▲성산공원은 1997년 무선지구 택지개발 과정에서 농업용수를 공급하던 저수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원이다. (사진=여수시)

● 성산공원

성산공원은 1997년 무선지구 택지개발 과정에서 농업용수를 공급하던 저수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원이다. 이름은 택지 조성 이전에 있던 성산 마을에서 따왔다. 호수를 중심으로 운동장 2624㎡, 잔디밭 1만9319㎡, 호수 2만7490㎡ 등 총면적 7만845㎡ 규모이다.

2009년 ‘글로벌 경제 위기 극복과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성공적 개최의 염원을 담아’ 여수시청 공무원노동조합에서 성과 상여금 4억 1000만 원을 모아 3325㎡의 ‘헌수동산’을 만들었다. 2010년 완공해 시민들이나 관광객들에게 ‘장미공원’으로도 알려졌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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