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산면, 섬 8개와 무인도 104개로 구성
거문리 '대마도 사람들이 낚시로 고기를 잡아 왜섬, 이섬이라 불러'
유촌마을 '유자나무가 많아 유자리, 귤정리로 불러'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관하는 ‘K관광 섬 육성 공모사업’에 삼산면 거문도가 최종 선정됐다.(사진=여수시)
▲8개의 섬과 104의 무인도로 구성된 전남 여수시 삼산면은 거문도와 상백도, 하백도를 끼고 있는 해안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사진=여수시)

㉖삼산면

삼산면은 제주도를 제외하고 우리나라 가장 남쪽에 있는 거문도·초도·손죽도 등 사람이 사는 섬 8개와 무인도 104개인 112개의 도서로 구성됐다.

삼산면 지역은 조선 시대 세종 때 ‘고초도’로 불리다 연산군 때부터는 고초도와 ‘삼도’의 땅이름이 같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행정적으로 현재의 고흥군인 흥양현에 속해 있어 주민들은 육지인 고흥·장흥·낙안 등을 중심으로 교류했다. 즉 삼산면 지역에서 생산된 해산물을 장흥의 해창·원동·삼십보, 고흥의 해창만 등에서는 쌀과 교역했고, 장흥 남포에서는 주로 볏짚을 교환했다.

삼산면의 지형은 전반적으로 오랜 침식을 많이 받은 구릉성 산지가 침강 작용과 해수면 변동에 따라 삼산면을 구성하는 도서가 형성됐다. 고흥의 팔영산에서 뻗어 내려 분하고 있는 삼산면 주요 산들은 음달산·수월산·망양산·상산봉·기태봉·거커리산이 대표적이다.

삼산면의 백도는 거문도의 동쪽 약 28km 지점에 있어 39개의 섬으로 구성됐다. 상백도에서 가장 높은 곳은 130m로 1938년 만들어진 등대가 있어 주변 항로를 밝히고 있다. 1979년 국가에서 지정 문화재 명승 제7호로, 1981년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43년간 출입이 제한되고 있는 여수시 삼산면 백도. (사진=뉴스탑전남)
▲여수시 삼산면 백도. (사진=뉴스탑전남)

1896년 2월 지방 행정구역을 고쳐 편성할 때 흥양·낙안·순천·광양 등에 속한 52개 섬을 모아 돌산군이 만들어졌다. 당시 군수였던 서병수가 내부 명에 따라 돌산군의 지리와 역사, 문화 등을 담아 1899년 편찬한 『여산지』에는 “삼도는 돌산군의 서남쪽으로 700리 떨어져 초도 남쪽에 있다. 그 가운데 동도의 두 마을은 유자리와 죽전이고, 서도의 두 마을은 장작과 덕흥이며, 고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초도는 돌산군에서 서남쪽 500리 떨어진 곳으로 읍포·이성·진막 3개 마을로 구성되어있다. 손죽도는 서남쪽 400리 지점에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 손죽도 앞바다에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치다 전사한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을 비롯해 임진왜란 때 용감한 장수를 잃었기 때문에 ‘손대도’라고도 불린다.”고 기록됐다.

1896년 2월 3일 칙령 제13호 지방 제도 개혁에 따라 초도·손죽도·거문도를 포함하는 삼도는 새롭게 만들어진 돌산군에 속하였다. 같은 해 8월 흥양현에서 호적 등의 행정이 돌산군으로 옮겨지고 삼도가 삼산면으로 이름을 바꾸어 면사무소를 서도리에 설치했다.

또 초도와 손죽도를 상도, 거문도를 하도로 행정구역을 나누어 오늘날의 면장에 해당하는 집강을 상도와 하도에 각각 1명씩 두어 행정을 맡게 했다. 1908년 서도에 있던 면사무소를 고도로 옮겨, 1914년 3월 일제의 지방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돌산군이 돌산면으로 낮아지고 여수군이 설치됨에 따라 여수군 아래로 들어가게 됐다.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61호에 따라 여수읍이 여수시로 승격됨에 따라 여수군이 여천군으로 이름을 바꾸어 삼산면도 여천군에 속했으나, 1998년 4월 여수시·여천시·여천군이 통합됨에 따라 지금의 행정구역인 여수시에 속하게 됐다.

▲ 선사시대 유적지 조개더미.

● 선사 시대

『초도향토사』에는 1975년 초도우체국 옆 배난골짝 집터에서 주어 모은 뗀석기들을 기록하고 있어 신석기 시대나 그 이전 삼산면 지역에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1999년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장촌 마을에서 신석기 시대 대표적 유적인 조개더미를 확인해 학계에 보고했다. 이 유적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은 그릇의 몸체·아가리·아가리 주변·바닥의 일부분들이다. 토기에 새긴 무늬는 눌러 찍은 것, 조개껍질로 쓸어내리듯 다듬은 것과 빗살무늬가 대표적이다.

또 이 유적에서는 멧돼지 뼈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음돌 낚시와 고정식 작살이 발견됐다. 작살의 경우 대마도 사카 마을 조개더미에서 발견된 것과 매우 비슷해 신석기 시대 거문도 사람들이 일본과 교류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같은 해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덕촌 마을의 고인돌 2개 떼 10기를 보고해 신석기 시대에 이어 청동기 시대에도 거문도에서 사람들이 지속해서 살았음을 알려 주고 있다.

● 고대 사회

중국의 한나라 때는 오수전·화천·화포·대천오십 등 다양한 화폐가 사용됐다. 그중 오수전이 가장 대표로 1979년 서도 이끼미 해수욕장 부근에서 동전 중앙에 있는 구멍 위에 가로무늬가 있는 것, 구멍 아래 반쪽 별무늬가 있는 형태, 특징이 없는 오수전 3가지 1000여 점이 발견됐다.

이끼미에서 발견된 오수전과 비슷한 시기에 사용되었던 화폐인 화천이 해남군 군곡리 조개더미에서 확인됨으로써 한반도 서남부 해역을 거쳐 일본에 이르는 해상 루트를 추정할 수 있다.

▲ 여수 거문도에서 발굴된 한나라 화폐 오수전 (사진=디지털여수문화대전)

삼산면 지역의 고대 사회에 해당하는 철기와 삼국 시대에도 이 지역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인 연질과 경질 토기 조각을 손죽도, 초도, 거문도 등에서 찾을 수 있다. 토기 조각 외에도 통일 신라 시대 삼산면의 역사와 관련된 자료로 일본의 승려 엔닌의『입당구법순례행기』를 들 수 있다.

중국 당나라의 불교를 배우기 위해 선발된 일본 승려 엔닌은 838년 6월 13일 당나라에 파견될 사신의 배를 타고 하카타만을 출발해 847년 우리나라 남해안을 거쳐 9월 17일 9년 3개월 만에 하카타만으로 귀국했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9월 6일, 오전 6시쯤 무주의 남쪽 땅인 황모도의 이포에 도착하여 배를 대었는데, 이 섬을 구초도라고도 부른다. 멀리 제주도가 보인다… 산들이 있는 섬 사이를 가니 남북 양쪽은 다 산과 섬으로 겹겹이 겹쳐져 있어 태연하게 보였다. 오전 10시가 되려고 할 무렵 안도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고 기록됐다.

기록에서 ‘구초도’는 조선 전기 대마도에서 끊임없이 낚시를 요구하던 ‘고초도’와 땅이름이 거의 같으며 땅이름 이포의 ‘이’는 ‘뒤쪽’을 나타낸다. ‘기미’또는 ‘구미’는 바닷가라는 뜻이기 때문에 서도의 뒷개, 즉 이끼미를 말한다. 이곳은 한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발견된 곳으로 고대부터 중요한 향로였음을 알 수 있다.

● 조선 전기 고초도 개방

조선 전기 왜구들이 지금의 삼산면 지역이었던 고초도 주변에 자주 출몰한 것은 대마도의 자연환경이 척박해 농사짓기가 어려워 식량을 자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마도 사람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어업밖에 없었고, 고초도 부근에서 목숨을 걸고라도 낚시질을 하고자 한 것이다.

1440년부터 1441년 사이 조선 정부에서는 대마도 사람들의 고초도 낚시를 허가 하는 문제를 두고 많은 논쟁이 펼쳐졌다. 1441년 11월 조선 정부는 대마도 사람들의 고초도 어업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유는 고초도 지역이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조선의 군대가 완전하게 지키기 어렵고 계속 거부하면 대마도 사람들이 왜구로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미리 막기 위해서였다.

대마도에서 고초도 주변으로 낚시를 올 때는 대마도 도주가 인정하는 문서를 갖추고 거제도의 지세포에 들러 그곳을 지키던 만호의 확인을 거친 뒤, 돌아갈 때는 세금을 바치는 조건으로 고기잡이가 허용됐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거문도의 고도에 부두를 만들고 머무는 것을 이순신 장군이 물리쳤으며, 별장 1명과 노 젓기에 뛰어난 군인 460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 이대원 장군을 모신 사당인 충렬사(오른쪽)와 효자비(왼쪽). (사진=뉴스탑전남)

● 이대원 장군과 손죽도해전

임진왜란 전에도 삼산면 지역으로 왜구의 침입은 계속됐다. 이를 물리친 대표적인 사례가 이대원 장군의 손죽도해전이다. 이대원 장군이 순국한 지 110여 년 뒤,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쓴 비문에는 “1587년 일본의 왜적들이 우리나라 남쪽 변경을 침입해서 우리 백성들을 노략질하여 배에 태우고 연해에 돌아 다녔으나, 감히 이들을 막는 자가 없었다. 이대원 장군이 이때 녹도만호를 맡고 있었는데, 홀로 수하의 병졸을 인솔하고, 배를 정돈하여 왜적을 추격해서 적선 20여 척을 침몰시키니, 남은 적들은 도망가고 우리 군사들은 사망하거나 실종된 이가 없었다.”라고 기록됐다.

손죽도에 이대원 장군을 기리기 위한 사당인 충렬사는 1587년 손죽도 해전이 끝난 다음 마을 사람들에 의해 곧바로 세워졌을 가능성이 크지만 1923년 낡은 사당을 고친 내용이 기록된 중수기가 전해지고 있다. 1983년과 1987년 다시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손죽도 사람들은 손죽도 해전에서 순국한 이대원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묘를 써서 400여 년 동안 관리해 함께 전사한 수군들의 시체를 무구장터에 모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 국가 차원에서는 이대원 장군이 녹도만호였기 때문에 손죽도 해전이 끝난 1587년 지금의 고흥 녹동 바닷가에 ‘이대원 사당’을 세우고 국가 차원에서 매년 3월 3일 숭모제를 지내기 시작한 것은 1637년으로 알려져 있다.

▲ 1885년 4월 15일부터 2년간 영국의 동양함대가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한 사건. 고도에 정박중인 다링호. (사진=여수시)

● 거문도 사건

산업혁명에 뒤늦게 뛰어든 러시아는 식민지 확보를 위해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를 찾고자 남진 정책을 펼쳤다. 1885년 3월 30일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의 펜제 지역을 점령하자 영국 정부는 러시아의 극동 항구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하기 위해 거문도를 중간 기지로 판단했다.

영국 내각은 1885년 4월 11일 거문도를 미리 점거할 것을 의결하고 4월 14일 중국 주둔 함대 사령관 도웰 해군 중장에게 거문도를 점령하고 작전을 완료한 뒤, 즉각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부의 명령을 받은 도웰 제독은 아가멤논, 페가수스, 파이어 브랜드 호 3척의 군함을 거문도에 파견해 4월 15일부터 무인도였던 고도를 무단 점거하면서 관측소를 설치하고 이 섬을 ‘관측소섬’이라 불렀다.

계획에 따라 서도의 추넘애와 동도를 잇는 곳, 지금의 거문대교가 연결되는 쪽으로 나무 방책을 설치해 북쪽으로부터 오는 적을 막고, 덕촌 마을과 고도를 잇는 삼호교 부근에는 서쪽으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또 하나의 목책을 설치했다. 4각형 각목을 4개씩 묶어 연결해 바닷가에 2줄로 고정시켰다.

거문도를 무단 점거한 영국은 거문도와 즉각적인 통신 연락을 위해 해저 전선을 설치했다. 1885년 5월 11일 청나라가 해저 전선 설치를 허가에 따라 시작된 공사는 5월 28일경 상하이 새들섬에서 거문도를 잇는 데 성공했다.

영국군이 거문도에 주문한 23개월 동안 많을 때는 7~800여 명의 상주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고, 거문도 주민 395세대 2000명 가운데 300여 명이 기지 공사에 고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나라는 영국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고자 했다. 러시아는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무단 점거했으므로 러시아도 한반도의 어느 요충지를 점령할 것이라는 소문을 흘리면서 조선과 청나라를 압박했다.

따라서 1886년 9월 청나라의 이홍장은 러시아 공사 라디겐스키를 통해 러시아 정부와 교섭을 시작해 러시아가 조선 영토를 점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요구했다. 러시아의 약속에 따라 이홍장은 영국 정부에 대해 청나라가 조선 영토의 어느 곳이라도 다른 나라가 점령하는 것을 막을 것이므로, 거문도에서 철군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1887년 1월 거문도 주둔군에게 본국의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2월 27일 영국 함대는 정박지에서 철수하고 다음 날인 28일 23개월 동안 게양됐던 영국기가 내려졌다.

● 항일 의병 운동

영국군이 무단 점거했던 사건 이후 거문도로 들어온 일본인들은 1904년 러·일 전쟁 때 일본 해군이 해저 전선 및 무선 전신소를 설치하고 운영했다. 특히 1908년 10월부터 어업법이 시행되면서 일본인도 어업권을 인정받게 되자 일본에서 살면서 어업 시기에 맞춰 우리나라로 와서 고기잡이하던 통어 어업에서 수산업의 입지 조건이 좋은 지역으로 이사 와 정착해 어업하는 형태로 변함으로써 일본인들의 어업권 장악이 급격히 증가해 바닷가 지역 어민들의 반발은 클 수밖에 없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에 따르면 1908년 거문도에 살던 일본인이 약 30명이었다. 그 중 1909년 4월에는 의병에 의해 2명은 살해, 2명은 중태 2명은 도망친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1908년 9월부터 1909년 3월까지 의병에게 살해당한 일본인은 26명으로 불에 탄 일본인 집이 36호에 달할 정도로 거문도와 주변에서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의병 운동 시기 여수 출신 의병으로는 황준성·김성택·이병현 등으로 알려졌다. 삼산면 출신인 김성택과 이병현에 대한 기록은 1911년 1월의 광주지방 재판소 목포지부, 1911년 2월 25일 대구 공소원 형사부 재판 결과를 통해 거문도와 주변 지역에서의 의병 활동 내용을 알 수 있다.

▲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거문도에 구축한 해안진지동굴 (사진=여수시)

● 일제의 거문도 침탈

일제가 만주사변과 중·일 전쟁을 일으킨 1930년대부터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거문도는 일본의 전쟁 무기와 병력을 실어 나르기 위한 수송로의 안전 확보를 위해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1942년 3월 27일 거문도 동쪽 해안에 미군 잠수함이 나타나 중국·한국·일본을 오가며 육군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던 수송선을 공격했고, 1945년 4월 미국이 오키나와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육군 병력을 거문도로 계속 보냈다.

당시 거문도에 배치된 군인들은 주로 제150사단 지휘 아래 속한 군인들로서 『제15사단 진지 위치 요도』에 따르면 거문도 서도 음달산·엄나무·불탄봉, 동도, 고도 등에 군사 시설을 갖추었다. 『거문도 수비대 진지 배치 요도』에는 동도 마을 바닷가에 ‘해군 수상특공기지 동굴’을 만들었다. 1945년 4월부터 ‘제17방면군의 본토 결전 제2기 작전 준비상황 계획’에는 일본 해군이 ‘제주도 지구 및 여수·거문도·진해·통영 부근에 카이텐·코류 등의 수중 특공기지 건설과 더불어 육군 전력을 늘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 삶의 변화

1992년 12월 삼산면 고도의 거문리와 서도 덕촌리를 연결하는 연도교인 삼호교가 개통됐다. 폭 5m, 길이 250m로 다리를 건너 덕촌의 유리미 해수욕장과 거문도 등대를 비롯해 장촌의 이끼미 해수욕장과 녹산 등대까지 걸어갈 수 있다.

1992년 삼호교가 개통됨으로써 서도와 고도가 연결돼 거문도 주민들의 활동 폭이 넓어졌으나, 동도가 고립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따라서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2011년 거문대교 공사를 시작해 2015년 9월 18일 개통했다. 다리 길이 560m, 접속 도로 890m, 총길이 1.42km, 폭 11.7m, 높이 63.5m의 사장교이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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