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동은 숲이 우거져 있었기 때문에 수동이라고 부르다, 1946년 당시 동장이였던 김종욱 씨 건의로 "물이 맑다"라는 뜻의로 수정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 1권, 2권, 3권을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1944년 신항 일대. (사진=여수시문화원)
▲1944년 신항 일대. (사진=여수시문화원)

②한려동

한려동은 여수시의 동남부에 위치한 행정으로 중고산 동쪽 사면에서 해안으로 이어지는 저지대로 동쪽은 여수항 건너 오동도까지 포함된다. 조선 후기 여수면, 일제 강점기에는 동정에 포함되었던 지역이다.

1918년 지형도에는 종고산 남동쪽 평지에 경지가 발달해 동쪽 해안에 오동도가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오동도를 포함한 동부 해안 일대는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전라선의 종착역인 여수역이 있다.

동쪽으로 오동도와 경상남도 남해와 마주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종고산 넘어 충무동, 남쪽에는 동문동과 종화동, 북쪽에는 해발 고도 220m의 종고산과 덕충동이 위치하고 있다.

▲박함회장 조성 이전과 이후의 덕충지구 (사진=여수시)
▲박함회장 조성 이전과 이후의 덕충지구 (사진=여수시)

한려동은 한려해상국립공원 오동도와 남해안 관광의 중심지이자 여수신항과 국도17호선 대체 우회도로 등 육·해상 교통의 요충지로 2012 여수세계박람회 개최 지역으로서 무한한 성장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려동은 ‘공화동’과 ‘수정동’이 합쳐진 행정동이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 구역을 정할 때, 공화동에는 장동과 평동이 있었으나, 해방 뒤인 1946년 일본식 동 이름을 바꾸면서 장동은 공화동, 평동을 평화동으로 고쳤으며, 1953년 두 개의 동을 합하여 ‘공화동’을 만들었다.

수정동은 숲이 우거져 있었기 때문에 수동이라고 부르다 1946년 11월 당시 동장이었던 김종욱 씨의 건으로 “물이 맑다”는 뜻의 수정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97년 7월 25일 3려 통합과 관련하여 공화동과 수정동이 합쳐지면서 ‘오동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대중가요 노래 가사를 연상케 하는 ‘오동동’이 주민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여론이 높자 한려수도의 기점이며 한려해상국립공원 내에 포함된 오동도를 활용해 관광 여수의 이미지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1998년 2월 1일 ‘한려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수고등학교. (사진=여수시)

한려동에는 ‘장대’와 관련된 옛 땅이름이 있다. 『여수잡영』의 ‘연무각’과 ‘장대 숲’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연무각'은 공화동 지금의 여수고등학교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있었으며, 장대가 있었고, 무과 시험장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연무각은 전라좌수영성의 동쪽에 있던 3칸의 장대 로, ‘망해각’ 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으며, 좌수영성 동쪽 3리에 있었다. 현재 위치는 여수고등학교 북동쪽 모서리인 여수시 수정동 2번지이다. 옛날에는 신항을 '장대너머'로 불렀다.

장대 숲은 수림 이나 솔밭거리 또는 수동이라고 했다. 현재 공화동 일대로 일제 강점기에는 이곳에서 농민 대회가 열리기도 했던 곳이다.

『발전사』에 따르면 남철은 철도 부설뿐만 아니라 여수의 발전 가능성을 믿고, 도시 계획을 핑계로 30만 평의 땅을 평당 1월 50전에서 3원까지 헐값에 사들인 뒤, 주택지를 만들어 땅장사를 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린 정재완·김홍식소·이상호 와 같은 여수 농민회원들이 동정의 솔밭거리 와 덕충동 충민사 등에서 농민대회를 열어 남철의 검은 속셈을 폭로 했다.

농민들로 하여금 땅을 헐값에 팔지 못하도록 하는 불매 운동을 전개하여 남철의 땅 장사 계획을 무산시켰다.

▲발전사에 따르면 남철은 철도 부설뿐만 아니라 여수의 발전 가능성을 믿고, 땅장사를 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사진=여수시문화원)
▲발전사에 따르면 남철은 철도 부설뿐만 아니라 여수의 발전 가능성을 믿고, 땅장사를 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사진=여수시문화원)

1929년 7월까지 남철은 30만 평에 달하는 시가지 건설용지 가운데 약 4분의 3을 매수한 상태였다. ‘알선위원회’의 회유와 협박에 시달리던 대다수 농민들은 군수의 개인 간 토지 매매 금지 선언과 알선위원장과 회사 회계원의 가격부등증서 즉 가격이 오르면 더 주겠다는 증명을 믿고 토지를 싼 값에 팔았다. 여기에는 토지를 팔지 않으면 당국에서 수용령을 발포하여 강제 수용할 것이라는 위협이 효과를 발휘했다.

1929년 여름, 땅 팔기를 거부하는 지주들의 토지에 대해 남철이 비밀리에 가격을 인상 하여 사들였을 뿐만 아니라, 개인 간 사고파는 것을 금지한다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투기 업자들이 몰래 높은 가격으로 수천 평을 사들인 사실이 드러났다.

이 문제는 장기간 지속되어 이듬해인 1930년 4월에는 배상금을 요구하는 농민들이 천리길을 걸어 서울까지 가서 중독부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여수군 전라남도 충독부에 대한 문민하의 진정은 끈질기게 계속되었으나, 1932년 겨울이 되도록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못했다.

남철은 도청에 수용령을 신청하여 토지 매수를 추진했지만, 목표량에 미치지 못하는 24 만여 평을 사들이고 중지했다. 남철이 토지를 사들이는 일이 여의치 않다는 이유로 여수시가지 발전에 대한 책임을 포기함으로써 결국 여수읍에서 남철로부터 2만3800여 평의 토지를 넘겨 받아 시구개정 등 공사 책임을 떠안았다.

이처럼 남철이 허가받은 공사 구역 가운데 일부를 여수면에 넘김으로써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남철의 광여선 개통을 눈앞에 둔 1930년 11월, 여수면협의회는 여수면이 193,500원의 빚을 내 신시가 건설 및 신·구 시가지 연결도로의 부지를 사들여 공사에 착수하겠다는 계획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남철이 추진하던 사업 가운데 시가지 조성의 일부를 여수면이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철도 및 항만 구축과 시구개정이 각각 남철과 여수에 의해 두 갈래로 추진되었다.

한편 1931년도에 여수읍이 실시한 시구개정은 주택지와 간선도로 등의 조성과 신·구 시가지 연결도로 공사, 두 가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부지 매수 가격과 건물 보상비 문제 등에 불만을 품은 지주들의 반대, 토지 수용으로 생계가 막막해진 주민과 영세상인의 생계 대책 문제, 거주지로부터 밀려나게 된 아주 가난한 사람 구제 문제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1930년 12월 25일, 여수와 광주를 잇는 전라선 개통과 더물어 일본의 시모노세키와여수를 오가는 2,500톤 크기의 정기 여객선 고아마루호가 취항하게 되었다. 일본 가와사키 기 선주식회사에 의해 개척된 이 항로에는 고아마루 호와 2000톤급의 도모히로마루 호배가 매일 교대로 다녔다.

그때까지도 한 달에 몇 번씩 부정기 화물선이 오가며 문물의 교역에 있기는 하였으나, 시간을 제대로 맞추기가 어려웠는데, 이날부터 정기 여객선이 매일 취항함으로써 여수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일본 가와사키 기 선주식회사에 의해 개척된 이 항로. (사진=여수시문화원)
▲일본 가와사키 기 선주식회사에 의해 개척된 이 항로. (사진=여수시문화원)

나중에 두 여객선 가운데 한 척은 미군의 어뢰에 맞아 침몰하고, 또 한척은 징발되자. 게이후쿠마루해 호로 바뀌었는데, 오후 3시 여수항을 출항하면 다음 날 오전 5시 시모노세키에 닿았으며, 운임은 3등 칸에 한 사람당 3원 55전씩이었다. 이때 승객은 수시로 오가는 일부 일본인들을 제외하고, 한국인이 대부분이였다.

개항 이후 여수는 나날이 발전하여 시가지가 좁아지면서 그때마다 공유 수면을 메워 시가지를 넓혀 왔지만, 시내의 도로는 손질 하지 못했다. 남철은 전라선 개통과 더불어 여수의 30만 평의 땅을 사 새로운 도시 계획을 수용하고자, 여수면에서도 이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여수농민회의 적극적인 반대 운동으로 이일이 좌절되었다.

도로 개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급하게 필요한 땅이 45,000평이었으나, 당시 빈약한 읍의 재정 형편으로서는 이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30년부터 도로 개설 3개년 계획을 세우고 해마다 조금씩 땅을 사모아 길을 내기 시작한 것이 중앙동 일부를 제외한 현재 여수 시내도로망의 대부분인데, 그때 제일 먼저 만든 도로가 1931년 중앙동 로터리에서 신항 오동도 입구까지에 이르는 길로 이른바 ‘대 판통’이다.

이 길은 역과 신항으로의 진입로뿐만 아니라 동정과 서정을 잇는 동맥으로 여수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 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옛 서울신탁은행 자리에 경찰서가 있었고, 읍사무소는 군자동에 있었다. 지금의 등기소와 동문동우체국, 우리은행, 동문동 사무소 일대가 대판통에 포함됨으로써 주변에 있던 노점 시장이 우체국 뒤로 옮겨져 동시장이라 불렀고, 경찰서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저지대인 중앙동, 교동, 충무동, 서교동, 남산동 일대는 연차적으로 바다를 메워 시가지을 넓혀 왔다. 중앙동 로터리에서 옛 삼양사를 돌아 종포를 잇는 신구항 연결 도로는 일본인 혼다 야스고로, 가와치 츠네키치, 와타나베 요사부로 등이 1920년과 1925년 그리고 1928년 세 차례에 걸쳐 메워 만든 도로이다.

▲지금의 여수동초등학교. (사진=여수시)

지금의 여수동초등학교는 1911년 3월 16일 여수공립심상소학교로 인가받아 그해 7월 15일 개교하였다. 처음에는 진남관 한 모퉁이를 학교 건물로 사용했다. 지금의 서초등학교인 여수공립보통학교가 한국인만 다니는 학교인데 반해 이 학교는 순전히 일본인만의 학교였다. 학교가 개교할 때, 여수에 사는 일본인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학생 수는 18명이었고 교사도 도쿠다 덴사부로 한 사람이 교장까지 함께 맡았다.

칠판과 교단도 없는 교실에서 창가 시간이 되면 손바닥으로 기둥을 두드리고 발로 박자를 맞춰 가면서 수업을 했다. 의병 때문에 여수에 와 있던 해상 경비소가 목포로 철수하게 되자 그들의 자녀 10명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바람에 전교생 9명이 된 적도 있었다.

그 뒤 일본인 수가 점차 증가하여 1916년 4월, 지금의 동문동우체국 자리로 학교 건물을 새로 지어 이전하였다가 1935년 일본인의 수가 2732명으로 늘어나 학교가 비좁아지자 두 번째로 이전한 곳이 지금의 공화동 동초등학교이다.

‘오동도 방파제’

오동도는 조그마한 무인도였으나, 1935년 4월부터 일본에 의해 쌓아진 방파제에 의해 육지와 연결됐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신항에 큰 배들이 드나를 수 있으면서 인사에 육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오동도까지 753m의 방파제를 쌓은 것이다.

1935년 4월, 조선총독부 여수 토목 출장소에 의해 발주된 이 공사는 입구에서 오동도까지 '부르스토랑'이라는 갯벌 파는 배로 바다 밑을 15m까지 파낸 다음 그곳에 15m의 시멘트 블록을 쌓고, 그 속에 굵은 바위를 집어넣어 쌓아 올리는 방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여수여자중학교. (사진=여수시)

흙은 여수여자중학교 뒷산으로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라는 뜻의 와우산에서 오동도 현장까지 수십 가닥의 레일을 깔고 50여 대의 흙 수레들이 쉴 새 없이 구르면서 흙을 나르는 광경 또한 볼만하였다고 한다. 또 이 공사를 치르기 위해 여기저기에 많은 공사장이 생겼다.

각 공사장마다 전국에서 몰려든 노동자들이 하루 1000여 명씩 일했으며 어려운 기술 공사는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온 사람들과 중국인 꾸리들이 맡았다. 이들은 주로 돌을 캐거나 블록에 돌을 채우는 기술 작업을 맡았고, 임금이 쌌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 철도 부설 공사를 비롯해 터널을 뚫는 공사장에는 언제나 이 꾸리들이 많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오동도 입구 채석장. (사진=여수시문화원)

1935년 4월에 시작해 모든 힘을 기울여 공사를 서둘렀지만, 군사 시설로 일반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으며,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많은 사람이 징병·징용·근로 보국대 등에 동원됨으로써 1944년까지 공사가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 방파제가 완성된 뒤, 오동도가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다.

'한려수도'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강제로 빼앗은 지 25년째가 되는 1934년 10월, 일본의 오사카매일신문사에서는 이른바 저들의 조선 통치 25주년을 스스로 축하하기 위한 기념행사의 하나로, 조선 내에서 가장 경치가 좋고 아름다운 곳인 '조선 8경'을 투표를 통해 선정하기로 하였다.

일본인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여기에 응모하여 3140만 표가 모이자 경성중앙우체국에서 이마이 정무통감이 참석한 가운데 개표한 결과, 1위부터 8위까지는 ‘조선 8경’ 9위부터 16위까지를 ‘조선 8승’으로 결정하였다.

이때 여수와 한산도 간의 해상 항로가 약 225만 표를 얻어 조선 8경의 말미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의 문인이었던 산인 정문식과 학루 최석주는 『발전사』 시를 읊어 일본인들의 행위를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여수요새사령부'

197년 중·일 전쟁이 점차 확대되면서 대륙 침략을 위한 물자 수송의 중요성이 커지자 일제는 한반도 서남 해안 항로 곳곳에 임시 요새를 설치하는 계획을 마련하는 한편 필요한 병기 확보에 나섰다. 여수 임시요새는 서쪽 항로의 안전을 확보함과 동시에 여수항을 미리 지키고 막기 위한 것이었다. 또 태평양 전쟁 말기 여수항은 대륙으로부터 제주도로 이동하는 병력과 군수 물자 수송의 중심지였다.

요새사령부·여수중포병연대 병원이 포함된 여수 요새부대의 편성 명령이 내려진 것은 ‘관동군 특별 대연습’ 이 발동된 1941년 7월 7일이었으며, 곧바로 진해만요새사령부 에서 부대의 편성이 이루어졌다.

▲여수요새고사포대. (사진=여수시문화원)

1941년 9월 17일, 조선군사령부가 일본 육군 차관에게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여수요새의 편성 병력은 장교 27명, 하사관·병 562명으로 모두 589명과 말 7마리였다. 이들은 여수 요새의 축성 공사가 끝날 때까지 마산에서 대기하면서 교육 훈련을 실시하거나, 진해만요새의 방비 활동을 지원하였다.

1942년 4월 28일, 마산에 대기하고 있던 요새사령부 및 요새중포병연대 병력이 여수에 도착해 각 근무지에 배치되고 방비에 착수했다. 요새사령부, 요새중포병연대, 요새방공대 그리고 육군병원으로 이루어진 여수요새부대는 지금의 여수중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발전사』에 따르면, “지금의 여수중학교 자리에 목조 건물로 막사를 짓고 여수요새사령부를 설치했으며, 기마대도 같이 있었다고 기술 되어 있다.

'귀국 동포 구호 사업'

해방되자 일본을 비롯해 만주나 해외에서 많은 귀환 동포들이 쏟아져 들어와 건국준비위원회의 김관평과 백해천 등이 구항 부두에 귀환 동포 임시 접수소를 마련하고 이들을 맞아 들였다. 귀환 동포들은 일제 강점기 철도 정거장에서 물자 운송 및 하역 작업을 전문으로 하였던 운송 회사 노동자들이 숙식을 하도록 임시로 지은 건물이다.

옛 수정동 연탄공장 터와 자산공원 밑에 있던 일본군 막사를 비롯해 충무공 비각 밑에 있었던 해월루 등에 수용되었다. 그리고 신월리 일본 군부대에서 식량과 모포 등을 가져와 이들을 구호했기 때문에 지금도 수정동의 그 자리는 ‘귀환정’이라는 땅이름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오동도. (사진=여수시)
▲우리나라 최초의 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오동도. (사진=여수시)

'오동도'

전남 여수시에서 경남 통영시 한산도 사이의 한려수도 수역과 남해도·거제도 등 남부 해안 일부를 합쳐 지정한 우리나라 최초의 해상 국립공원으로 1968년 12월 31일 지정됐다.

오동도는 한려해상국립공원 가운데 여수시 지구에 포함되어 있는데, 해식애와 파식대, 해식동과 씨 아치 등 해안 침식 지형을 공부하기 좋은 곳이며, 동백나무와 신이대를 비롯해 참식나무·후박나무·팽나무 등 많은 희귀 수목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오동도는 땅이름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오동도에는 봉황의 먹이로 알려진 오동열매가 열리는 오동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여수 지역에서 살던 봉황들이 자주 찾았다. 봉황은 임금을 상징하는 새인데, 봉황이 오동도에 드나든다고 하는 것은 여수에서 새로운 임금이 나온다는 의미였다. 또 오동도는 전라도에 있고, 전라도의 ‘전全’ 자에는 ‘임금 왕王’이 들어 있으니 더욱 가능성은 커졌다.

혼돈의 시기였던 고려 말, 공민왕의 신임을 받았던 신돈은 전라도에서 새로운 임금이 나오는 것이 두려워 ‘사람 인人’ 아래 ‘임금 왕王’이 합쳐진 전全 자를 ‘들 입入’으로 바꾸고 봉황의 먹이를 제공하는 오동나무를 모두 베어 버렸다고 한다.

오동나무가 사라진 오동도에는 동백·후박·신이대 등의 나무들이 자리를 잡아 섬 전체가 커다란 숲을 이루고 있다. 특히, 동백나무가 많은 오동도를 ‘동백섬’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에도 서글픈 전설이 전해진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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