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포는 여수에서 새벽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바닷가에서 위치하여 우리말로 ‘새벽개’였다. 여수말인‘새복개’로 불리다가 ‘쇠북개’로 변해 한자인 ‘쇠북 종’을 써서 ‘종포’가 된 것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종고산에서 바라본 여수시가지. (사진=여수시)
▲종고산에서 바라본 여수시가지. (사진=여수시)

① 동문동

동문동은 '흙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문동과 종고산 동남쪽의 동산동, 자산 서남쪽 바닷가를 끼고 들어선 종화동 3개의 법정동이 합쳐진 행정동이다. 동쪽은 한려동과 덕충동, 남쪽은 중앙동과 돌산, 서쪽은 충무동을 마주하고 있다.

남쪽 바닷가 해양공원에는 휴식 공간과 공연장 등이 마련되어 시민들과 관광객이 찾고 있다. 이곳에서 오동도까지 이어지는 정상에는 자산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2012년에 개최한 여수세계박람회를 기점으로 건설된 거북선 대교로 종화동과 돌산 우두리가 연결됐다. 또 해상 케이블카는 돌산공원과 자산공원을 이어 여수의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다.

관문동의 여수교육지원청이 있는 산을 ‘흙산’이라고 부른다. 1928년 여수와 광주를 잇는 철도 공사와 신항 건설을 위해 신항에서 마래터널 앞까지의 공유수면을 메우는 공사가 진행되었을 때 여기에 필요한 엄청난 흙과 돌을 이 산에서 토사 채취하여 사용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동문동을 중심으로 본 위성사진.(출처=여수시문화원)
▲동문동을 중심으로 본 위성사진.(출처=여수시문화원)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위 지역을 합해 ‘동정’이라 했다. 1946년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땅 이름을 바꿔 좌수영 동문 밖을 ‘동문동’, 관청이 있었던 아동을 ‘관동’ 종포 지역을 종남동, 종고산 아랫마을을 동산동으로 나뉘었다.

이후 1953년 행정구역을 다시 정리할 때 관동과 동문동을 합하여 관문동으로 고쳤다. 이전에 종남동은 종화동, 동산동은 그대로 땅 이름을 지키고 있었으나, 1998년 3여 통합시 행정동인 동문동이 되었다.

종포는 여수에서 새벽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바닷가에서 위치하여 우리말로 ‘새벽개’였다. 여수말인‘새복개’로 불리다가 ‘쇠북개’로 변해 한자인 ‘쇠북 종’을 써서 ‘종포’가 된 것이다.

관문·동산·종화동의 인구는 일반적으로 평지가 많았고 행정기관이 밀집한 관문동. 평지가 많은 동문동. 어업활동이 활발한 종화동. 경사가 급한 지역의 동산동은 인구수는 적은 편에 속했다.

현재 종화동은 2001년부터 여수지방해양수산청에서 여수 구항 바닷가에 해양공원을 만든 뒤 ‘여수밤바다’ 관광객이 크게 늘어 주변이 상업 지구로 변해 상주인구가 크게 줄었다.

▲혼다 정미소.(출처=여수시문화원)
▲혼다 정미소.(출처=여수시문화원)

동문동에는 전라좌수영성의 동문 '총인문'이 있었다. 1479년 국동에 있던 내례만호를 없애고, 새로이 수군절도 영을 설치함으로써 수군절도사를 두면서 1485년 초가집대신 성보를 쌓기 시작하여 1491년 완성되었다. 동쪽 성문을 '총인문'이라 하여 100년이 지난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에도 관련 내용이 있다.

총인문은 전라좌수영의 동문루로, 2층 세칸인데, 1774년 절도사 김등이 철문으로 다시 지었다. 총인문의 현재 위치는 관문동의 관문서1길과 5길, 6길이 만나는 옛 여수극장 골목 입구이다.

'종명재'는 종고산 아래에 있던 서당으로 전라좌수사 최완이 1720년에 세워졌는데, 『여수잡영』에도 종명재 라는 시로 표현되어 있다.

옛날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훈장은 요즈음 선생님과 달리 자격증이 없었고 그 대신 주어진 것은 회초리로 여기서 나온 것은 교편이다. 서당은 좌수영성 안에 통인방서재로 불린 방해재, 성 동쪽 종고산 아래에 동서재인 종명재, 그래고 서편에는 서서재인 봉명재가 있었다. 

▲1926년 여수군 관내도 중 동문동 지역.(출처=여수시문화원)
▲1926년 여수군 관내도 중 동문동 지역.(출처=여수시문화원)

'동산동 벅수'

중앙여자고등학교 쪽에서 오동도를 바라보며 경사가 급한 길을 내려오다 보면 새로 난 소방 도로 동산9길을 만나게 된다. 이 길은 동초등학교 뒷담을 따라 이어지는데 중간쯤에 조선시대 돌로 만든 동산동 벅수가 있다.

여수의 벅수 가운데 동산동 벅수는 풍수지리의 비보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즉 음양설에서 남쪽은 양을, 북쪽을 음을 의미한다. 남쪽에서 남정중이라 새긴 돌 벅수를 세움으로써 남쪽의 약한 기운과 화재를 진압하고자 했다.

남쪽에 있는 벅수 할아버지는 같은 모습으로 관모를 쓰고 도포를 입고 오른손을 밑에 왼손을 위로하여 두 손을 공손히 마주 잡고 있어 매우 단정하게 보인다. 전체 길이 134cm 머리 높이 38cm 둘레 101cm 크기에 이 벅수는 배 부분에 ‘남정중’이라고 새겨져 있고 얼굴과 몸채 사이에 수염을 돋게 표현했다.

북쪽 벅수에는 수군의 투구모양인 벙거지를 머리에 쓰고 있는 105cm의 높이이다. 벙거지를 쓴 벅수가 고개를 약간 숙여 시름에 잠긴 듯 두 눈을 내리뜨고 굳게 다문 입을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단정하고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두 손은 공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화정려’라는 글이 있었지만, 도로를 포장하면서 벅수를 보호하고자 돌러 테를 두르면서 ‘려’자를 땅에 묻어 버렸다.

구 청년회관 출처 문화재청
▲구 청년회관은 관문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지역 청년운동의 본거지로 2022년 등록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됐다. (사진=문화재청)

'청년회관'

여수시 관문동에 있는 구 청년회관은 일제 강점기 서울에서 유학하던 여수 출신 학생들은 ‘여수 향우회’를 만들어 서로의 결속의지를 다지며 일본 제국주의 지배에 항거한 3·1운동 및 학생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퇴학당하거나 경찰에 쫓기게 되었다. 경찰에 눈에 피해 여수 지역에 숨어 있던 김백평, 이상호 등의 청년등은 ‘맞돕회’ 라는 모임을 조직하였다.

1921년 서로 돕자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시달리는 민중들을 위해 생활개선 운동에 앞장섰다. 노비 문서 소각 등 계급 타파를 주장했으며 사회제도 개혁에 힘쓰는 한편, 문맹 퇴치를 위한 교육 운동 야학에 중점을 뒀다.

이곳은 4~500평의 넓이의 저수지로 종고산에서 좌수영성을 타고 흘러내려 오는 물을 저장하던 곳이었다. 따라서 청년 회원들은 손수 지게를 지고 수레를 끌어 저수지를 메워 터를 다졌다.

맞돕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청년들은 가게를 운영했다. 여기에서 생긴 이익금과 일반인의 성금, 부모에게 받은 땅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세운 이 건물을 '청년회관'이라 이름을 지었다.

남한에서 유일하게 민간인의 손으로 세워진 청년회관은 일제 강점기 항일 구국운동의 근거지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지가 인정됐다. ‘청년회관’은 서양식 벽체 위에 동양식 지붕을 얹은 당시 유행하던 양식과는 달리 1층은 근대적 철근 콘크리트, 2층은 전통 나무 구조인 점에서 건축적 가지도 높게 평가됐다. 2022년 등록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됐다.

▲ 여수 자산공원과 돌산을 잇는 해상케이블카. (사진=심선오 사진기자)
▲ 여수 자산공원과 돌산을 잇는 해상케이블카. (사진=심선오 사진기자)

'자산공원'

현재 자산공원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만들어진 여수시의 최초 자연공원이다.새해 아침 해돋이가 유명한 공원에서는 여수 시내 모습과 종고·구봉산 등 주요 산을 비롯해 장군도.돌산대교.돌산도.오동도뿐만 아니라 경상남도 남해와 하동까지도 한눈에 볼 수 있다. 1960년대까지 여수에는 시민들이 휴식과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여수시는 자산에 도시공원을 만들고자 땅 1만평을 사들여 팔각정을 지었다.

1967년 4월 28일, 이충무공의 탄생일을 맞아 여수시 주최로 제1회 진남제를 개최해 마지막 날인 29일 충무공동승건립위원회에서 만든 이충무공 동상을 자산공원 정상에 세웠다. 이후 크고 작은 시설이 세워져 올림픽 기념탑충혼탑 등의 시설이 들어섰다.

자산공원 정상에는 2007년 7월 25일 준공된 '여수해상교통관제센터'가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연건평 1195m인 거북선 모양의 건물이 새롭게 세워졌다.

하루 평균 50여 척이 드나드는 여수ㆍ광양항에 대형 선박 및 위험물 운반 선박 등에보다 나은 선박 관제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만들어졌다.

‘여수해상교통관제센터’는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거북선을 본 따 여수의 역사적 상징성을 나타내고 있다. 옥외 전망대에서는 여수항과 광양항을 오가는 초대형 배인 30만 급 원유선 등 선박들이 항해하는 모습과 해돋이와 해넘이, 한려해상국립공원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어 여수항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종화동 하멜전시관은 총 32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 돼 2012년 10월 4일 개관했다.(사진=여수시)
▲종화동 하멜전시관은 총 32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 돼 2012년 10월 4일 개관했다.(사진=여수시)

'종화동 하멜전시관'

2005년 11월 해양공원 하멜전시관은 여수지방해양수산청이 여수 구항 1단계 정비공사로 조성한 공원으로 종화동의 포구 자리인 물양장에서 하멜등대가 있는 여수 구항 방파제까지 항만의 기능을 높임과 동시에 경관을 개선하여 미래 지향적인 항구 도시로 거듭나고자 만들었다.

여수 하멜전시관은 ‘하멜표류기’를 써서 조선을 서양 세계에 처음 알린 네덜란드 사람 렌드릭 하멜Bonothoth ftomel과 그 일행이 조선에서 겪은 흔적을 모아 놓은 곳이다.

하일 등대와 함께 세워져 있다. 여수시와 네덜란드의 우호의 장소이자 역사적인 장소로 2012년 10월 4일 개관하였다. 부지 면적 2,202m' 위에 2층 건물로 지어져 있다. 건축 연면적 660.37m로 전체 5전시실로 구성돼있다. 전시관 내에는 네덜란드에서 기증한 ‘하멜보고서’가 전시되어있다.

▲하멜동상. (사진=여수시)

전시관 앞에는 하멜 동상과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풍차가 설치되어 있다. 하멜 동상의 크기는 높이 1.2m 무게 140kg 정도이다. 왼쪽 팔에는 하멜표류기를 들고 있고, 오른손은 들어 올려 손가락으로 먼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여수 구항 방파제 하멜등대는 2005년 1월 31일일 처음 불을 밝혔다. 현재 빨간색의 몸체와 불빛을 이용해 여수 구항을 입.출항 하는 선박의 안전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하멜표류기’를 통해 조선을 서양에 알린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을 기리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하멜 동상이 2007년 10월 5일 종화동 해양공원에서 제막식을 가졌다. 이 행사에는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르큼시 비터 아이젤스 시장과 J. 오스트롬 시의원 등이 함께 참석했다.

하멜동상은 네덜란드 호르큼시가 유명 조각가를 통해 직접 제작했다. 무게는 140kg, 높이 1.2m 크기이다. 이 동상이 하멜임을 알리는 이름 판과 표지석은 전남대 최석 교수의 자문을 거쳐 영어와 한글 두 가지로 제작됐다. 그 이름은 '하멜과 여수'이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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