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 마을은 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 잡아 죽림에서 양지로 넘어오는 길을 ‘동녘길’, 마을 앞길을 ‘진터거리'’, 중산 일대를 ‘빗골’이라 불렀다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가 자리 잡은 곳은 키가 작은 신이대가 많아 신대밭골이라 불렀다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위성지도로 본 미평동 (사진=네이버)
▲위성지도로 본 미평동 (사진=네이버)

⑫미평동

미평동 남북으로 국도 17호선인 좌수영로가 지나고 있다. 둔덕동 호랑산에서 발원한 연등천이 가운데로 흐르며 호랑산과 고락산 사이에 미평동이 형성됐다.

미평동은 동쪽의 호암산, 서쪽 수문산, 남쪽 고락산, 북쪽 호랑산이 둘러싸여 비교적 넓은 들을 지녀 1789년 기준 호구총수에는 수영 동면에 속한 ‘대미평’으로 기록됐다. 앞에 흐르는 연등천을 활용해 벼농사가 활발했다.

미평동은 양지·소정·평지·신죽 죽림의 5개 자연 마을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1993년부터 1994년에 걸쳐 이루어진 ‘미평지구 택지 개발 사업’으로 29만9490㎥의 택지가 조성되면서 지형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자연 마을과 선경·주공·한화·귀인아파트 등 공존하는 도농 복합 지역으로 주민의 약 85%가 공동 및 다세대 주택에 거주한다.

미평동에는 양지·평지·신죽·죽림·소정마을이 있었다. 양지 마을은 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 잡아 붙여진 이름이다. 죽림에서 양지로 넘어오는 길을 ‘동녘길’, 마을 앞길을 ‘진터거리', 중산 일대를 ‘빗골’이라 불렀다.

신죽 마을은 ‘신대밭골’ 또는 ‘순대밭골’이라 부르기도 했다.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가 자리 잡은 곳이며 키가 작은 신이대가 많아 이런 이름을 가졌다. 죽림은 미평과 만흥동을 잇는 고개 앞에 있었던 마을이다.

‘대밭골’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죽전 또는 죽림이 되었다. 마을 북쪽 복성골에는 몇 채의 집이 있었지만 1920년대 여수 시가지에 물을 공급하는 수원지를 만들면서 죽림과 평지마을 쪽으로 이주를 했다.

평지는 미평동 가운데 위치했다. 평평한 곳에 마을이 자리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일대를 ‘번데기’, ‘버든들’이라 한 것은 평평한 들이 길게 뻗어 있어 불린 이름이다.

소정은 지금의 미평 삼거리 부근에 있던 마을로 미평동에서는 가장 늦게 만들어졌다. 작은 정자가 있어 이렇게 불렸다고 전해 온다. 이는 술집들이 있는 주막거리에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붙인 것으로 보인다.

미평동은 문수동의 소미 마을에서 본 것처럼 산 밑에 있는 들판이라는 ‘미뜰’을 한자로 바꾸면서 변한 땅이름이다. 미평米坪은 지금의 미평美坪으로 굳이 우리말을 붙이자면 ‘쌀들’이 된다. 호랑산 밑에 있는 들이라 해서 밑들이 미평으로 변했다는 유래가 있다. 쌀이 많이 생산돼 쌀을 처리하는 물레방아가 있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75년 미평동은 277세대에 불가했지만 편리한 교통 조건을 갖춘 미평동의 인구는 가장 많이 증가한 때는 1995년으로 무려 약 1만3000여 명이 늘었다. 이는 1992년 990세대 규모의 주공아파트와 1994년과 1995년 1700세대 이상을 수용하는 선경아파트 1~3단지가 형성돼 인구증가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미평 고인돌 공원의 고인돌 (사진=여수시)
▲미평 고인돌 공원의 고인돌 (사진=여수시)

● 청동기 시대

미평동에는 지금도 평지마을을 중심으로 많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어 이 지역에는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지와 죽림 마을에서 발굴된 고인 돌로 당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양지 유적은 봉화산·호랑산·고락산·호암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비교적 넓은 평지를 이루고 있다. 이곳이 택지 개발 지구로 지정됨에 따라 고인들이 훼손되어 1993년 12월 30일부터 1994년 2월 2일까지 발굴, 조사했다.

발굴된 고인돌은 모두 5기로 덮개돌의 긴 축은 등고선 방향과 나란히 배치됐다. 평면형태는 삼각형과 오각형 각 1기, 긴 네모꽃 3기고, 큰 것은 304X193X75cm, 가장 작은 것은 134X121X34cm였다. 무게는 0.9t부터 7t까지 다양했다.

2호와 4호 고인돌을 제외한 나머지 고인돌은 모두 원래 위치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는 고인돌이 있던 곳의 경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90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의 지표 조사 결과 3개 떼 25기가 보고 된 적이 있다. 그러나 1995년 미평동·만흥동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하여 8기가 파손됐다.

나머지 8기도 훼손될 위기에 처한 것을 1996년 9월 4일부터 11월 2일까지 60일간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뒤 미평공원에 복원했다. 지금도 평지마을에는 많은 고인돌이 남아있다.

▲미평동 출토된 수습 토기. (사진=여수시)
▲미평동 출토된 수습 토기. (사진=여수시)

● 고대 사회

최근 들어 고고학적 성과물을 통해 가야와 여수 지역과의 상관성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순천대학교 박물관지』창간호에는 미평동에서 출토된 토기에 대한 논문이 실려 고고학적 분석을 통해 여수 지역과 가야와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는 미평동에서 수습한 토기를 보관하고 있다가 앞으로 세워질 여수시립박물관에 기증되었는데 짧은 목 항아리 2점, 긴 목 항아리 2점, 굽다리 짧은 목 항아리 1점, 굽과 손잡이가 있는 항아리 1점으로 모두 6점이다

미평동에서 출토된 토기 가운데 짧은 목 항아리의 경우,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예가 많지만, 긴 목 항아리나 굽과 손잡이가 있는 항아리의 경우는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에서 출토된 예가 많아 여수반도에서 백제와 대가야의 교류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미평동에서 출토된 토기들 가운데 그릇의 형태상으로는 가야계 토기에 해당하는 것들이 있지만, 제작 기법이나 백제 지역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는 토기와 함께 껴묻거리로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토기들은 여수에서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미평동 봉화산은 여수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산림욕 관련 시민 휴식공간이 되었다.
▲미평동 봉화산은 여수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산림욕 관련 시민 휴식공간이 되었다.

● 조선 시대

미평동 봉화산이 있다. 봉수는 위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 수단으로 여수는 왜구들의 침략을 맨 처음 알리는 봉수의 기점이다. 봉수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신호를 보낸다. 지정된 봉우리마다 봉수꾼들이 있어서 이 봉우리에서 불이나 연기를 피우면 바로 저 봉우리에서 받는다. 『여수잡영』에는 『우산봉수』에 관한 시가 있다. 

"불똥은 순식간에 천지로 퍼져갔고

봉우리 정상에선 못별처럼 번뜩였지 

다만 지금 이리 떼들 밤잠을 들었는지

오로지 산꼭대기 흰 구름만 넘다드네 

우산봉수는 서북쪽 25리에 있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봉화산을 당시에는 우산으로 불렀을 것 으로 추정한다.

돌산의 방답진에서 불이 오르면 화양면 백야곶이 받고 고흥 팔영산이 즉시 응했다. 그 길로 봉수는 순식간에 서울 목멱산에 닿았기 때문에 그야말로 나는 불 그대로였다. 여기저기 ‘사잇봉수’에서도 봉우리마다 불빛이 번뜩했다. 우산봉수도 그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봉화산은 해발 422m로 그다지 높지 않다. 정상에 조선 시대 봉수대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1928년부터 1930년 사이에 미평 제1수원지를 만들면서 주변 산을 상수도 보호구역으로 묶어 출입을 제한하여 지금의 아름다운 숲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미평동 봉화산 산림욕장‘은 1991년 주암댐이 만들어지면서 주암호 물이 여수 지역의 상수 도원이 됨으로써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제1수원지가 포함된 33ha를 산림욕장으로 바꿔 여수시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산림욕 관련 시민 휴식공간이 됐다.

●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미평과 지금의 둔덕동이 된 왕십리 청년들은 모임을 만들어 같이 활동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교육 운동이었다. 『여수동사』에는 미평 죽림 마을에 서당이었던 죽림서재가 있다고 기록한다.

한문 교육 중심의 서당을 정규 학교를 대신해 신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키우고자 하는 개량서당으로 바꾸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1935년 11월 미평의 조재섭과 이백윤이 신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설날 풍물패가 매구를 치며, 걸립을 통해 개량서당을 만들 때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기금이 충분히 모이지 않았다. 마을 어귀에 있던 서정 박태원의 땅 3마지기를 빌려 마을 뒷산에서 소나무를 베어 진흙으로 벽을 발라 집을 짓고, 30여 명의 아이들을 모아 1936년 4월에 문을 연 것이 ‘미평개량서당’이다.

이 학교가 주변에 알려지자 미평·오림·여서·문수·만흥·오천·삼일면 신덕 등 여러 마을에서 나이가 많아 보통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학생 150여 명이 몰려들어 서당을 키우면서도 2부제 수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36년 미평개량서당으로 문을 열어 1938년 4월 1일 개교한 오늘날 미평초등학교. (사진=마재일 기자)
▲1936년 미평개량서당으로 문을 열어 1938년 4월 1일 개교한 오늘날 미평초등학교. (사진=마재일 기자)

하지만 정식 인가를 받지 못한 이 서당은 천일고무공장 김영준의 도움을 받아 학교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6학급에 교사 6명, 학생 396명의 사립 미평심상소학교로 인가를 받아 지난 1938년 4월 1일 개교해 지금의 미평초등학교가 됐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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