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쟁이’는 허문 마을의 본래 이름으로 마을 주변의 지형이 험해 생긴 말로 후에는 ‘허’씨와 ‘문’가 많이 살아 지어진 이름이라고 뜻이 변했다.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여서.문수지구는 1986년 6월 부터 주요 공공시설과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섰다. (사진=여수시)
▲여서.문수지구는 1986년 6월 부터 주요 공공시설과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섰다. (사진=여수시)

⑪문수동

여수 육지부에서는 비교적 남쪽에 위치하며 면적은 2.28㎢이다. 북쪽의 고락산, 남쪽의 구봉산과 장군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예전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허문·소미·소치마을이 전형적인 농업 중심이었다. 1980년대 후반 여수·문수 지구 개발 사업에 따라 여수시의 대표적인 주거지로 변했다. 주요 기관은 해양경찰서, 119안전센터, 여수시립환경도서관, 여수문화방송 외에 5개의 초·중·고가 있어 여수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는 도시로써 주민의 80% 정도가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허문과 소미 마을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자연 마을이 일부 남아 주민의 80%는 공동주택에 거주하고 있다. 문수동은 허문·소미 마을을 중심으로 한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1914년 소미·허문·소치 마을을 합쳐 ‘문수리’라고 부르다 1949년 여수의 행정 구역이 시로 승격하면서 ‘문수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문수동에 전해오는 땅이름인 ‘허문쟁이’는 허문 마을의 본래 이름으로 마을 주변의 지형이 험해서 생긴 말로 후에는 ‘허’씨와 ‘문’가 많이 살아 지어진 이름이라고 뜻이 변했다.

▲허문마을 유적비. (사진=오지선 기자)
▲허문마을 유적비. (사진=오지선 기자)

이 마을 입구를 강터, 큰 샘이 있는 곳을 샘, 넓은 들이 있던 곳을 ‘버던’, 햇빛이 많고 적게 듦에 따라 양달과 음달이라 불렀다. 문수로 큰길을 따라 13호 광장으로 가는 어귀에 허문 마을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허·문씨가 먼저 살았기 때문에 허문 마을이라고 알려진 것과 달리 약 400여 년 전 ‘주·정·김’ 세 성씨가 마을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미는 ‘작은 미평’을 줄인 땅이름으로, 산 밑에 있는 들판을 ‘밑들’ 또는 ‘미뜰’이라고 불러왔다.

밑은 아래를 뜻해 ㅌ이 탈락된 ‘미’가 다시 한자로 바뀌면서 아름다울 미美로 되었고, ‘뜰’은 넓은 들판을 의미하지만, 평평한 지형이라는 뜻의 ‘평坪’ 으로 바뀌었다. 문수동 부영 9차 아파트에서 고락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2015년 문수동주민자치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고락산과 둥둥골의 유래를 알려주는 표지를 세웠다.

2020년 9월을 기준으로 문수동의 인구는 8895세대 1만9800명이다. 세대별 평균 인구는 2.2명으로 여수시 전체 인구의 7.4%를 차지한다. 1986년 여천지구출장소가 여천시로 변하자 같은 해 9월 ‘여서 문수 지구 신도심 개발 사업’을 추진하면서 관문동에 있던 여수시청을 여서동으로 옮기면서 문수동은 1만여 명이라는 인구가 증가됐다.

▲전라남도 문화재 고락산성. (사진=여수시문화원)
▲전라남도 문화재 고락산성. (사진=여수시문화원)

 

● 고락산성

해발 355m의 고락산 정상에서는 화정면과 남면의 다도해와 멀리 광양과 경상남도 남해까지 볼 수 있다. 고락산성은 해발 200.9m의 낮은 산에 둘레 354m의 본성을 두고 꼭대기에 적의 침입을 감시했을 것으로 보이는 100m의 작은 부속성을 둔 독특한 구조로 구성됐다.

서기 600년쯤 쌓아진 백제 시대의 성으로 밝혀져 1998년 전남 지방문화재 자료 제204호로 지정됐다. 고락산성은 산의 지형을 이용해 쌓았기 때문에 서쪽이 높고 나머지 부분은 산 아래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테뫼식으로 안과 바깥 양쪽에서 510~530cm 너비로 돌을 쌓아 만든 협축식이다.

성벽은 퇴적층을 모두 없앤 원래 지반층, 즉 석비레층 또는 바위까지 드러나게 하고 별다른 기단을 두지 않은 상태에서 곧바로 쌓아 올렸다. 바위층이 있을 경우 바위를 그대로 두고 위에다 돌을 얹거나 바위를 앞에 두고 뒤쪽에 성벽을 쌓아 올렸다.

서쪽 성벽에서는 바위 위에 성벽을 쌓기 전 작게 깬돌과 점토를 다져 바위의 굴곡을 편평하게 다진 흔적이 확인됐다. 성벽을 쌓은 돌은 20~80cm 크기의 직사각형으로 깬 돌이 주로 사용됐으나 자연석과 판판한 모양도 있어 틈 사이는 쐐기돌을 사용해 메우고 있다.

돌의 고른 면을 밖으로 하여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경사가 심할 경우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깎아 수평을 유지해 성벽이 낮은 쪽으로 휩쓸리지 않도록 했다. 바닥이 편평한 곳은 가장 아래쪽부터 직사각형 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렸다.

고락산성은 본성에서 3곳, 보루에서 2곳의 문지가 확인됐다. 본성의 서문지가 가장 넓고 잘 남아 있어 중심 통로로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성문은 성의 내외를 연결하는 통로이자 물자를 운반하는 곳으로 방어할 때는 약한 곳이 돼 공격 목표가 되기도 쉽다.

▲고락산성 본성. (사진=여수시문화원)
▲고락산성 본성. (사진=여수시문화원)

고락산성의 본성에서 땅을 파고 그 안에 돌을 쌓아 물을 모든 집수정 1곳, 돌 대신 점토로 다져 물이 빠지는 것을 막은 집수정 2곳이 발굴됐다. 보루에서는 돌로 쌓은 집수정 1곳이 확인됐다.

본성의 집수정 가운데 돌로 쌓은 것은 석비레층을 지름 900cm 크기로 파고 그 내부에 지름 500cm, 깊이 250cm 규모로 벽석을 쌓아 만들었다. 둥근 모양으로 벽석과 석비레층 사이와 바닥면에는 회흑색 점토를 채워 물이 빠져 나가는 것을 막았다.

고락산성 발굴 조사 결과 삼국시대 건물 터 11동과 움집형태의 주거지 10기 등이 확인됐다. 출토된 유물은 기와와 토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나 말과 관련된 도구 및 무기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돌 등도 출토됐다. 출토된 토기는 대부분 백제 시대 것으로 연질과 경질이 대부분이다.

그릇 모양은 항아리나 단지, 접시, 뚜껑 접시, 굽다리 접시, 호랑이 모양의 요강, 좌우 양쪽 부분은 둥글지만 앞뒤는 편평하며 입구가 좁은 병, 시루, 그릇받침 등 가야계 토기인 뚜껑 접시가 출토됐다. 완전한 형태로 복원될 수 있는 항아리 또는 단지는 몇 개 안 되며, 대부분이 조각으로 출토됐다. 아가리 부분은 바깥으로 바라지는 모양이며, 입술 부분에 가는 선이나 홈이 돌아가면서 굴곡을 형성하고 있다.

세발 토기는 1점이 조각으로 출토돼 양은 적어도 백제 토기의 대표적인 유물로서 그 의미가 크다. 뚜껑 접시는 뚜껑에 꼭지가 있고 없음에 따라 무유식과 유유식으로 나뉜다. 꼭지가 있는 뚜껑 접시는 꼭지의 모양에 따라 젖꼭지 모양과 진주와 같은 보석 모양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대부분이 회청색 경질 토기이다. 유두형 그릇은 몸체가 대부분 낮은 편으로 1줄의 돋음띠를 돌렸다. 보주형은 몸체에 점들을 찍어 무늬를 새겼다. 굽다리 접시는 굽다리 일부만 남아 있는 조각들과 굽다리 부분에 등근 구멍이 있는 다리가 짧은 굽다리 접시가 출토됐다. 접시는 합천 등 옛 가야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고분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여수지역유림들이 일제강점기 때에 일본군에 의해 수모와 치욕을 당하며 국부인 고종에 이어 순종까지 죽게 되자 이를 추모하기위한 사당. (사진=여수이야기)
▲여수지역유림들이 일제강점기 때에 일본군에 의해 수모와 치욕을 당하며 국부인 고종에 이어 순종까지 죽게 되자 이를 추모하기위한 사당. (사진=여수이야기)

●삼황묘

1919년 1월 일본인들이 고종에게 독을 써서 죽였다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온 민족의 슬픔과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3월 3일 국가에서 치르는 장례식을 앞두고 전국의 백성들이 속속 서울로 모였다.

여수의 유림들은 대표인 쌍봉의 정충섭·삼일 김병순·미평 정영민·문수 최봉삼·정병동·정용수와 여성 6명이 포함된 42명의 백기 통곡단을 편성해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서울까지 바로 갈 수 있는 차편이 없어 이들은 ‘태안환’이라는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 최봉상의 아들 영모가 운영하는 옥천여관에 머문 뒤 기차를 이용해 서울까지 감으로써 그때까지 여수를 깔보던 서울 유림들의 여수를 보는 눈이 달라 졌다고 한다.

이들은 1926년 순종이 돌아가시자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이러한 여수 지역 유림과 주민들의 뜻을 담아 허문 마을에 삼황묘·망미헌·사층단·어희원과 같은 건물이 지어졌다. 삼황묘가 세워진 시기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1926년, 1927년 및 1929년까지 다양하다.

발전사에 따르면 1927년은 경술국치가 일어난 지 17년째가 되는 해인데, 당시의 인심이 일본을 미워하는 것보다 오히려 일본 문물에 깊게 빠져드는 경향이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정영민·최석주·최봉삼 세 사람이 민족정기를 바로 잡기 위해 고락산 아래에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고종 및 순종을 모시는 삼황묘을 짓기로 뜻을 모았다.

하지만, 돌아가신 분들의 위패를 모시는 영실과 오호제를 비롯해 동·서·남·북 4대문을 옛날 격식에 맞춰 짓는다는 것은 섬세하고도 고도의 건축 기술뿐만 아니라 큰 비용이 들어가는 어려운 공사였다.

이들은 1년 가까운 노력과 고생 끝에 겨우 영실을 지었으나, 그 자리가 물바다가 되어 다시 터를 잡아 새로 짓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건축비가 바닥나자 정영민이 은행에서 많은 빚을 내어 영실은 정봉조, 오호제는 임정모, 대문의 태극무늬는 강진영이 맡아 다시 지었다. 고 기록됐다.

건물을 다 짓자 4개의 문에 새긴 태극무늬가 말썽이 되어 일본경찰이 트집을 잡는 바람에 강진영은 한때 몸을 피했고, 정영민은 감옥에서 고초를 겪었다.

이 삼황묘에서는 해마다 정월과 칠월, 처음 맞는 정일 또는 해일을 택해 지방 유림 들이 모여 엄숙한 제례를 모셨다. 옛 왕실에서 판서나 승지를 지낸 사람들이 제관으로 내려와 여수의 뿌리 깊은 선비의 기풍을 높이 샀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내선일체를 내세워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해 1939년 삼황묘를 강제로 철거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강진영과 최영모 두 사람이 텅 빈 그 자리에 유허비를 세워 나라 잃은 설움을 삼켰다.

영실에 모셔졌던 가로 30cm, 세로 20cm의 세 임금님의 영정은 당시 여수 경찰서 고등계 형사로 있던 제주 출신 김차봉이 가져갔지만 그 뒤로 찾을 수 없었다. 삼황묘의 원래 현판 글씨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이 쓴 것을 액자에 새겨 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황묘가 낡고 헐어 다시 손대어 고친 것을 기념하는 비』를 통해 1958년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조선소 3왕(태조, 고종, 순종)을 모신 사당. 
▲조선소 3왕(태조, 고종, 순종)을 모신 사당. (사진=여수시)

삼황묘는 2006년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덕충동 충민사 앞에 새롭게 지었다.

● 망미헌과 사충단

중국 송나라 때 이름난 시인이다. 여기서는 ‘망미’는 추앙하는 임금을 그리며 추모하는 의미로 사충단과 연계가 된다. 사충단은 삼황묘 옆에 세워졌던 사당 터로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한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기 자결한 세분, 즉 조병세·민영환·송병선과 을사의병을 일으켰다.

체포돼 대마도로 끌려간 뒤, 단식으로 목숨을 끊은 최익현 등의 충신을 기리는 단이었다. 민영환은 1896년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하고 정치 개혁을 시도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났다. 친일파와 대립해 한직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양력 11월 30일 자결했다.

조병세는 1896년 폐단이 많은 정치 개혁을 위해 ‘시무 19조’를 상소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가 여러 사람이 함께 올리는 상소에서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사람으로서 늑약의 무효화, 을사5적의 처형 등을 주장하다가 일본 헌병에 의해 강제로 고향으로 옮겨지는 도중 가마 안에서 독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

송병선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을 찾아뵙고 상소 10조를 바치며 바른 소리를 하였다가 다음 날 일본 헌병에 의해 고향 대전 회덕으로 옮기어 보내져 나라 잃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했다.

최익현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오적을 처벌하기를 청하는 ‘창의토적소’를 올리고, “일본인은 서양 오랑캐와 하나가 되었으니, 그들을 거처 서양 문화가 들어오면 인륜이 무너져 짐승이 될 것이다”며 74세의 많은 나이에도 대인과 순창에서 의병을 이끌고 관군 및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패배한 뒤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 생활하던 중에 단식으로 목숨을 바쳤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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