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동 678번지 일대를 ‘벅수골’이라 불렀다. 약 400여 년 전 봉산동 지역 '사철동'에서 흙을 녹여 무기를 만들었다. 외부사람들은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통제구역이었다. 이에 벅수를 세워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 경계 표시로 봉산 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무사와 행운을 비는 민간 신앙의 대상으로 돌을 깎아 눈, 코, 입 등을 갖춘 사람 모양으로 만들었다.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예암산에서 바라본 여수시기지,1974년 여수중심지가 전경으로 교동 매립지에 건축이 한창이다. (사진=여수시)
▲예암산에서 바라본 여수시기지,1974년 여수중심지가 전경으로 교동 매립지에 건축이 한창이다. (사진=여수시)

⑦대교동

1998년 여수시·여천시·여천군이 통합 되면서 기초 단위 행정구역들이 같이 묶인 곳이 많았다. 이때 남산동과 봉산동을 함께 묶으면서 돌산도와 연결되는 돌산대교를 랜드마크로 삼아 행정동 이름을 대교동이라 했다.

남산동은 전라좌수영의 ‘안산’인 예암산이 남쪽에 자리 잡고 있어 이 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에 붙여진 땅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좌수영 동쪽에 있던 여러 마을 가운데 남동으로 추정된다.

『읍지』에 “예암산은 남쪽으로 3리에 있는 진산, 쇠북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바구산’, ‘남산’이라 부른다”고 기록한다. 예암산 앞에는 경도가 있다. 예암산은 2022년 6월 완공을 목표로 ‘자연형 도심 근린공원’으로 돌산공원, 장군도, 경도 등 여수의 경치를 바라볼수 있다.

봉산동은 구봉산의 동남쪽에 위치하여 조선 시대에는 사철이 생산돼 ‘쇠철동’' 이라 부른 뒤부터 마을 이름이 ‘쇠철’, ‘새철’이라 전해진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바꾸면서 봉강과 봉서, 국포 마을을 포함하여 봉산리라한다. 1953년 남산동 및 국동과 나뉘었다.

봉산동 일대의 매립은 일제 강점기부터 이뤄졌다고 기록한다. 일찍이 여수에 와서 살던 히로시마 출신 다사카 노브지는 1913년쯤부터 고기를 잡기 위해 우리나라에 온 고향 어부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업 이주민 마을을 세우고자 1916년 히로시마현과 협의를 했다. 지사 마부치 타로우의 허락을 받았으나 의회가 부결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1917년 전라남도지사 미야모토 마타시치가 일본에 갔을 때 히로시마현 지사와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함으로써 1918년 히로시마 어업 이민촌을 만들기로 뜻을 모아 1921년 봄 국동 지역의 공유수면 매립 공사를 시작해 1923년 8월 17일 완공됐다. 그 뒤 히로시마 어민단 22가구가 이주해 동정에 14집 당머리에 8가구가 정착해 그곳을 어업 전진기지로 사용했다.

남산동 당두진은 옛날 장군도와 돌산을 오가는 나루였다. 바로 옆 비탈에는 영당이 있어서 그 이름이 생겼다. 원래 나루는 ‘실어 나른다’ 혹은 ‘건너는 곳’이라 하여 한자로 도渡· 진津으로 쓴다. 좀 큰 곳은 포浦, 더 크면 항港 이다. 지금은 이곳을 당머리라 부른다. 평상시에도 바다에 나가는 배들은 영당에다가 반드시 쌀 두 말씩 바치고 고사를 지낸 다음에야 출항했다고 한다. 안전을 기원하는 신앙이었다.

▲봉산동 벅수. (사진=여수시)
▲봉산동 벅수. (사진=여수시)

오래전부터 여수사람들은 봉산동 678번지 일대를 ‘벅수골’이라고 불러왔다. 연등동과 광화동 등 다른 지역에도 벅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유별나게 이곳만을 ‘벅수골’이라고 부르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임진왜란 때 구봉산 아래에서 철광석 입자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 흙을 캐와 이곳에서 녹여 무기를 만들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 년 전 봉산동 일부 지역은 ‘사철동’이라 불렸다

봉강동 의관산, 서당산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캔 흙을 녹여 충무공이 지휘하는 전라 좌수영 수군이 사용할 화살촉, 칼과 커다란 쇠못 따위의 군사 무기와 건축 자재를 만드는 제련소와 대장간이 있었다. 때문에 이곳은 외부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통제 구역이었다.

이 경계 지역에 수문장격인 벅수를 세워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 경계 표시로 사용함과 동시에 봉산 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무사와 행운을 비는 민간 신앙의 대상으로 돌을 깎아 눈, 코, 입 등을 갖춘 사람 모양으로 만들었다. 벅수의 얼굴은 툭 튀어나온 통방울 눈, 주먹코, 삐져나온 송곳니와 앞니 그리고 벙거지 또는 관모형 모자를 쓰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선 시대 관리들은 머리에 사 모를 장군들은 전립을 썼다. 벅수에도 이와 같은 특징이 반영됐다.

‘남정’과 ‘화정’은 옛날 중국의 관직 이름이다. ‘중’과 ‘려’는 사람 이름으로, 남정과 화정은 관직을 ‘중’과 ‘려’라는 사람이 맡고 있었다는 뜻이다. ‘화정’은 불, 여름과 남쪽 바다를 지키는 신으로 물과 별의 제사를 주관하기도 하여 ‘축융’이라고도 했다. 이같이 중국의 옛 역사에서 시작된 ‘남정중’, ‘화정려’가 우리나라 무속 신앙과 결합하면서 귀신의 침입과 전염병 등을 막아내는 신으로 변화됐다. 왜구의 침입이 찾았다는 이 지역의 특성상 해안 방위의 개념이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2020년 대교동의 인구는 3118세대에 남자 2817명, 여자 2717명으로 모두 5534명이 거주했다. 수산업과 농업을 바탕으로 생활하던 대교동에는 외부에서 인구가 유입됐다. 대표적인 사례는 6·25 한국전쟁 때 북쪽에서 피난 왔던 사람들이 남산동에 정착했다.

1979년 국동항이 국가어항으로 지정되면서 수산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주택 지구가 봉산동에 형성되면서 대교동의 인구 증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1976년 국제부흥개발은행에서 빌린 차관 50억 원으로 국동에 4만 평 크기의 현대식 어항단지 공사가 시작되어 1980년 완공됨으로써 수산물 위판의 중심이 봉산동으로 바뀐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

▲남산동과 돌산도를 잇는 돌산대교는 1980년 12월 착공해 1984년 12월 완공했다. (사진=여수시)
▲남산동과 돌산도를 잇는 돌산대교는 1980년 12월 착공해 1984년 12월 완공했다. (사진=여수시)

남산동은 수산센터가 들어선 1965년 이후 수산물 위탁 판매의 중심지였다. 1982년 여수연안여객선터미널이 교동으로 옮겨졌고 1984년 돌산대교 준공, 1986년에는 교동 수산물시장 등이 들어서면서 관련 서비스 산업이 함께 발달할 수 있었지만 주거 기능은 약화했다.

대교동뿐만 아니라 여수 지역 수산업의 쇠퇴는 어족 자원의 고갈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총 20톤 미만의 작은 고기잡이배들이 코가 촘촘한 그물을 사용해 바다 밑바닥을 끌고 다니면서 어린 물고기까지 마구 잡는 소형 기선 저인망 불법으로 규정된 것도 커다란 영향을 줬다.

2004년 12월 31일 「소형기선저인망어선 정리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2005년부터 2006년까지 2년간 정부에서 826억 원 투입해 2467척의 소형 기선 저인망 어선을 사들여 폐기했다. 이후 지속한 감척 사업은 대교동 인구 감소에 많은 영향을 줬다.

1980년대 후반 여서·문수 신도심 개발은 아파트와 같이 거주 환경이 좋은 지역으로의 인구 유출이 두드러지면서 인구가 많이 감소했다. 여수 시내 도로 교통의 개선과 자동차 증가, 2012 여수세계박람회를 치르기 위해 대교동과 가까운 국동, 덕충동 등에 새로운 아파트가 건설됐다. 대교동의 인구는 1990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여 2020년까지 현재까지 인구 감소율이 높은 지역에 속한다.

▲구봉산 중턱에 위치한 한산사는 1194년에 건립됐다. (사진=여수시)
▲구봉산 중턱에 위치한 한산사는 1194년에 건립됐다. (사진=여수시)

●한산사

한산사는 여수시 봉산동 936번지 구봉산 중턱에 자리한 사찰로 대한 불고 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로서 고려 시대 보조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라 전해지고 있지만 확실한 고증은 없다.

한산사에는 대웅전·칠성각·용왕각·요사 등의 전각이 있다. 1750년에 주조된 것으로 보이는 범종이 있다. 여수 8경 가운데 하나인 ‘해 질 녘 한산사의 종소리’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보물 578호 후불탱화. (사진=여수시문화원)
▲보물 578호 후불탱화. (사진=여수시문화원)

한산사에는 아미타후불탱화가 있다.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자신의 노력으로 깨달음을 얻은 벽지 불을 배치했다. 왼쪽에 사리불, 부루나, 가전연과 그 아래로 가섭존자와 관음보살이 모시고 섰다. 오른쪽은 벽지불과 수보리, 목건련, 아나율 그리고 아난존자와 대세지 보살이 위치해 있다.

후불탱화 이외에도 칠성탱과 산신탱이 있다. 전자는 중앙의 칠성광여래 좌우에 일광· 월광보살을, 칠성여래 앞줄에는 칠원성군 6점이 배치돼 있다. 한 말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활약한 ’남곡‘스님의 작품이다. 의복의 주름이 모두 붉은색으로 처리되고 도식화된 표현이 시대성을 반영하고 있다.

▲최영, 이순신, 이대원, 정운 장군 등을 모셨던 여수 영당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44호. (사진=여수시)
▲최영, 이순신, 이대원, 정운 장군 등을 모셨던 여수 영당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44호. (사진=여수시)

●충무공영당

충무공영당은 현재 국동 어항단지 내 남산동 30번지에 있다. 영당이 위치한 당머리와 봉산·국포리 일대는 고기잡이를 주로 하는 어촌이다. 지역 어민들이 어업 활동에서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당집을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영당에는 고려 말 전라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크게 물리친 최영 장군의 영정을 모셨다. 임진왜란 이후 이순신, 이대원, 정운 장군을 함께 모셨다.

1943년 여수경찰서 형사부장 김차봉에 의해 영정이 유실되어 빈 사우만 남았다가 1975년 국동 어항단지 조성 사업으로 헐렸다. 1982년 평방과 도리 사이에 거북선 모양의 호반을 놓고 그 위에 외목도리를 얹어 복원했다. 여수 영당 터는 2008년 12월 26일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됐다.

여수에는 악공청이라 불리는 음악 기관이 있었다. 악공이란 관아에서 음악을 담당하던 음악인으로 원래 악공청은 진남관의 동쪽 뒤편에 있었다. 『호좌수영지』에는 나팔수 131명, 기생 37명, 무녀가 46명, 취타수가 35명이 있었다고 기록됐다.

이들은 군악대 역할을 포함해 전라좌수영의 각종 행사에 동원돼 음악과 연희를 담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악공청은 충민사나 영당 제사 등 여수 지역에서 치러지는 중요한 의례나 행사에도 음악과 관련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절·만리성·사직단

197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간한 『문화유적총람』에는 “제철지는 봉산동에 있는데, 임진왜란 때 사철이 생산되어 무기 제작에 사용하였다. 1751년에 절도사 정익량이 사철을 보관하는 창고를 설치하였다”고 기록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봉산새철7길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전라좌수영 수군이 사용하는 화살촉, 칼과 커다란 쇠못 따위의 군사 무기와 건축 자재를 만드는 풀무간이 있었던 곳으로 예로부터 ’사철동‘으로 불렀다. 외부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던 통제 구역 이었다.

특히 당시 제절소의 폐기물 처리장으로 추정되는 봉산동 3통 3반과 4반 일대의 돌담이나 주택의 안마당 등에서는 지금도 제철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로 마을 사람들은 '쇠똥' 이라 부르는 슬러그와 불에 달구어진 내화돌 등을 쉽게 볼 수 있었다.

▲1970년 제1토지구획정리사업 이전의 봉산동의 모습과 시가지로 변한 봉산동. (사진=여수시)
▲1970년 제1토지구획정리사업 이전의 봉산동의 모습과 시가지로 변한 봉산동. (사진=여수시)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봉산동 지역에는 놋강이라는 저수지가 있었다. 저수지는 제철 과정에서 달구어진 쇠를 식히던 냉각수를 공급하던 곳이다. 지금은 메워져 집들이 들어서 있다. 사직단은 구봉산 동쪽 중턱의 봉산동에 있었다. 원래 나라에서는 종묘를 궁전 왼쪽에, 사직단을 오른쪽에 두었다. 고을에서는 관아의 서쪽, 곧 오른쪽에 사직단을 두었다.

토지신은 선농·선잠·우사 등을 관장한다. 나라에서는 종묘와 사직을 고을에서는 사직단을 누어 제사를 지냈다. 그렇게 해야 입아 증민 곧 농사가 잘되어 백성과 나라가 모두 평안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수어업협동조합. (사진=여수시)
▲여수어업협동조합. (사진=여수시)

●여수수산업협동조합 수산물종합센터

여수어업조합은 1924년 11월 11일 설립됐다. 관내 어업조합 7곳 중 연도, 안도, 거문도 등에 이어 가장 나중에 세워진 것은 전남수산과 흥양수산주식회사가 이미 세워져 오늘날 수산업협동조합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수어업조합이 세워진 뒤에도 어획물 공동판매 사업은 두 수산회사의 기득권에 눌려 시행할 수 없었다. 설립 12년 후인 1936년 1월에 와서 비로소 위판권을 가질 수 있었다. 1953년 4월 경호어업조합을 흡수했다. 5·16 군사쿠데타 뒤 「협동조합법」이 시행됨에 따라 1962년 4월 1일 '여수어업협동조합'으로 바뀌었다.

1965년 8월 원양어업협동조합과 공동으로 남산동에 수산센터를 세웠다. 그해 12월 선어 위탁 판매사업을 여수공동어시장으로 넘겼다. 이어 1967년 10월 관내 어선에 대한 어업용 면세유 공급사업, 1968년 10월 25일 신용 점포를 개설해 금융기관의 기능도 담당하기 시작했다.

2009년 정부로부터 농림수산사업자로 확정됨에 따라 추진된 수산물종합센터와 국동다기능어항은 2011년 1월에 착공해 2013년 11월에 준공했다.

●여수수산물특화시장

1984년 12월 돌산대교가 준공됨에 따라 시에서는 돌산공원을 개발하려는 방안으로 1986년 교동에 수산물시장을 건립했다.

그러나 2004년 8월 10일 수산시장 이전을 반대하는 상인들 측에서는 교동시장 내에서 활어를 판매할 상인 30여 명을 모집했다. 반면 8월 13일 수산시장을 옮기는 것에 찬성하는 상인들은 자신들이 사들인 남산동 일대 땅에 활어 상인을 중심으로 임시 시장을 만들어 여수종합수산시장을 열었다. 

하수도 시설 미비로 인근 해역에 오수를 방류하던 여수종합수산시장은 2004년 8월 하수도 관로를 새로 설치해 그 해 12월 29일 정식으로 여수수산물 특화시장이 문을 열었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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