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현의 ‘삼’은 ‘미, 미르, 무르’라고 해 ‘일’은 ‘실實· 실室· 일日· 곡谷’
삼일의 뜻 미르실, 미고을이 돼 물과바다, 용의마을로 뜻해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여수국가산업단지는 1963년 정부가 국토의 균형발전을 목적으로 여천에 산업단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하면서 조성되기 시작했다. (사진=여수시)
▲여수국가산업단지는 1963년 정부가 국토의 균형발전을 목적으로 여천에 산업단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하면서 조성되기 시작했다. (사진=여수시)

㉗삼일동

삼일동은 여수에서 가장 높은 영취산이 이어져 있고 동쪽에는 제석산과 부암산이 있어 전반적으로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호랑산과 영취산에서 물줄기가 시작된 중흥·남수·상암천이 북쪽과 북동쪽의 광양만으로 흐르는데, 북서쪽 해안 간석지에 우리나라 최대 석유화학 공업지역인 여수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됐다.

『여수잡영』에는 삼일동의 산지 지형인 영취산·까치산·매봉산·운곡 등의 산지와 하천 지형으로 중흥천을 비롯해 갯벌과 관련된 염전 등이 시로 표현됐다. 영취산은 상암동과 중흥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석가모니가 마지막 설법했던 인도의 영취산과 모양이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읍지』에 “영취산은 북쪽 30리에 있는데, 산 아래 흥국사가 있고, 또 천왕봉이 있다. 기우단이 있어 매우 영험이 있다”고 기록됐다.

영취산은 예로부터 지역의 신령스러운 산이었기 때문에 기우제나 치성을 드렸던 산이다. 산은 그다지 높지 않으나 산 중턱에서부터 정상까지 5~20년생 진달래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어 봄철이면 해마다 진달래축제가 열린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봉화처로 “진례는 북쪽으로 광양 건대산에 응한다”는 기록을 통해 볼 때 그 전부터 진례산이라 불렸음을 알 수 있으나, 그 뒤 『신증승평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진례산만이 기록되다가 『여지도서』에 진례산과 영취산을 구분하고 있다.

▲여수 영취산 모습. (사진=여수시 제공)
▲여수 영취산 모습. (사진=여수시 제공)

영취산 밑에는 적량 마을에서 5리나 떨어진 옴팍한 골짜기가 형성되어 깊은 계곡을 이루는데, 늘 구름이 끼어서 ‘구름실’이라 불렀다. 호랑산과 영취산에서 발원하여 흥국사 곁을 지나 광양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이 중흥천이다. 예전에는 부흥천으로 불렸으며, 거위가 많았는지 ‘아천’ 이라고도 했던 하천에 대한 시도 실려있다.

삼일동은 여수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동으로 화치·월하·평여·중흥·적량·월내·낙포·신덕·상암·호명동의 10개 법정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이다. 조선 시대 순천부 삼일포면 지역으로 1897년 삼일면, 1976년 여천지구출장소 삼일지소가 설치된 뒤, 1980년 읍으로 승격, 1986년 여천시 삼일동이 됐다.

여수국가산업단지 형성과 확장 과정에서 많은 자연 마을들이 철거됨으로써 극히 일부 지역에서 소규모의 농업과 어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석유화학 공업단지의 특성상 여러 환경문제에 대한 주민 불편과 민원 유발 요인이 있다. 이어 시설 노후화로 안전 불안 요인이 잠재되어 있는데, 최근 산단 대개조 사업이 진행 중이다.

삼일동의 ‘삼’은 우리 옛말로 ‘밀, 미, 무르’라고 한다. 이는 ‘물’이나 ‘바다’를 의미하며, ‘용’도 ‘미루, 미리’라고 해 이를 줄이면 ‘밀’이 되고 여기에 ‘ㄹ’이 탈락하면 ‘미’가 된다. ‘일’은 옛 ‘ㅿ’을 활용한 ‘실’이 변화돼 ‘실實· 실室· 일日· 곡谷’ 등으로 표기되면서 ‘마을’을 뜻하기 때문에 ‘삼일’은 ‘미르실’이나 ‘미고을’이 돼 ‘물과 바다’ 또는 ‘용의 마을’ 즉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형 조건에서 비롯됐다.

백제시대 여수의 육지 쪽에는 원촌현이라는 행정구역이 있었는데, 통일 신라 시대 때인 757년에 해읍현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940년 여수현이 됐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여수에는 원촌현 말고도 지금의 삼일동에 해당하는 곳에 삼일포향과 적량 및 진례부곡이 있었다.

조선이 세워진 초기에도 왜구는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1396년에는 왜구의 배 120척이 경상도에 쳐들어와 병선 16척을 빼앗아 가 수군만호를 죽였으며, 동래·기장·동 평성을 무너뜨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조선 정부는 8월 12일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전라·경상·충청도에서 왜구와의 전투 상황을 점검하고 병선의 허실을 조사하려고 특별히 파견한 관리인 경차관 신유정을, 18일에는 대장군 오용권을 보냈다. 이 과정에서 삼일동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이 고려되어 진례만호진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 초기 전라도 수군의 정비가 완전하지 못했던 것 같다. 1421년 큰바람에 병선 22척이 부서지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10명, 파도에 밀려 행방을 알 수 없는 사람이 91명이나 되어 전라도 여러 포의 만호들이 국청에서 신문을 당했다.

신문을 당한 사람 중에는 진례만호 강이충도 포함됐다. 2년 뒤인 1423년 진례만호진은 지금의 국동으로 추정되는 내레포로 옮겨졌다. 1789년에 작성된 『호구총수』에는 삼일포면에 속한 삼동·해지·용혈·고치·첨산·포상·월하동·남수동·구음·평려·신송·산본·당산·복동·신대·두억·상적·하적·읍포·군영포·월한·비학동·작산·덕대·섭도·읍동·진례·호명과 같이 28개 마을 이름이 나타난다.

이때의 총가구 수는 829호, 인구 2675명이었다. 『호구총수』에 나타난 삼일 지역의 땅 이름 가운데 ‘부들강’으로 풀어볼 수 있는 ‘포상’과 ‘구음’을 『마을유래지』에는 소상·늑음으로 표기했다.

▲1872년 제작된 순천부지도에 나타난 삼일 지역. (사진=여수시)
▲1872년 제작된 순천부지도에 나타난 삼일 지역. (사진=여수시)

1872년 제작된 『순천부 지도』에는 지금의 삼일 지역에는 모두 전라좌수영에 속한 중흥 중심의 삼일포면과 상암동에 여수면이 있었다. 삼일포면은 순천으로부터 65리 떨어져 월하·포상·중흥·해지·삼동·화치·평여·산본·당본·낙포·묘도의 11개 마을, 여수면은 순천 동쪽 60리에 역전·내동·자내·오만 등 12개 마을로 구성됐다.

1897년 5월 16일 칙령 제12호에 따라 여수군이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삼일포면을 삼일면으로 이름을 바꾸고 1902년 삼일면이 삼동면과 삼북면으로 나뉘었다. 삼동면은 지금의 상암동을 중심으로 12개 마을이 포함돼 삼북면은 중흥동이 바탕이 되어 13개 마을이 들어가 있었다. 1905년 두 면을 합해 28개 마을이 속한 삼일면, 1908년 각 자연 마을에 리里 자를 붙여 47개 리를 아울렀다.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을 때 화치·월하·평여·중흥·적량·월내·묘도·낙포·신덕·상암·호명리가 오늘날 11개 법정동의 토대가 마련됐다.

더불어 돌산군 태인면에 소속됐던 묘도·우순도·삼간도·지진도와 작은 섬 7개가 삼일면으로 들어 왔고 묘도리의 우진도는 적량리, 삼간도는 중흥리, 쌍봉면에 속했던 오만리 일부와 사근리 및 자내리가 삼일면 호명리에 편입되고, 삼일면 지역이었던 해지·대평·오산·삼동 4개 리를 쌍봉면에 떼어 주었다.

1917년까지 삼일면의 행정 중심지는 ‘복골’, 즉 용성이었다. 용성에 있던 면사무소는 중흥동 중촌 563번지로 옛 건물을 옮겨 지어 12년 동안 면 행정을 맡다가 1929년 중흥동 6001번지로 다시 이전했다. 이후 여수국가산업단지 확장으로 중흥 지역이 철거되면서 2013년 상암동에 주민센터가 세워졌다.

1976년 9월 1일 전라남도 조례 제796호에 따라 전라남도 여천지구출장소가 새로이 생기면서 삼일면은 삼일지소로 이름을 바꾸었고, 1980년 삼일읍으로 승격됐다. 1986년 여천시가 생기면서 삼일읍은 3개 동으로 나뉘었다. 화치·월하·평여·중흥·적량·월내는 삼일동, 묘도리는 묘도동, 낙포·신덕·상암·호명은 상암동이 되었다가 1999년 상암동은 삼일동의 법정동으로 들어갔다.

1981년 삼일읍 전체 인구 1만 8700명 가운데 중흥 27.2%, 월내 17.8%, 상암 10.8%, 적량 10.0%, 평여 9.90 순으로 읍사무소와 파출소, 초·중학교, 농협과 우체국을 비롯해 집중된 중흥에 인구가 가장 밀집되어 있었다.

여수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1967년부터 여러 마을의 철거와 이주가 있어 전반적인 인구는 줄었지만, 턱없이 낮은 보상비, 이주민을 위한 택지 부족,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고향에 가까우면서 땅값이 비교적 싸 농사를 지을 땅을 구할 수 있는 삼일 지역으로 이주하는 가구가 많았다.

1988년 12월 적량동 상적 마을이 철거되자, 두암 하촌에 집단 이주하여 ‘두암 신촌’이 만들어진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2020년 12월 말 기준 삼일동의 인구는 1315세대 2565명이 거주하고 있다.

▲월내동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사진=여수시문화원)
▲월내동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사진=여수시문화원)

● 선사 시대

상일 지역은 동·남·북쪽이 바다로 둘러싸여 갯벌과 사빈이 발달해 신석기 시대 유적인 조개더미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에 따른 여수국가산업단지 조성으로 확인되지 못한 채 모두 메워졌다. 청동기 시대 대표적인 유적인 고인들은 적량동·평여동·월내동 등에서 발굴이 이뤄졌다.

월내동 고인돌 유적은 GS칼텍스의 공장 확장 계획에 따라 원유를 저장하는 탱크 시설 부지에 포함됨으로써 유적의 중심부에 자유탱크 보호둑과 진입로 건설 공사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덮개돌을 비롯한 많은 유구가 파괴됐고, 현장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보고 됨으로써 국립 광주박물관이 1990년 7월 16일부터 8월 31일까지 45일간에 걸쳐 발굴 조사해 9월 30일까지 한 달 동안 이전, 복원 작업을 실시했다.

그 결과 새로운 유구 형식이 밝혀졌고, 슴베식 돌칼과 자루가 있는 돌칼이 함께 출토됐다. 농경 자료로서 볍씨자국 토기가 함께 출토돼 고인돌이 구멍무늬 토기를 사용했던 사람들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1구역에서는 깬돌과 둘레돌로 이루어진 고인돌 역은 고인돌을 만들 때, 땅 위에 개방된 채로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졌다. 드러난 각 유구 간의 만들어진 시간 차이로 보아 묘역은 서로 파괴·침범 없이 만들어져 이른바 신성한 지역이었음을 추정했다.

유적 조사에서는 30기의 고인돌 하부 구조가 조사됐다. 간돌칼 등의 석기류 및 구멍 무늬 토기 등 다양한 토기류가 발견됐다. 유구는 기본적으로 돌널을 매장 주체부로 하고 있어 주변에 묘역으로서 둘레돌을 돌리고, 그 안에 돌을 놓은 것과 돌널의 상부가 단순 돌무지로 이루어진 것으로 구분된다. 그동안 알려진 다른 고인돌 유적과 같이 돌널 위에 뚜껑돌을 얹고, 그 위에 덮개돌이 올려지는 구조는 같은 것으로 추정됐다.

월내동 유적에서는 지역적으로 가까운 적량동이나 평여동, 오림동 고인돌 유적 등 이른바 보성강 유역의 요녕식 동검계 청동기와 천하석으로 만들어 다는 구슬인 식옥 등의 장신구들은 출토되지 않았다.

▲월내동에서 발견된 비파형 동검. 
▲월내동에서 발견된 비파형 동검. 

한편 2008년 10월부터 2010년 2월까지 여수국가산단 GS칼텍스 공장 확장 용지에 포함된 적량동·월내동 일대 고인돌 유적이 발굴됐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청동칼 중 가장 긴 것으로 알려진 경북 상주에서 출토된 42cm보다 1.4cm가 긴 43.4cm와 보존 상태가 좋은 37.7cm 비파형 동검이 함께 발굴됐다.

중촌 마을의 유적에 대한 지표조사는 2000년 8월 7일부터 9월 6일까지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했다. 시굴조사는 사)동북아지석묘연구소에서 2009년 4월 30일 시작했으나 이주민 이주 지연에 따른 가옥 철거가 이루어지지 않아 2012년 1월 10일부터 6일 동안 다시 실시했다.

2012년 4월 5일부터 6월 3일까지 30일 동안 유구의 존재가 확인된 3곳의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중촌 유적에서는 모두 7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돌화살촉 1점, 석재 조각 1점, 무늬없는 토기 바닥 부분 1점, 붉은간토기 몸체 부분 4점이다.

▲여수 흥국사.
▲여수 흥국사.

● 중세 사회

1703년에 세워진 흥국사 중수사적비문 내용에는 흥국사를 창건한 보조국사 지눌과 그의 제자였던 무의자 혜심스님의 관계, 송광사가 세워지고 나서 곧바로 흥국사가 창건되었다는 점, 1560년 법수화상에 의해 사찰 건물 1000여 칸 증축, 1624년 계측 대사의 대대적인 사찰 중건, 통일 대사의 법당 개축 사실과 같이 흥국사의 사적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흥국사 사적기』에는 “불법이 크게 일어날 도량이 될 것이니, 절을 짓고 이름을 흥국사라고 하라. 이 절이 잘되면 나라가 잘되고, 나라가 잘되면 이 절도 잘될 것이다”라고 하여 국가와 절이 공동 운명체임을 강조했다. 『이충무공전서』 중의 1593년 1월 25일 <장계>를 볼 때 흥국사를 중심으로 한 의승수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8~9월에 조직되었고, 그 역할도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의승수군은 1592년 8~9월에 400여 명으로 조직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조직되어 이후 상설 조직으로 변하였는데 그 중심을 흥국사에 두었다. 흥국사는 최수영에서 가깝고 주변의 5관 5포가 좌수영 관할 지역이었다는 점으로 볼 때 지역 단위 승군 부대도 좌수영의 통제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군사 활동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수행 승단의 조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승징을 도장과 격장으로 구분한 것은 이러한 지휘체계를 말해주고 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본영 승군 대장 의능과 직할 부대→순천 승군 대장 삼혜의 직할 부대→광양·구례·남원 지역 승장→산하지역 부대의 지휘체계였다.

승장 아래 승군들은 절 내부에 있는 각 전각과 암자 등에 편성시키고 있었는데, 한산사와 석천사 등지에도 파견됐다. 『호좌수영지』에 따르면 진남관 동쪽에 ‘승청’이 마련되어 본영에 파견 근무까지 했음을 알 수 있고, 법으로 정해진 급료도 받았다.

▲죽도도해금지령 팻말. (사진=Phaeton블로그)
▲죽도도해금지령 팻말. (사진=Phaeton블로그)

1696년 1월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인이 독도에 가서 고기잡이와 해조류 채취를 영구히 허락하지 않는다”는 ‘죽도도해금지령’을 내렸다. 그해 여름 울릉도로 갔던 안용복은 일본의 고기잡이배를 쫓아 자산도, 즉 독도를 거쳐 일본 호키슈에 도착해 울릉도에 고기압이 왔던 일본 어민들의 처벌을 태수로부터 약속받고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쓰시마 번주는 1697년 동래부로 외교문서를 보내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 독도에서 어업과 해조류 채취를 금한다는 막부의 결정을 알려 옴으로써 조선과 일본 간 울릉도·독도 영유권 분쟁이 타결을 보게 됐다.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의 주권을 인정받으려 두 번째 일본에 갔을 때인 1696년 5월 18일 함께 참여한 순천의 뇌헌과 승담·연습·영률 등의 승려들이 기록에 남겼다.

“동래 사람 안용복…순천의 승려 뇌헌·승담·연습·영률·단책 등이 함께 배를 타고 울릉도에서 일본국 호키슈로 들어가 왜인과 서로 송사한 뒤에 양양현 가까이 돌아왔으므로, 강원 감사 심평이 그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급하게 보고하였다.”고 기록했다.

▲여수국가산단 내 남해화학 조성전과 조성후. (사진=남해화학)
▲여수국가산단 내 남해화학 조성전과 조성후. (사진=남해화학)

● 삶과 변화

삼일 지역 주민들의 이주는 1967년 2월 16일 지금의 GS칼텍스인 호남정유 공장 건설과 관련된 건설부고시 제128호에 따라 당시 삼일면 전 지역이 공업단지 조성 사업지구로 승인되면서부터 시작됐다. 1967년 11월 7일 호남정유공장의 제1차 공사가 시작되면서 공장 터 조성지구에 있었던 적량동 외곽 지역의 가자지들판과 선창 주변에 있던 15가구가 철거돼 적량동과 가까운 다른 마을로 옮긴 것이 처음이었다.

1974년 호남정유공장 정문의 위치를 바꾸면서 군장 마을 12가구, 여천종합화학공업기지조성 사업지구에 포함된 화치동의 첨산·죽안·중방, 월하동의 칠성·소상·평사·남창·신촌, 평여동의 평여·신흥, 중흥동의 당산 마을이 철거, 이주했다.

1978년 11월 23일 호남정유가 일일 생산량을 38만 배럴로 늘리기 위한 공장 확장단 지 부지조성 사업지구가 전남고시 제361호로 승인되면서 월내동 상촌 66, 중촌 78, 하촌 151가구를 비롯해 적량동의 하적·군장 마을 102가구, 1980년 같은 공사의 계속 사업으로 상적 마을 38가구가 이주했다. 1981년 공단 내 녹지 조성사업 계획에 따라 낙포동 상·하촌 마을이 철거됐다.

1986년 호남정유 제2차 부속공장 터에 포함된 상적 46가구, 1987년 호남정유 P·P공장 진입로 확장 부지의 하적 마을 7가구와 제일모직 부지 조성사업 관련 평여동 신송·산본 마을 전체와 남천 마을 일부가 철거돼 이주했다. 1988년 호남정유 제4차 연장사업으로 공업용지 조성에 따라 적량동의 하적·군장 마을 156가구, 용성단지 조성 사업계획으로 중흥동 용성·신평·토산 마을 전부가 이주했다.

1989년 여천국가산업단지 조성사업 시행으로 화치동의 덕암·용혈·환재 마을과 월하동 원월·봉두 마을, 1991년 여천자원비축기지 조성계획에 따라 낙포동의 한구미 마을 48가구가 이주해야 했다. 1992년 여천탱크터미널 조성사업으로 사포 마을 44가구가 선원동에 집단 이주했다. 2002년 8월 17일 익산청고시 제200호에 따라 여수국가산업단지 연관단지를 만들면서 월하·평여·두암·적량·중흥동·주삼동 삼동 마을의 1791세대 5956명이 2009년까지 장성·화장·웅천·죽림 택지 등으로 떠났다. 1967년부터 2009년까지 약 50년에 걸쳐 40개 마을 3720세대 1만 5822명이 이주했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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