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서 둔덕삼거리를 거쳐 대곡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둔덕재’라 불렀다
용수마을은 연등천이 시작되는 기점으로 마을사람들은 해마다 칠월 칠석날이 되면 용천제를 올렸다
[기획· 여수시 마을역사]⑬ 둔덕동 “문치마을은 길이 미끄럽다고 ‘민드래미재’라 불렀다”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⑬둔덕동
둔덕동은 북쪽의 호랑산과 남쪽의 고락산 사이에 위치해 여수와 순천을 잇는 국도 17호선의 일부인 좌수영로와 11호 광장 교차로에서 나뉘는 쌍봉로 주변에 형성됐다.
좌수영로는 옛 여천시의 봉계동, 여천군의 소라면과 율촌면을 거쳐 순천으로 이어지고 있다. 상암로와 연결되어 여수국가산업단지 및 자동차전용도로를 활용할 수 있다. 또 만성리 해수욕장과 돌산까지 연결되고 있다. 둔덕동은 주변 지역과 접근성이 아주 높은 교통의 요지이다.
동쪽 미평·만덕동, 서쪽 쌍봉·여천동, 남쪽은 문수동과 마주하고 있다. 북쪽에는 호랑산과 전봉산이 있다. 호랑산에서 비롯된 연등천이 미평동·연등동을 거쳐 남산동에서 바다로 흘러간다. 해발 고도 470m의 호랑산은 드러난 암반이 호랑이가 누워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시대 화랑들이 이 산에서 활동하였다 하여 ‘화랑산’이라 불렸다고 전해진다.
연등천은 호랑산 아래 이뤄진 용수 마을의 윗샘에서 시작돼 둔덕동과 미평·문수·오림·연등·남산동을 거쳐 흐른다. 유역 면적 17.31㎢, 물이 흐르는 길이 8.74cm, 하천의 길이는 4.86km로 흐르는 과정에서 침식과 퇴적이 반복되어 ‘S’자 모양을 띠는 자유 곡류 하천으로 뱀이 기어가는 모습을 닮은 사행천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된 『1872년 지방도』 가운데 순천 지도에는 전라좌수영성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있다.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에 연등교라는 다리가 그려져 있다.
여수에 상수도가 처음 공급된 것은 1928년 2월 28일 여수면의 봉화산 아래에 있던 태성동 또는 복성동으로 불렸던 마을의 10여 채 집을 이주시켰다. 수원지 만드는 공사를 시작하여 13만4000t의 물을 담아 하루 1000t씩 공급하는 미평 제1수원지가 1930년 3월 31일 완공된 다음부터이다.
둔덕동이라는 땅이름은 지금의 국도 17호선 주변에 있는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에서 둔덕 삼거리를 거쳐 봉계동 대곡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둔덕재’라고 했던 고개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조선 시대에는 전라좌수영으로부터 10리 거리에 있어 ‘왕십리’라 했던 용수 마을 중심으로 옛 미평철교 북쪽 건너에 있었던 문치 마을과 두 마을의 남쪽에 큰 돌다리가 있었다는 석교마을, 용수의 남쪽이며 문치의 동쪽에 있던 신죽리 일부가 합쳐 1953년에 생겨난 행정 지명이다.
문치마을은 좌수영로에서 쌍봉로로 나뉘어 둔덕동과 시전동을 잇는 길목에 있다. 예로부터 둔덕과 쌍봉을 연결하는 고개가 암반으로 이루어져 물이 흐르면 매우 미끄러웠기 때문에 ‘민드래미재’라 불렀던 곳이다. 옛날 서당이 있어 문치 마을로 불렀다.
용수 마을은 그 위에 있는 호랑산 자락의 용바위에서 솟는 윗샘인 용천에서 땅이름이 비롯됐다. 이 샘이 연등천이 시작되는 기점이 된다.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칠월 칠석날이 되면 마을의 안녕과 발전을 비는 용천제를 올렸다.
둔덕동은 북쪽의 호랑산과 남쪽의 고락산을 끼고 있어 자연환경과 여수시와 외곽으로 연결되는 도로 교통의 발달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주민의 약 87%가 공동주택에서 생활하는 집단 주거 지역으로 변했다. 1975년 남해화학 사택, 1984년 둔덕주공아파트 420세대, 1990년 중앙하이츠 915세대, 1995년 한려아파트 1026세대가 형성돼 1980년부터 2000년까지 인구수는 약 8000여 명이 증가했다.
선사 시대 용수 마을 고인돌
디지털여수문화대전에 등록된 둔덕동 용수 마을 고인돌은 5곳에 나뉘어 분포하고 있다. 편의상 ‘가’군은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에서 둔덕 삼거리 방향으로 가다 보면 주유소가 있다. 주유소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10m 정도 내려가다 왼쪽의 비탈진 밭에 2기가 있다.
‘나’군은 용수 마을로 들어가는 대나무밭에 있다. ‘다’군은 둔덕 삼거리에서 상암로를 따라 여수국가산업단지 방향으로 20m 정도 가다 보면 길 왼쪽으로 둔덕교회가 보인다. 고인돌은 교회 앞과 오른쪽의 소나무 숲 사이에 40여 기가 떼를 이루고 있다.
‘라’군은 용수 마을 고인돌 ‘가’군에서 남해화학 사택 방향으로 1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는 오른쪽 식당의 정원에 5기의 고인돌이 위치한다. 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비탈진 밭이었다. 현재는 민가로 이용되고 있다.
‘마’군은 용수 마을과 여도아파트 사이에 있는 길을 따라 20m 정도 가면 용수 마을의 쉼터가 있다. 고인돌은 쉼터의 아래에 있는 밭에 17기가 위치했었다. 하지만 둔덕동 개발 과정에서 많은 고인돌이 훼손됐다.
여수 둔덕-낙포 간 도로 확장·포장 공사 구간 내에 포함됐던 둔덕동 고인돌은 2000년 순천대학교박물관에서 고인돌의 덮개돌로 추정되는 22기를 발굴, 조사했다. 고인돌은 일정한 공간에 몰려 있지 않고 등고선과 나란한 동-서 방향으로 드문드문 분포했다. 조사 결과 10기는 자연석으로 밝혀졌다. 나머지 12기는 덮개돌 아래의 하부구조가 확인되지 않았다.
삼국시대- 호랑산성
호랑산성은 이 산에서 신라 시대 화랑들이 활동하였다 하여 ‘화랑산성’이라 불러 산성 주위에 있는 굴을 ‘화랑굴’이라한다. 호랑산성은 호랑산 정상부에서 남서쪽 봉우리로 이어지고 있다. 평면 형태는 부정형으로 성의 북동쪽이 높고, 남서쪽으로 갈수록 낮아진다. 경사는 비교적 완만하고 바위가 없는 남서쪽과 서쪽, 남동쪽 일부는 성벽을 계속 연결하여 쌓았다.
총 둘레 454m의 성벽에서 가장 잘 남아 있는 벽의 높이가 약 160cm, 외벽이 무너진 뒷채움 돌의 높이는 180cm이다. 형태는 산봉우리를 둘러 쌓아 만들었다. 옆에서 본 모습이 테를 맨 모양 같고, 시루에 번을 바른 것 같아서 시루메, 퇴뫼, 테메라 부르는 산정식이다.
내벽의 높이 약 140cm, 성곽의 너비는 5m이다. 무너져 있는 성벽의 너비는 약 30m에 달한다. 호랑 산성은 태뫼식이라는 점, 성벽을 돌로 한쪽만 쌓은 협축법, 성문을 설치한 위치 등으로 볼 때, 백제 산성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성벽의 아래쪽에 큰 돌을, 위쪽에 작은 성돌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일부 구간에서는 판판한 돌을 사용하여 쐐기돌을 박을 필요가 없도록 촘촘하게 쌓아 올리고 성벽을 거의 수직에 가깝게 쌓은 점이 백제 시대와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산성에서 주운 유물인 기와조각과 토기 등을 볼 때 사용 시기가 통일 신라 시대로 추정된다.
일제 강점기 사회 운동
3·1 운동 이후 경성방직과 같은 한국인 기업이 설립돼 미약하게나마 한국인 자본가 계층이 형성됐다. 1920년대 들어 회사령이 폐지되자, 일본 자본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진출하였다. 1923년 일본과 조선 사이에 관세가 대부분 철폐됨으로써 일본 상품이 대량으로 밀려들어 왔다.
따라서 한국인 자본가와 언론은 민족의 경제적 실력 양성을 주장하면서 한국인 자본의 보호와 육성을 대중에게 호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0년 조만식 등은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만들어 우리나라에 서 만든 물건으로 살아가기 위한 운동을 펼칠 것을 주장했다. 이어 1923년 서울에 조선물산장려회가 조직되면서 물산장려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졌다.
지방에서도 자작회, 토산장려회 등 단체들이 조직되어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으로’ 등의 구호를 앞세우며 토산품 애용, 근검저축, 금주·단연 등을 실천하자고 주장했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탈에 대항하여 일어난 전국적인 물산장려 운동은 여수에서도 전개됐다. 둔덕동은 가까운 미평과 함께 만든 미평과 왕십리 청년회가 중심이 되었다. 주요 활동은 물산장려, 소비 절약, 술을 끊는 것 등이었다.
이들이 일제에 저항했던 다양한 방법 가운데 우리나라 항일 운동 방법의 변화에 맞춰 당시 가장 중점을 둔 활동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물건을 사용하기와 물산장려를 위한 금주였다.
한편 둔덕동은 지리적 조건이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 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도로를 고치기도 했다. 남철이 철도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 지역에 있던 소나무를 벤 일에 대해 저항하기도 했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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