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천은 웅동·웅서·웅남·모전·송현마을로 1914년 하나로 합쳐
1942년 1구 서촌과 남촌, 2구 중촌과 모전, 3구 송현 마을로
시전동, 시목·기전·선소 가운데 시목과 기전에서 따온 이름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웅천지구 택지개발사업은 2004년부터 2014년까자 2.8㎢면적의 택지를 개발했던 사업이다. (사진=여수시)
▲웅천지구 택지개발사업은 2004년부터 2014년까자 2.8㎢면적의 택지를 개발했던 사업이다. (사진=여수시)

⑯시전동

시전동은 옛 여천시에 포함됐던 행정구역으로 동쪽의 고락산과 남쪽의 망마산, 북쪽의 비봉산 사이에 있는 시전 분지와 고락산과 남쪽 구봉산으로 둘러 싸인 웅천 분지가 있다. 구봉산에서 물줄기가 시작된 고음천이 가막만으로 흐르고 있다.

시전동은 1977년부터 시작된 여천공단 배후도시 건설을 위한 택지조성 사업 이후 지형이 크게 변화됐다. 1단계 1공구에 신기 지역에 포함됐다. 1987년 신기동에 조성된 호남에틸렌 사택 부지조성, 1990년부터 1991년까지 선소 지구가 개발됐다.

또 2004년부터 2016년까지 주거·문화·관광·위락 기능 등 함께 갖춘 도시를 만들기 위해 웅천지구 택지개발 사업이 이루어져 1단계 69만3000㎡, 2단계 121만5000㎡, 3단계 81만4000㎡ 총 272만2000㎡가 개발돼 기존에 있던 송현·모전·웅동·웅서·웅남의 자연 마을이 완전히 사라졌다.

시전동은 임진왜란 다섯 충신을 모신 오충사, 이순신 장군의 효성을 배울 수 있는 이충무공 어머니가 사시던 곳과 더불어 여수지역 문화·예술에 기여할 예울마루와 장도 근린공원 등이 조성됐다.

1897년 여수군이 새롭게 생기면서 여수군 여수면에 포함된 뒤, 1908년 여수면이 현내면과 쌍봉면으로 나뉘면서 쌍봉면 지역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 시전동은 자연 마을이었던 시목·기전·선소 가운데 시목과 기전에서 따온 이름이다. 기전 마을은 고락산 서쪽 기슭에, 시목은 평지였고, 선소는 망마산의 서북쪽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시목과 기전 마을은 여천공단 배후도시 건설을 위한 택지조성 지구에 들어가 1981년 3월 21일 2가구의 철거를 시작으로 1990년 10월 13일 두 마을이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도시가 형성됐다.

▲시전동 시목마을 (사진=여수시)
▲시전동 시목마을 (사진=여수시)

시목 마을은 감나무가 많아 ‘감나무골’, ‘강냉골’, ‘감골’ 등으로 불렀다. 기전 마을은 ‘터 앞’이라 부르고 ‘基前’으로 표기했으나 다시 한자를 ‘밭 전田’으로 바꿔 ‘들몰’이라고도 불렀다. 웅천동은 성주산과 대인산, 망마산이 동·남·북쪽을 에워싸고 있는 지형에 맞춰 산자락을 따라 민가들이 몰려 있어 가운데는 평야 지대로 서쪽의 가막만을 마주하고 있었다.

평야 지역 중간 부분에는 1.4km의 고음천이 구불구불 흐르고, 웅남에서 송현 남쪽에 이르는 2.6km의 해안선에는 2개의 선착장이 있었다. 장도와 두력도 2개의 섬이 포함됐다. 웅천은 ‘고음천’, ‘고음내’, ‘곰쳉이’라 불렀다. 강이나 바닷가의 움푹 들어간 만복을 ‘구미’, ‘기미’ 등으로 불렀던 것을 한자 ‘금金’으로 표기한 뒤 다시 ‘곰’이나 ‘굼’으로 변하였다. 웅천의 바닷가가 선소 쪽으로 움푹 들어간 곳이기 때문에 ‘곰’에 해당하지만 한자에는 ‘곰’이 없어 ‘고음’으로 변하고, 곰의 한자 훈인 ‘곰웅’ 자를 빌려 쓴 땅 이름이다.

웅천동은 웅동·웅서·웅남·모전·송현 5개의 자연 마을로 이뤄졌다. 1914년 하나로 합쳐진 행정 단위가 됐다가 1942년 1구 서촌과 남촌, 2구 중촌과 모전, 3구 송현 마을로 나뉘었다. 1961년 다시 웅천으로 통합됐다. 1963년 다시 남·서·중촌이 웅천리로, 송현과 모전이 송전리로 합쳐졌다. 1986년 여천 시가 생기면서 시전동, 1998년 통합 여수시의 행정동인 시전동에 속한 법정동 웅천동이 됐다.

▲여수시가 추진했던 웅천지구 택지개발은 당초 계획에서 벗어나 무분별한 건축물의 인.허가로 인해 도시계확이 무너지면서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위 사진은 당초 택지개발 조감도)
▲여수시가 추진했던 웅천지구 택지개발은 당초 계획에서 벗어나 무분별한 건축물의 인.허가로 인해 도시계확이 무너지면서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위 사진은 당초 택지개발 조감도)

1990년대 초반 여수국가산업단지 확장에 따라 더 많은 배후 주거단지가 필요함에 따라 웅천지구 택지개발이 계획됐다. 2004년부터 2016년까지 본격적인 택지개발 사업이 이루어져 전체 272만 2000㎡가 개발됐다. 웅천 택지개발 사업은 1~3단계 지역으로 나눠 추진됐다.

1단계 지역인 웅남 마을은 2010년 11월 마무리됐다. 2단계 지역은 228세대 1057명이 살고 있던 웅동·웅서·모전 마을이다. 3단계 지역인 송현 마을은 이순신공원을 중심으로 개발됐다. 2020년 12월 말 기준 시전동의 인구는 1만4160세대로 총 3만7706명이 거주하고 있는 여수에서 가구와 인구수가 가장많은 행정동이다.

웅천지구가 본격적으로 개발되는 과정에서 2009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유적에 대한 시굴 조사가 있었다. 뚜껑접시·굽다리접시·무늬를 두드려 넣은 토기 등이 확인돼 2011년 2월 21일부터 같은 해 7월 30일까지 100일 동안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조사 지역은 웅천동 일원으로 고락산과 망마산을 중심으로 해발고도 15~45m 내외의 낮은 구릉과 산비탈에 해당했다. 남서쪽으로 가막만과 마주한 곳에 있었다.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 지역 주변은 밭농사 중심으로 일부에서는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 웅천동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고인돌 유적은 계곡으로부터 흘러나온 평지와 낮은 구릉이 발달한 평야 지대에 주로 분포하고 있었다. 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덮개돌은 웅동 3기, 모전 5기, 송현 유적 4기로 모두 12기였다. 평면과 단면 형태는 다양하게 확인됐다. 대부분 괴석형으로 규모는 86X64X22cm부터 310X260X58cm, 무게도 최소 0.2t에서 최대 10t까지 확인됐다.

웅천동 고인들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37점이다. 지표면에서 주운 것은 굽다리접시 2점, 납작바닥짧은 목항아리 1점, 쇠손칼 4점이다. 지표면에서 주운 4점을 제외한 33점은 무늬없는 토기가 25점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돌도끼 2점, 돌칼 1점, 돌화살촉 3점, 붉은색 안료를 발라 윤기가 나도록 간 토기 2점으로 모두 8점이다. 웅천동 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 땅에 수직으로 직사각형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묻은 길이 242cm, 너비 90cm, 깊이 32~59cm로 중간 정도의 크기의 널무덤 1기가 확인됐다.

일반적인 널무덤에 비해 규모가 작고, 무덤방의 깊이가 얕고, 바닥면을 얇은 두께로 반반하게 골라 나무로 짠 관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이 널무덤의 바닥면 중앙부에서 가는놋단검 1점이 출토됐다. 칼의 뾰족한 끝부분이 남쪽을 향한 채 1점이 완전한 모습이었는데, 위쪽 부분이 반쯤 부러진 채 출토된 것으로 보아 매장의례의 행위로 추정된다. 전체 길이 34.2cm로 큰 편에 속한다. 남아 있는 몸체 원화 길이는 31.4cm, 최대 너비는 3.8cm, 칼날 두께는 1.2cm이다. 비파형동검이 많이 출토됐던 여수시에서는 처음 발견된 가는놋단검이다.

▲예울마루 인근의 고인돌 유적. (사진=뉴스탑전남)
▲예울마루 인근의 고인돌 유적. (사진=뉴스탑전남)

● 삼국 시대

웅천동 웅서·웅동·모전·송현 유적에서 삼국 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알려 주는 주거지와 무덤 등 실마리가 되는 유구로는 웅동 널무덤 1기와 웅서·웅동·모전에서 주거지 9동이 확인돼 모두 10기의 유구가 확인됐다.

웅서 유적에서는 구릉의 끝부분에서 삼국 시대 주거지 1동이 확인되었는데, 긴축 방향은 북서-남동으로 등고선과 평행하며, 평면은 타원형으로 추정됐다. 주거지 내부에는 화덕자리·벽도랑·물을 모으고 빠져나게 한 집수공·원형 움이 확인됐다. 화덕자리는 부뚜막 식으로 솥 받침으로 석재 1매를 배치해 시설했다.

출토 유물은 모두 5점으로 그릇의 종류를 파악할 수 있는 유물은 3점으로 바리모양 토기와 시루이다. 시루는 2점이 출토됐다. 1점은 둥근 바닥에 작고 둥근 구멍을 불규칙하게 뚫은것과 새끼줄 모양의 무늬를 교차해 두드려 넣고, 곧은 입과 몸체부 중간에 위를 잘라낸 듯한 모양의 손잡이를 붙인 시루 1점이다.

여수·순천·광양 지역에는 소가야계 묘제와 유물이 넓게 퍼져 있어 대가야의 정치적 영향력이 미치기 전에 일시적으로 전남 동부 지역이 소가야 연맹체에 속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주거지는 해발고도 21~23m 지점에서 확인되었으나, 후대에 조성된 유구 등으로 일부 교란되거나 파괴됐다. 지형은 북고남저형으로 채광과 보온이 유리한 남향으로 자리 잡았다.

주거지의 평면 형태는 원형·사각형·네모서리를 약간 중인 말각방형으로 서로 다음 형태를 띤다. 출토된 유물은 바리모양 토기·뚜껑접시·굽다리접시 등 다양하게 24점이 출토됐다.

▲여수 웅천 고인돌 유적. (사진=뉴스탑전남)
▲여수 웅천 고인돌 유적. (사진=뉴스탑전남)

웅천동 웅서·웅동·모전 유적의 유구에서 출토된 유물은 백제계와 가야계가 함께 나타나고 있어 이때의 전남 동부 지역은 백제의 영향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백제로의 완전 편입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가야의 문화요소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야계 유물 중에서도 대부분 소가야계 유물이 확인되는 것과 관련하여 소가야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서남부 가야연맹체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도 있다. 웅천동의 고인돌 유적은 월내 상촌 및 상적 고인돌과 함께 2011년 교육과 홍보용 자료로 활용하기 위하여 예울마루 야외 주차장과 웅천지웰 2차아파트 사이에 있는 여수 문화예술공원 내 고인 돌공원으로 이전, 복원했다.

▲1995년 4월 20일 국가사적 제392호로 지정된 여수 선소. 
▲1995년 4월 20일 국가사적 제392호로 지정된 여수 선소. 

● 선소

우리나라 바닷가에 많은 땅이름이며, 한자로는 주로 ‘선소’라고 쓴다. 1760년 간행된 『여지도서』에 “장생포는 순천부 동쪽 60리에 있으며, 본부의 전선이 닻을 내리고 머무는 곳이다”고 기록됐다. 또 『순천부 지도』에 지금의 선소자리에 ‘선소’라는 표시가 있어 이곳이 순천부 선소였던 것을 알 수 있다.

18세기 중엽 제작된 『비변사인 방안지도』에 선소를 ‘본관 선소’라 표기하고 있어 순천부에서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일부 군사 요충지와 전국의 군현을 총 6책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식 지도책인 『지승』에도 선소가 표기되어 있다. 19세기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 하는 『호남도서』에 ‘순천 선소’라고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장군이 왕께 올린 장계가 포함됐다. 순천부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있어 시전동 선소에서 거북선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시전동 선소에는 배를 피항시키거나 긴급히 출항하기 위하여 인공적으로 만든 구조물인 굴강이 있다. 직경 40m 내외의 원형으로 깊이는 석축 상면에서 5~6m 정도로 추정된다.

굴강 북쪽 입구는 폭이 약 9m로 둘레에 쌓아졌던 석축은 대부분 사라졌다. 굴강 내 부의 한 곳과 입구 동서 양쪽에 노출된 하부에 남아 있는 석축은 굴강 석축의 바닥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높이는 1m이다.

석축에 사용된 돌의 크기는 일정치 않으나 대개 40~50cm의 자연석과 깬돌을 사용했다. 쌓는 방법은 자연석을 막쌓기로 뒤채움은 특별히 보강한 흔적이 없으며 석축 후 남은 돌과 흙을 같이 채운 듯하다. 선소는 1995년 4월 20일 국가사적 제392호로 지정됐다. 그 과정에서 굴강을 복원했다. 굴강 주변 도로에는 풀무간이 복원됐다.

풀뭇간을 지나 바닷가 쪽으로 가면 군기고와 세검정 건물 2동이 있다. 세검정은 임란 당시 수군과 관련된 건물이 이후 보수 또는 새롭게 만들면서 ‘세검정’으로 이름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수시 문화유산 1호인 이 충무공 어머님께서 사시던 곳. (사진=뉴스탑전남)

● 이순신 장군의 어머님께서 사시던 곳

웅천동 송현 마을은 옛날 ‘고음천’ 또는 ‘솔고개’라고 불렀다. 송현 마을은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이 충남 아산에 계시던 어머니 변씨와 아내 방 씨 등 가족을 백의종군하기까지 5년 동안 모시고 어머님께 효성을 다하던 곳이다.

충무공의 어머니 초계변씨는 충무공이 8세 때, 살림살이가 가난해 아산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면서 살다가 69세에 남편을 여의고, 78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충청도가 위협을 당하자 효성이 지극한 이충무공은 어머니 변씨 부인과 아내 방 씨 등 가족들을 전라좌수영 내 송현 마을에 모셨다.

여수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효행을 널리 알리고 후손들이 본받기를 바라며 충무공의 어머니 변씨 부인 등이 살았던 집인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을 2013년 여수시 문화유산 1호로 지정했다. 주변을 면적 1만7064㎡로 자당공원을 꾸몄다. 안내판과 함께 이충무공사모비와 이충무공모부인 초계변씨유적비가 있다.

▲여수시 문화유산 제2호로 지정된 오충사. 
▲여수시 문화유산 제2호로 지정된 오충사. 

● 오충사

임진왜란 때 순천도호부 관내 고음천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던 창원정씨의 후예들은 1593년 5, 6월부터 1597년 4월 초까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 초계변씨와 친족들과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살면서 피난 생활을 도와줬다.

정철과 린 형제 및 사촌 동생 춘·조카 대수는 임진왜란 초기부터 스스로 충무공의 지휘 아래에 들어가 의병 활동을 통해 큰 공을 세움으로써 선무원종공신록에 등재된 임란 해전의 공신들이었다. 당시 철은 수문장, 춘은 판관, 대수는 부장 신분으로 모두 1등 공신에 올랐다. 린 역시 부장으로 2등 공신에 등재됐다.

따라서 정씨 사충 이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생겨났다. 이충무공과 함께 임진왜란 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공헌하여 이순신 장군을 포함한 ‘다섯 충신’을 기리는 오충사가 만들어지게 됐다. 1847년 전라도 유림들이 임금께 올린 글에 따라 지금의 여천고등학교 아래에 있던 가곡동 마을에 사충사가 건립되었으나 1868년 사원 철폐령으로 인해 20여 년 만에 헐리고 말았다.

1869년 후손들에 의해 ‘사충사유허비’가 세워졌다. 1927년 창원정씨 후손들과 이충무공 직계 후손들이 서로 합의해 웅천동 중촌 마을에 오충사를 건립, 충무공을 주향으로 하고, 사충신을 배향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6년 한 차례의 중건이 이루어졌다. 2014년 여수시 문화유산 제2호로 지정돼 주변은 ‘오충사사적공원’으로 조성됐다. 봄 음력 3월 16일과 가을음력 9월 16일 두 차례 ‘석채례’가 열린다. 향교와 삼황묘에서 지내는 ‘석전’은 “다 차려 놓는다”는 뜻으로 굉장히 화려한 반면, ‘석채’는 ‘단조로운 차림’을 의미해 주로 충신 들을 모신 사당에서 치르는 의례이다.

2021년 8월 5일 오충사·정대수 비·이순신 자당 기거지는 모두 임진왜란과 관련되어 있어 세 유적을 하나로 묶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95호로 지정했다.

● 장도 근린공원

웅천동에 속한 장도는 100m 이내의 완만한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졌다. 2019년 5월 10일 GS칼텍스의 지역사회 공헌사업을 통해 ‘예술의 섬, 장도근린공원’이 조성돼 개방됐다. 썰물 때만 드러나는 장도와 웅천친수공원 사이 335m의 다리를 통해 걸어 들어갈 수 있다. 섬 내부에는 예술가들의 작업 공간인 조각·회화·문예와 같은 창작 스튜디오가 있다.

● 이순신공원과 도서관

▲이순신공원 여수항일독립운동기념탑. (사진=뉴스탑전남)
▲이순신공원 여수항일독립운동기념탑. (사진=뉴스탑전남)

이순신공원은 웅천지구 택지개발 사업으로 인해 생긴 면적 36만 4379㎡의 터에 2016년 준공된 공원이다. 공원 내 설치된 ‘여수 항일운동기념탑’은 일제강점기 3·1운동을 비롯해 항일 운동에 앞장섰던 여수지역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조형물로 ‘불멸의 기상’이라는 주제를 활용해 승리를 뜻하는 영문 ‘Victory’의 ‘V’와 독립운동의 ‘만세’, 여수반도의 지형적 특징을 상징하는 ‘나비’ 세 가지 의미를 담아 17m 높이로 세워졌다.

이순신도서관은 2019년 12월 27일 개관식을 하고 본격 운영에 들어갔다. 도서관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는 호국 충절의 도시 여수를 표현하고 있다. 1층에는 도서관과 기록관, 박물관의 기능을 합친 ‘이순신 라키비움’이 자리 잡고 있다.

2층에는 코딩로봇과 3D프린터, 디지털 아쿠아리움이 있다. 3층에는 일반 자료실과 이순신 장군 관련 자료를 한데 모아놓은 ‘이순신아카이브’를 만날 수 있다. 4층에는 학습실과 그룹 토의실이 자리하고 있다. 전남 동부권에서 가장 큰 도서관으로 전체 면적 5622㎡에 이른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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