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리는 안심산에서 여수군이 만들어지기 이전 소라포면과 이후 덕안면에 속했던 장성마을이 포함된 행정리
소호리는 1914년 소제리의 ‘소’와 항호리의 ‘호’가 합쳐진 행정리
1897년 현내면, 1902년 쌍봉면의 학용리는 학동·용기·건천과 같은 자연 마을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1980년대 개발전 구 여천시와 여수국가산업단지 배후도실 설계된 3여통합 이후 여수시. (사진=여수시)

⑮쌍봉동

쌍봉동은 무선산·안심산·망마산이 둘러싼 분지 지형으로 바닷가로 이어지는 중앙 지역에는 평지와 바다를 메운 매립지가 많다.

쌍봉동의 지형이 가장 크게 변하게 된 것은 1977년 여천 배후도시 건설을 위한 택지조성 사업 때문이다. 1977년 10월 11일 전남고시 제38호에 따라 학용·용기·기전·시목·도원·사벽·가곡·무선·화장의 9개 자연 마을이 포함됐다. 1992년 2월까지 15년 동안 총면적 2352만8226.9㎡의 택지가 조성됐다.

1967년 여천공단이 형성돼 배후도시가 만들어질 공간으로 지정됐다. 1976년 9월 6일 전라남도 여천지구출장소가 생기면서 그 관할로 들어갔다가 1986년 1월 1일 여천시로 승격되자 시청이 위치한 곳이 되었다. 법정동인 쌍봉·안산·소호동을 거느린 행정동이 되어 1987년 화양면 용주리 송소마을을 받아들였다.

학용리 학동, 용기, 건천

안산리 심곡, 덕안면에서 들어온 장성

소호리 소제, 덕안면에서 들어온 항호

학용리는 1912년 『지방행정구역일람』 의 쌍봉면 40개 리 가운데 용기리와 학동리가 합쳐 만들어진 행정구역이다. 학동과 용기 마을은 고려 시대 특수 행정구역에 속하는 조수소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 군사를 훈련시켰다는 ‘영터’와 그곳에서 정기 시장이 열렸기 때문에 ‘장터’라고도 불린 군사·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1926년 쌍봉면사무소가 옮겨온 뒤 면 행정의 중심지가 됐다.

안산리는 뒤에 있는 안심산에서 비롯됐다. 1914년 안심산 계곡 깊숙이 자리잡은 심곡 마을과 여수군이 만들어지기 이전 소라포면과 이후 덕안면에 속했던 장성 마을이 포힘된 행정리이며, 여수 마을도 있었지만 만들어진 시기가 짧고 택지조성 사업으로 철거됐다.

소호리는 덕안면에 속했던 항호리와 소제리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쌍봉 면에 들어오면서 소제리의 ‘소’와 항호리의 ‘호’자를 합해 만든 땅 이름이다. 전통적으로 반농반어적 성격을 지녔던 쌍봉동의 주민 구성은 여천공단이 형성돼 새로운 도시 건설을 위한 계획 수립 및 전개 과정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녔다. 주거 기능은 대부분 단독 주택이 맡았다. 안산동과 소호동에 주거 기능이 집중됐다. 여수국가산업단지에 입주한 GS칼텍스·LG화학·한화케미칼·대림산업 등 공장 노동자를 위한 사택과 대규모의 공동 주택이 형성됐다.

1970년 당시 중심 산업은 농업으로 1977년부터 새로운 시가지 개발이 시작되었지만 1981년까지 쌍봉동의 인구는 소호동> 안산동 > 학용동 순으로 분포됐다. 하지만 1980년 전라남도 여천지구출장소 청사가 완공되자 학용리 중심으로 금융기관, 시장과 상가 등 도시 기반이 형성됐다.

▲고락산에서 바라본 쌍봉동, 시전동 전경. (사진=여수시)

1985년 학동의 인구는 963%가 증가했다. 학동의 인구 변화는 공단에 입주한 기업들의 사택과 단독 주택을 비롯해 아파트 건설에 영향을 끼쳤다. 쌍봉동은 여천공단 배후도시의 중심지로 개발되면서 가장 많은 변화를 가져온 지역이다. 1897년 현내면, 1902년 쌍봉면에 속한 학용리에는 학동·용기·건천과 같은 자연 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안심산에서 비롯된 땅 이름인 안산동의 동쪽에는 장성마을이, 안심산 북쪽 산자락에여수와 심곡 마을이 있었다. 여수와 장성 마을은 택지 지구로 조성돼 아파트·사택 지구·상가 지역이 되었다. 심곡 마을은 주택지로 바뀌었다. 소호동은 여수국가산업단지 건설에 따른 택지조성 사업으로 1990년 대기업의 사택 단지를 비롯해 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 주거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1992년 조성된 거북선공원은 도심 중앙에 위치에 시민들의 도심 속 휴식 공간으로 이용 되고있다. (사진=여수시)
▲1992년 조성된 거북선공원은 도심 중앙에 위치에 시민들의 도심 속 휴식 공간으로 이용 되고있다. (사진=여수시)

● 거북선공원 고인돌

거북선공원은 올림픽이 열렸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89년 학동 8900여 평의 땅에 거북선 모양의 호수를 만들었다. 그 안에 분수를 설치해 독특한 조형미와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 시민들의 도심 속 휴식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또 공원은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들이 출토돼 당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적량동 상적 마을과 평여동 산본에서 발굴됨으로써 사라질 뻔한 고인돌을 복원해 역사 학습장을 만들었다.

1989년 1월 4일부터 3월 7일까지 발굴된 적량동 상적 마을 GS칼텍스 정유공장 확장공사 터에 있었던 고인돌 14기 가운데 4기에서만 무덤방이 확인됐다. 그나마 7호만 완전하고 나머지는 파괴된 상태였다. 고인돌 주위에서 무덤방 26기가 떼로 발견됐다. 이들은 판판한 돌로 짜 맞춘 돌널무덤 3기, 깬 돌로 쌓거나 세운 돌덧널무덤이 23기였다. 출토 유물은 비파형 동검 7점, 비파형 청동창 1점, 대롱옥 5점, 제 모습을 갖춘 돌 칼 1점, 턱자귀 1점, 옥을 가는 돌 1점 이외에 무늬없는 토기 조각과 붉은간 토기 조각 등이다.

7호 고인돌 무덤방 바닥에서 완전한 형태의 비파형 동검이 1점 발견돼 우리나라 청동기 유물 가운데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1989년 7월 24일부터 9월 13일까지 평여동 산본 마을 제일모직 여수 공장 터에 있었던 고인돌이 발굴됐다. 3곳에 21기가 분포되어 있어 가·나·다로 지역을 나누어 진행됐다. ‘가’ 지구 고인돌의 무덤방 형식은 2호만 돌돌림형으로 나머지는 돌덧널형으로 출토 유물은 소옥 2점과 홈자귀 3점, 돌화살촉 1점, 그리고 무늬없는 토기 조각 등이 있다.

‘나’ 떼에서는 덮개돌 9기 중 8기를 조사했다. 2호와 3호는 간단한 무덤방을, 4호는 깬돌과 장대석을 이용해 쌓은 돌덧널형이었다. 2호 서쪽 바닥에서 청동기 1점, 4호 바닥에서 소형 관옥 2점이 출토됐다. ‘다’ 떼는 모두 8기가 조사됐다. 7기의 무덤방은 돌덧널형 무덤방으로 대부분 뚜껑 돌을 덮었다. 바닥에는 잔자갈을 전면에 깐 것, 편평한 돌을 1개 놓기도 하였다. 둘레돌이 있는 것 가운데 3호와 6호는 판판한 돌 조각을 타원형으로 세워 경계를 구분한 것이 특이했다.

출토 유물은 청동기와 석기류 등은 없고 옥류와 무늬 없는 토기 조각뿐이었다. 특히 3호에서 대롱옥 105점과 둥근옥 2점이 발견돼 다른 고인돌과 달리 옥이 부장품으로 사용되고 있는 점은 고인돌과 청동기시대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여수동동북축제는 유탁 장군을 널리 알리기 위한 축제다. (사진=여수시)
▲여수동동북축제는 유탁 장군을 널리 알리기 위한 축제다. (사진=여수시)

● 유탁 장군의 장생포 대첩

고려와 원나라는 연합군을 편성해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였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이는 일본 정국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짐으로써 통제력이 미치지 않은 지방에는 떠돌이 무사들이나 해적들이 날뛰게 됐다.

고려를 침략한 이들은 ‘왜구’, ‘왜노’, ‘해적’으로 표현됐다. 이들은 일본 막부 정권의 통제 밖에 있던 집단이었다. 이들은 쓰시마 섬·이키시마·마쓰우라·시모노세키 등에 거점을 두고 우리나라와 중국 연안을 빈번하게 침략하여 약탈 행위를 일삼았다. 왜구는 사회적 불안에 따라 우발적으로 형성되었지만, 점차 상당수의 배와 전투 능력을 갖춘 해적 집단으로 변모했다. 고려를 침략한 왜구는 크게 400여 척, 작게는 20여 척의 배를 이용했다. 고려 시대 왜구가 침략해 온 것은 1350년 2월부터이다

여수는 고려 시대 순천의 속현 때문에 순천과 관련된 자료를 활용하여 왜구의 침입 상황을 추정할 수 있었다. 전라도 지역은 45회, 순천 지역은 15회로 추정할 수 있다. 여수는 동남쪽의 광양만과 북서쪽의 여자만이 있어 왜구들이 순천 지역으로 침입해 오는 길목에 해당했다. 왜구의 침입에 대해 고려 정부와 여수 지역 주민들의 대응 관계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자료로 유탁 장군의 장생포대첩을 들 수 있다.

옛날에는 안산동 장성 마을 앞바다를 ‘장생포’라 했다. 이 바다에서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물리쳐 승리를 축하하는 노래인 고려 가요 ‘동동’이 만들어진 곳이다. 고려 말 무신이었던 유탁의 시호는 충정으로 본관은 고흥으로 1311년 충선왕 3년에 태어나 1352년 공민왕 원년 전라도만 호수가 되어 병사들과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하며 군기를 엄정히 하였다.

유탁 장군은 1352년 현재 안산동 장성 마을까지 왜구가 쳐들어오자 이를 물리쳤다. 이를 기리기 위해 군사들이 고려 가요 ‘동동’을 지어 불렀다. 유탁은 위엄이 있으면서 자비심을 지니고 있었는데, 왜구들이 순천부 장생포에 쳐들어 왔다가 그를 보고 바람처럼 도망쳐 버렸다. 이 모습을 본 우리 군사들이 기뻐하며 이 노래, 즉 ‘동동’을 지었다. 장군은 왜구들 사이에서도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으로 『증보문헌비고』에는 유탁 장군의 기록이 남아 있어 장생포대첩의 내용을 알 수 있다.

▲쌍봉주민센터 뒤에 있는 정철 장군의 묘소. (사진=거북선 여수)

● 임진왜란과 정철 장군

정철 장군의 살아 있을 때 이름은 철이며 자는 사명, 호는 청은이다. 1585년 무과에 급제해 처음에는 수문장을 하였다. 이충무공이 정철과 그의 조카 정대수를 청하여 집안일을 부탁하자, 정대수가 그의 집 방 한 칸을 비우고, 받들어 지내게 해줌으로써 집안끼리 친하게 됐다.

 그해 4월 왜구가 대대적으로 밀고 들어와 여러 고을이 휩쓸려 함락되었다. 각 진이 무너지자 정철은 아우 린과 사촌 동생 춘, 조카 대수와 더불어 손잡고 통곡하며 “나랏일이 이 지경인데 신하된 우리가 한 번 죽는다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고 말했다. 정씨 일가는 집안의 재산을 풀어 의병을 모은 뒤, 전라좌수영에 충무공을 찾아가 의병을 일으킨 사실을 전했다. 이충무공은 “그대 집안에는 어찌 그리 의사들이 많은가? 지금 작전을 시작하려는데, 그대들도 함께 가겠는가?” 하였다. 그는 “원하옵건대 한 부대를 주신다면 제가 선봉이 되어 앞장서겠다”고 대답했다.

마침내 우위장이 되어 정운, 송희립 등과 더불어 명령을 받고 지금의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에 이르렀을 때 적의 배 무리와 마주쳤다. 왜적은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그 기세가 대단히 강했다. 그는 병사들보다 앞서 위험을 무릅쓰고 돌진해 적의 선봉을 꺾고 7명의 목을 베었다. 또 배 2척을 빼앗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충무공이 곧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자 임금은 공에게 초계군수 벼슬을 직접 내렸다. 1593년 진주에 남아 있던 왜적이 사방으로 흩어져 백성들을 노략질하므로 충무공은 그를 별장으로 삼아 순천부사 김언공과 함께 왜적을 토벌하게 했다.

진주 제석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 왜적이 산 위에 진을 치고 포탄을 비 오듯 쏘았다. 우리 군사가 놀라 겁내며 감히 대항하지 못하자 정철이 칼을 뽑아 들고 군중들에게 “후퇴하는 자는 내가 목을 벨 것이다.”고 말했다. 전세를 감당할 수가 없게 되어 김언공은 먼저 후퇴하고, 그는 고군분투하였으나 포위된 지 이틀 동안 죽는 사람이 잇따라 나왔을 때, 홍의장군 곽재우가 경남 합천에 있다가 급한 보고를 받고, 한밤을 틈타 구원하러 옴으로써 왜적을 크게 물리쳤다.

싸울 때 다친 상처가 심하여 집으로 돌아와 반년 동안 치료하여 겨우 낫자 다시 통영에 있던 이순신 장군의 지휘를 받았다. 1862년 전라도 유림에서 상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이듬해 임진왜란 때 받았던 초계군수보다 높은 병조참판, 1866년 유림의 건의에 따라 병조판서의 벼슬과 ‘충절’의 시호가 내려졌다. 현재 묘소는 쌍봉동주민센터 뒤에 있다.

● 근린공원

여수시청 남쪽의 낮은 야산에 있는 용기공원은 1977년 여천공단 배후도시를 만들기 위한 택지를 조성할 때 면적 6만5810㎡를 공원 지역으로 고시한 뒤, 1989년에 공원을 만들었다. 산책로와 야외 공연장, 옥외용 벤치 등이 있다. 공연장 앞에는 야생화 단지와 공원 정상에는 기와집 정자인 ‘만월정’이 있다.

용기공원에서는 고려 말 이 지역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친 유탁 장군의 장생포 대첩과 고려 가요 ‘동동’이 만들어진 것을 기리기 위해 ‘동동북축제’를 열고 있다. 안산동 장성 마을의 공원 역할을 하던 곳이 택지로 개발돼 2000년 9월 공원지구로 지정돼  조성됐다. 처음에는 안산제2공원으로 지정됐으나 장성 마을의 역사가 고려 가요 ‘동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그 뜻을 살리기 위하여 이름을 바꾸었다.

여수시 소호동 동동다리. (사진=여수시 제공)
▲여수 소호동 동동다리. (사진=여수시)

소호동동다리는 바다 위에 742m 데크로 만들어진 산책로이다. 여수시는 소호 지구 연안 정비사업의 하나로 2013년 6월 14일 공사를 시작해 2016년 7월 31일 경관 조명과 설치 사업을 마쳤다. 고려 말 안산동 장성 마을 앞바다에 왜구가 침입한 것을 유탁 장군과 군사들이 물리치고 기뻐하며 부른 노래가 ‘장생포곡’이다. 이 노래에서 ‘동동’이 만들어졌다고 하여 이름을 ‘소호동동다리’로 정하였다.

● 소호요트장

소호요트장은 1986년 6월 3일 공사를 시작해 1987년 10월 14일 준공된 레저 시설이다. 우리나라 요트의 산실로 요트 부흥과 한국 요트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요트장이 있는 가막만은 청정해역일 뿐만 아니라 요트를 타기에 가장 적합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어 수상스키, 윈드서핑, 요트경주 등 수상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명소일 뿐만 아니라 종려나무 가로수와 조망이 좋은 포구가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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