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목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일본군을 물리쳐 '무슬목, 무실목'이라 불러
돌산현. 식산현.여산현 등 '섬 가운데 돌 많은 산이 많아서 돌산'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돌산도는 돌산현, 식산현, 여산현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사진=여수시)

돌산읍

돌산읍은 면적 71.6㎢의 섬으로 사람이 사는 돌산도·송도·금죽도를 비롯해 무인도 20개가 포함됐다. 해안선은 104km에 이른다. 위도상 온대 계절풍 기후 지역에 속해 뚜렷한 4계절과 겨울에도 따뜻한 기온 분포를 나타내고 있다.

돌산은 서쪽 가막만, 남쪽은 외해인 남해, 북쪽의 여수반도를 바라보는 도서였지만 1984년 돌산대교, 2012년 거북선대교로 여수와 연결됐다. 이러한 위치는 항구 발달에 유리해 천혜의 어장을 형성할 수 있는 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과거 공동 어장을 중심으로 한 연근해 어업과 최근 양식업의 증가는 돌산의 지리적 특성을 활용했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해 조선 시대에는 돌산의 지리적 위치를 활용하여 방답첨사진과 선소군사들의 생계를 위한 둔전이 형성됐다. 교통·통신 수단으로서 봉수는 한양까지 연결되는 직봉 가운데 제5거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돌산은 과거 여천군에 편입됐으나 1998년 4월 3려 통합에 의해 여수시에 속했다. 여수시·여천시·군은 오랜 역사 속에서 공통된 삶의 공간을 형성해 왔다. 또 가막만을 이용해 고흥 지역과 동쪽의 여수해만을 통해 경상남도 남해, 광양 지역과 교류가 활발했다.

봉황산·대미산·수죽산·천마산 등의 산세가 발달 돼 장년기 내지 노년기 지형을 나타낸다. 돌산은 큰 산이 없어 하천 발달이 미약하지만, 농업용으로 이용되는 하천은 죽포천·와룡천·돌산천 등이 있다. 죽포천은 돌산읍 덕곡치를 발원지로 동쪽으로 흐르다가 방죽포를 지나 남해로 흘러간다. 와룡천은 수죽산에서 비롯해 북쪽으로 흘러 무술목에서 여수만으로 흘러간다.

돌산읍에는 3개의 유인도와 20개의 무인도가 있어 다양한 해안 지형이 나타나고 있다. 파랑의 영향을 많이 받는 동쪽과 남쪽은 주로 해식애와 파식대 같은 해안 침식 지형이 발달하고 서쪽은 조류의 영향으로 갯벌이 나타난다.

▲1872년 제작된 순천방답진 지도. (사진=여수시)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 아래 삽평군이 있었고, 삽평군에 원촌현·마로현·돌산현이 소속됐다고 기록됐다. ‘돌산’이라는 땅이름이 백제 시대부터 사용됐다. 이후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도 고려사를 따르고 있다. 1899년 당시 돌산 군수였던 서병수가 편찬한 『돌산군읍지』에는 이천서씨 집안에 전해 오는 기록을 바탕으로 돌산의 백제 시대 이름이 ‘식산현’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승평지』와 『전라좌수영 구지』에 따르면 돌산현으로 기록된 사례를 들어 "문헌의 고증이 있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식산현이라는 땅이름에 의구심을 나타냈다. 1978년 작성된 호구총수 여수면 상도에 우두려·굴전리·둔전려·죽포려·서의동·역기동·두모포·율포리·성두리·작구미·역전·검단려·태성암이 포함됐다. 하도에 방답진 동문내리·서문내리·서문외리·남문내리가 있다고 기록됐다.

여천군의 쌍봉면 지역에 형성된 여수국가산업단지 배후도시가 1986년 여천시로 승격 됨으로써 여수시·여천군·여천시 3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었다. 인구 2만 명이 넘은 돌산면이 1980년 읍으로 승격됐다.

1980년 약 2만 4000여 명이 거주 중인 돌산읍은 당시 지금의 여수해양과학고등학교인 돌산실업고등학교가 세워지고, 1984년 돌산 대교가 건설돼 여수 육지와 연결되었지만 돌산읍의 인구는 오히려 1985년 약 2만여 명, 1990년 1만 7000여 명으로 인구는 감소했다.

이러한 현상은 생산 기반 약화에 따른 경제적 측면과 더불어 자녀 교육 등을 위한 이촌 향도 현상에 의한 전출, 즉 인구의 사회적 감소와 낮은 출산율이 결합 됐다. 1995년 이후 세대 수가 꾸준히 늘고 있다. 이는 관광 산업의 활성화에 따른 숙박· 음식업의 발달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 신석기 시대 '송도 조개더미'

1989년부터 1990년까지 국립광주박물관에서 2차에 걸쳐 발굴 조사된 송도 조개더미에서는 덧무늬 토기가 중심을 이루는 갖가지 토기류를 비롯해 석기류·뼈연모·꾸미개 및 낚시도구들과 함께 화덕자리를 갖춘 2기의 집자리가 나왔다. 층위의 아래층에서는 남해안 신석기 문화에서 가장 이른 단계로 생각되는 덧무늬토기와 이른민무늬토기가 나오고, 위층에서는 겹아가리 토기 등 늦은 시기의 특징을 보이는 유물이 출토됐다.

그러나 서해안 문화에서 가장 전형적일 뿐 아니라 남해안 지방에서는 중기에 나타나는 빗살무늬토기가 송도 유적에서는 극히 적게 출토되고 있어 이 유적이 신석기 시대 전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기간에 거친 유적임을 알 수 있으나, 중기의 일정 기간은 생활의 공백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돌산 우두리에 확인된 청동기시대 무덤군. (사진=여수시)

● 청동기 시대 '세구지 고인돌'

돌산은 ▲둔전 마을에 6개 떼 39기 ▲봉수 마을 4개 떼 29기 ▲봉림 마을 3개 떼 35기 ▲월암 마을 6개 떼 27기 ▲작금 마을 1개 떼 34기 등 총 22개 떼 186기가 분포하고 있다. 단일 떼로는 작금 마을이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다. 돌산 지역 고인돌 떼는 월암·작금 마을을 제외한 나머지 떼가 주로 동남쪽에 있는 여수 해만을 바라보며, 분포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월암 고인돌 때는 가막만과 여수해만과 연관된다. 작금 유적은 횡간수로와 마주보고 있어 남면 고인돌과 연계성을 추정할 수 있다. 돌산에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 중 세구지 유적은 돌산읍 우두리 택지 지구 공사 때 많은 고인돌이 훼손된 채 보고됨으로써 1991년 12월 2일부터 1992년 1월 20일까지 국립 광주박물관에서 발굴한 뒤 옮겨 복원했다.

▲돌산 댬선 정상에 원형으로 쌓은 석성, 달암 산성. (사진=여수시)

● 고대 사회 '달암산성 및 본산성'

백제 시대 돌산 지역과 관련된 유적이 해발 359m의 대미산에 있는 달암산성이 있다. 정상에 돌로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총 둘레 249m, 너비는 상부가 3.2~4.1m이다. 성곽은 기단부를 생토층까지 흙을 파낸 뒤,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고 전체 구간을 안과 밖에서 함께 돌로 쌓는 협축성이다. 내·외벽은 모두 최초 1단에서부터 쌓기 수법을 사용했다. 특히 외벽 경사면의 경우┌ 자 형태로 생토층의 흙을 파낸 뒤, 성벽을 쌓아 올려 1단부터 수평층 쌓기의 수법으로 반듯하게 쌓았다.

또 일부 구간에서는 성벽의 하부에서부터 상부까지 3~5cm로 들여쌓기를 했다. 정사각형과 직사각형 및 부정형의 깬 돌을 사용했다. 발견된 유물은 모두 경질 토기 조각으로, 토기의 아가리 부분은 커다란 항아리나 옹기류이다. 바깥 면에는 격자문·선문·무문 등이 새겨져 있고, 색깔은 회청색과 회흑색을 뛴다.

본산성에서 발견된 유물은 통일 신라 시대에 해당하는 기와가 대부분이다. 평기와의 바깥쪽 문양은 선문·격자문·복합문을 비롯해 무늬가 없는 것 등이다. 안쪽은 삼베와 같은 포흔만 확인되고,, 토기는 모두 경질 토기 조각으로 그릇의 형태를 알 수는 없지만 격자문·선문·무문 등의 무늬와 돋음띠가 형성된 것이 발견됐다.

전남 동부 지역에서 발견된 백제 산성에서 출토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 기와에 멍석무늬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다. 그러나 본산성에서는 멍석무늬 기와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통일 신라 시대 유물만 출토돼 통일 신라 시대 처음 쌓아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여수 은적사는 순천 송광사를 오가며 잠깐 쉬어 가는 곳에 세운 사찰이다. (사진=여수시)

● 중세 사회 '은적암과 방답진'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은적암은 중봉산 중턱에 있다. 1195년 보조국사가 지금의 남면 금오도에 송광사를 짓고, 순천 송광사를 오가며 잠깐 쉬어 가는 곳에 세운 사찰이다. 이 절은 ‘숨을 은’ 자와 ‘고요할 적’ 자를 쓰는데 암자 뒤편에 있는 바위가 병풍을 두른 것 같으며, 주변의 소나무, 후박나무와 동백나무 숲이 있어 여름에는 시원하고, 계곡을 흐르는 물이 밤이면 큰 물소리로 들릴 정도로 조용해 ‘은적암’이라 한다.

은적암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나온 상량문에 따르면 1656년 건물을 새로 지었고 176년 11월 부서진 재목을 다시 모아 이듬해인 1777년 1월 24일 상량했다. 1523년 지금의 돌산읍 군내리에 방답첨사진 이 설치된 것은 삼산면, 돌산과 남면 등 여수의 섬 지역에 왜구의 침입이 잦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피해가 커지자 이를 막고자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872년 제작된 『방답진지도』에 따르면 성벽은 동·서·남·북 쪽의 4방향에 쌓아져 북쪽은 천왕산에서 내려오는 줄기와 연결되며, 남쪽과 서쪽은 가막만과 접하고 있다.

성문은 동·서·남쪽에 각각 1개소씩 세 군데가 있다. 성 내에는 군관청과 동헌, 객사 등의 여러 건물이 보이고, 서문 밖으로는 굴강과 병선 등이 표기되어 있다. 성벽의 길이는 동쪽 204m, 서쪽 295m, 남쪽 388m, 북쪽 308m로, 총 길이는 1195m로 쌓는 방법은 외벽은 돌로 쌓아 올리고, 그 뒤쪽으로 잡석과 흙을 채워 넣은 내탁식이다. 이는 조선시대 읍성이나 진성을 쌓을 때 일반적으로 사용한 방법이다.

▲방답진 선소, 전라좌수영 소속 수군 기지 중 하나인 방답진은 배를 만들던 곳이다. 현재는 적의 침입으로부터 전선을 보호하거나 적이 침입한 곳으로 즉시 출동할 수 있도록 깊게 판 굴강만이 남아 있다. (사진=뉴스탑전남)
▲방답진 선소, 전라좌수영 소속 수군 기지 중 하나인 방답진은 배를 만들던 곳이다. 현재는 적의 침입으로부터 전선을 보호하거나 적이 침입한 곳으로 즉시 출동할 수 있도록 깊게 판 굴강만이 남아 있다. (사진=뉴스탑전남)

성은 아래쪽에 큰 돌을 놓고 위로 갈수록 작은 돌로 쌓아 돌과 돌 사이에 생기는 틈에는 아주 작은 돌을 끼워 넣어 쓰러지지 않도록 하고 있어 조선 시대 중 후기에 쌓아진 성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방답진 선소 밖으로 조그마한 만이 있어 적의 침입으로부터 전선을 보호, 즉시 출동시킬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깊게 판 굴강이 있다.

방답진성 안에는 관아가 즐비하여 동헌은 지금까지 남아 읍사무소 회의실로 사용되고 있다. 읍사무소 동쪽에 군관청과 서기청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군관청 지붕마루 끝에 엎어대는 내림새 모양의 기와에 ‘건륭 30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1763년 전후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5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 근대 사회 '돌산향교와 주재년 열사 기념관'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일본의 간섭에 의한 두 차례에 걸쳐 갑오개혁이 추진되면서 육군의 수는 크게 줄어 수군을 완전히 폐지 시켜 버렸다. 이에 따라 1895년 7월 15일 조선 수군의 주진으로 남해안뿐만 아니라 조선을 지켜 왔던 전라좌수영, 그 아래의 방답진과 거문진이 없어졌고,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897년 여수군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돌산향교신설사적』에 따르면 돌산향교는 189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돌산 군이 새롭게 설치되면서 먼저 사직단이 세워지고 이어 대성전·명륜당·풍화루 등이 차례로 건립됐다. 돌산향교는 규모는 작지만, 공자의 위패를 으뜸으로 모시고, 유학의 4대 성인인 안자·자사·증자·맹자와 송나라 때의 4대 유학자 주돈신·정신·정호·주희 및 신라 설총 이래 우리나라 18대 선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향교 건축은 교육 공간으로서 명륜당과 성현들에 제사를 모시는 존현 공간인 대성 전이 함께 건립됐다. 돌산 향교는 평탄한 지형에 좌학 우묘의 형태로 배치함 으로써 향교 건축의 정통성에서 벗어나고 있어 남한 내 231개 향교 가운데 몇 안 되는 독특한 구조이다. 이러한 특성이 반영돼 1984년 2월 29일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됐다.

▲어린나이에 순직한 주재년 열사는 지난 2006년 8월 독립유공자로 추서 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주재년 열사 기념관. (사진=여수시)

주재년은 1940년대 전라남도 여수 지역의 최연소 항일 지사로 1929년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작금 마을에서 출생했다. 1943년 돌산초를 졸업하고 15세 때, 조선 독립의 실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을 자주 하면서 마을 담장 밑 큰 돌 4개에 ‘일본과 조선은 다른 나라’, “일본은 패망한다”, ‘조선만세’, ‘조선의 빛’ 이라 새겼다.

이로 인해 경찰에 검거돼 징역 8월에 집행 유예 4년을 선고받아 4개월 동안 복역했다. 그러나 복역 도중 심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1944년 순국하였다. 2006년 3월 건국훈장 애족장 포상대상자로 확정돼 2006년 8월 15일 제3주년 광복절경축식장에서 유족이 훈장을 받았다.

전라남도는 주재년의 항일 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이뤄진 만큼 ‘소년지사 주재년 현창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생가 터 복원과 기념비 건립, 추모 행사 등 다양한 선양 사업을 추진해 주재년열사기념관을 세웠다.

▲1984년 12월 준공된 여수 돌산대교. (사진=여수시)
▲1984년 12월 준공된 여수 돌산대교. (사진=여수시)

● 돌산대교와 돌산공원

돌산대교는 여수시 남산동과 돌산읍 우두리 사이를 잇는 길이 450m, 폭11.7m, 높이 62m의 사장교이다. 1984년 12월 15일 준공된 이 연륙교를 기념하기 위해 돌산공원을 만들었다. 2000년 10월 돌산대교에 8개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50여 가지의 색상 연출이 가능한 경관 조명 시설을 설치해 여수의 아름다운 밤에 대한 추억을 갖게 하는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돌산공원은 1987년 돌산읍 우두리 약 28만 7600㎡의 부지에 조성됐다. 공원에는 2002년 준공한 어업인위령탑이 있다. 그물을 끌어 당기는 어부의 역동적인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1998년 여수시·여천시·여천군이 통합을 기념하기 위해 통합 추진 과정 자료를 비롯해 당시의 시민생활과 사회·문화 자료 등 803점을 타임캡슐에 담아 1999년 10월 15일 묻었는데 2098년 4월 4일 열릴 예정이다.

종화동 자산공원과 돌산을 잇는 ‘거북선대교’는 2006년 2월 공사를 시작해 2012년 개통됐다. 국내 최초의 콘크리트 사장교인이 다리는 길이 744m, 폭 20m 규모로 여수 구 도심권의 교통 혼잡 해소와 돌산 지역의 해안 관광지 개발에 도움을 주고 있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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