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 마을은 경호동에서 두 번째로 큰 섬으로 생김새가 작은 고래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야도는 ‘불무섬’으로 불리던 무인도였다. 불무섬 주변에 민어, 문어, 삼치, 납치, 오징어, 숭어, 새우 등의 어장이 형성돼 1910년대부터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하늘에서 본 대경도, 국동에서 남쪽으로 약 500m 떨어져 있는 대경도는 면적 2.33㎟, 해안선 길이 11.7km되는 도심 속 섬이다. (사진=여수시)
▲하늘에서 본 대경도, 국동에서 남쪽으로 약 500m 떨어져 있는 대경도는 면적 2.33㎟, 해안선 길이 11.7km되는 도심 속 섬이다. (사진=여수시)

⑨월호동

월호동은 1998년 2월 1일 신월동과 섬으로 구성된 경호동이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행정동이다. 일제 강점기에 제작된 여수 지형도에 따르면 지금의 신월동에는 신월리와 봉양마을이 표기되어 있다.

봉양마을은 동쪽의 국동과 서쪽으로 웅천동 솔고개 및 신월리를 거쳐 북쪽의 여서동 한재마을로 가는 길이 있다. 신월동은 1914년부터 신월리로 부르다가 1953년 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예전에는 봉양·물구미·신근으로 3개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었다.

1940년 여수시 통계에 따르면 239가구에 1339명이 살고 있어 동정, 서정, 봉산리에 다음가는 큰 마을이었다. 경호동은 가막만에 있는 대경도와 소경도 등 사람이 사는 섬 3개와 무인도 13개로 구성됐다. 중심 산업은 수산업 9.6%, 농업 5.9%, 기타 84.5%이다.

『호구총수』의 여수면에는 전라좌수영성 서문 쪽 마을과 구봉산 자락에 분포한 사철리·대치리·진근 정·기동·구질포·천구미와 가막만에 위치한 대·소경도와 같은 땅 이름이 나타난다. ‘진근정’은 신월동에 있었던 ‘신근’ 마을과 발음이 가까워 이 마을로 추정된다.

호구총수 작성 뒤 90년이 지난 1879년 ‘각사등록’의 ‘호남계록’에는 신근리'라는 땅 이름이 나타난다. 마을 사람들이 전라좌수영에 소속된 군인으로 활동하다 많이 희생당한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여수 항공기지. (사진=여수시 문화원)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여수 항공기지. (사진=여수시 문화원)

신월동의 옛 마을 가운데 마을 뒷산인 구봉산에서 금이 생산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는 ‘생금 마을’이 있었다. 본래 샘구미·새암구미·샘기미로 불려왔다. 발전사에 따르면 일본 해군에 의해 1942년 여수 항공기지와 미평역에서 신월리 해군비행장을 잇는 철도를 놓으면서 강제로 철거된 3개의 마을이 새롭게 터를 잡으면서 만들어졌다.

조선 시대에는 대경도의 생김새가 고래와 닮았다 하여 ‘고래 경 鯨’자를 쓴 ‘경도 鯨島’가 ‘선조실록’과 ‘호좌수영지’ 영성도 등에 나타나 있다. ‘호구총수’에는 ‘서울 경 京’자를 쓴 대·소경도가 표기되어 있다. 1896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돌산군 경호면에 포함됐다.

1914년 일제의 행정 구역 개편 당시 대·소경도·가장도·야도를 합쳐 경호리가 되면서 ‘겨울경 鏡’자로 바뀌었다. 1946년 여수시와 여천군이 나뉘면서 여천군에 속하면서 1973년 여수시에 포함돼 경호동으로 부르게 됐다.

경호동과 관련된 땅이름은 내동마을은 섬 안쪽에 있다는 뜻에서 ‘안몰’로 불렸다. 오복 마을 북쪽에 있는데, 고려 말 왕비가 귀양왔다고 전해진다. 성산에는 성의 흔적과 옛 기와 조각이 발견됐다.

대경도 북쪽에 위치한 외동마을은 ‘바깥몰’이라 한다. 서쪽에 있는 작은 산은 마을의 기운이 약한 곳을 보완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산을 만들어 나무를 많이 심었다는 조산이 있다. 오복 또는 오봉 마을은 구봉산에 살던 봉황 9마리 가운데 5마리가 마을 뒷산인 성 산으로 날아왔다고 하여 오봉이라 하다 오복으로 바뀌었다. 현재 골프장이 만들어지면서 없어졌다.

소경 마을은 경호동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생김새가 작은 고래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솔섬은 바깥몰 동쪽에 있는 작은 무인도로 ‘솔’은 ‘작다’라는 우리 옛말이다.

야도는 ‘불무섬’으로 불리던 무인도였다. 일본 어부들이 여름철이면 이곳에 와서 고기를 잡고, 겨울철이 되면 다시 돌아갔던 곳이다. 일본인의 이주가 늘고, 불무섬 주변에 민어, 문어, 삼치, 납치, 오징어, 숭어, 새우 등의 어장이 형성됨으로써 1910년대부터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

또 여수에서 가장 먼저 양철집이 들어섰다. 크고 작은 일본의 생선 수출 업체가 섬에 회사를 차려 하루에 백여 척이 넘들 배들이 몰렸다. 바다 위에서 고기를 사고 파는 파시가 형성됐다.

여수의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어시장이 형성되고 생선의 유통이 육지에서 이루어짐에 따라 일본 어업 회사의 선단이 종포를 비롯한 육지 쪽으로 이동했다. 가장도는 큰 섬과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밀물 때는 두 개의 섬으로 나뉘고, 썰물 때는 자갈과 모래 해로 연결되는 육계도이다.

경호동에 속한 무인도 가운데 노도는 오복마을 동쪽에 있는 작은 섬으로 갈매기가 많이 살고 있다. 가장도 서쪽에는 풍락도, 남쪽에는 노랑섬, 소호동과 경계에 있는 긴 섬인 가덕도가 있다.

▲3여 통합 전 여수시와 여천시를 잇는 유일한 도로 민드래미재 도로. (사진=여수시)
▲3여 통합 전 여수시와 여천시를 잇는 유일한 도로 민드래미재 도로. (사진=여수시)

1980년대부터 월호동의 인구 성장은 육지에 속하는 신월동이 이끌고 있었다. 1995년의 경우, 경호동과 약 4배 차이를 보인다. 1976년 한화여수사업장이 세워지고 1990년대 초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됨으로써 1995년에는 급격한 인구 증가가 있었다, 2010년 이후 인구는 지속적인 감소하는 추세이다.

●선사 시대

대경도에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유적으로, 4곳의 조개더미를 들 수 있다. 『가』 유적은 내동 마을 동쪽에 있다. 발견된 유물은 덧무늬 토기, 콩알무늬 토기, 눌러찍은 무늬 토기 조각 등이 있다. 오복 마을 북쪽에 있었던 대경도 『나』 유적이 있다.

『다』 유적은 덧무늬 토기, 눌러찍은 무늬 토기, 가는선무늬 토기, 점띠무늬 토기, 빗살무늬 토기 조각을 비롯해 돌도끼 등의 석기류도 발견됐다. 『라』유적은 눌러찍은무늬 토기, 가는선무늬 토기, 점띠무늬 토기조각 등이 발견됐다. 돌칼과 숫돌, 이음돌 낚시 등이 발견돼 특징적이다.

이 가운데 돌칼은 1차로 모양 떼기를 하여 날과 손잡이 부분을 만들었다. 날 부분은 반 원형으로 손잡이 부분이 뾰족해 전체적인 형태는 올챙이 모양이다. 날은 한 면만 약간 갈았다. 반대 면은 잔손질로 약간씩 떼어내어 비교적 날카롭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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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동 고인돌. (사진=여수시)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묘제로 여수 지역에는 1500여 기가 분포한다. 경도에도 많은 고인돌이 분포해 있는데 내동 마을에서 경도성으로 가는 길 주변의 논과 성 내부에 많다. 특히 경도의 고인돌에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성혈이 발견됐다. 성혈은 여성을 상징하는 암각화로 풍요와 생산을 기원하는 원시 신앙의 하나이다. ‘알터’ 또는 ‘알바구’라 부르기도 한다.

●고려시대

경도의 안몰마을 성터는 다른 말로 ‘여정’, ‘당산성’이라 불렀다. 후세 사람들이 후궁의 억울한 사연을 안타깝게 여겨 성터에 그의 추모비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비석마저 없어졌다 전해진다.

▲1982년 12월 보호수로 지정된 경호동 당산나무. (사진=여수시)
▲1982년 12월 보호수로 지정된 경호동 당산나무. (사진=여수시)

경도 내에 있는 외동마을 사람들은 서쪽의 기운이 약하다고 판단해 이를 보완하기 위해 흙을 쌓아 산을 만들고 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 나무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당산나무이다. 약 500년 전 자손이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부가 살면서 소나무 두 그루를 심고 매일같이 자식처럼 키운 것이라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돌아가시면서 두 소나무에게 “마을을 지키는 이정표가 돼라”고 당부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위쪽 소나무를 할아버지 나무로 아래쪽은 할머니 나무라고 믿으며 당산나무로 지정해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 그분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당산제와 풍어제를 모시고 있다.

당산제를 주관하는 당주는 마을 총회에서 나이 든 사람 가운데 덕망이 높은 사람을 선출해 만약 당주가 부정한 것을 했을 경우 그 해는 흉어와 흉년이 들며, 질병으로 마을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당주로 정해지면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3일간 화장실에 갈 수 없고 화장을 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3일 동안은 거의 음식을 먹지 않고 정성을 기울였다고 한다. 또 당주는 섣달 그믐날과 정월 초하룻날 당제에 필요한 음식을 살 때 값을 깎지 않아 부정 타는 것을 막았다. 당주집에 차릴 음식과 당산에 차릴 음식을 따로 장만한다.

▲여수시 경도 골프장 인근에 심어진 600년 수령의 보호수가 누렇게 말라 죽어가고 있다.(사진=김종호기자)
▲여수시 경도 골프장 인근에 심어진 600년 수령의 보호수가 누렇게 말라 죽어가고 있다.(사진=김종호기자)

지금은 할머니 당의 당산나무는 완전히 말라 버렸다. 할아버지 당의 소나무는 가지 하나만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여수 항공기지

신월동 지역에서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아 언제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청동기 시대 대표적 유적인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어 이때부터는 지속해서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월동 고인돌은 신월 마을에 약간 못 미친 도로 오른쪽 밭에 5기가 위치한다. 이곳은 북동쪽에 있는 산자락의 사면에 해당한다. 주변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많다. 1942년 8월쯤 앞바다가 ㄷ자 모양으로 천연의 만을 이루고 있는 신월리의 지형을 이용해 일본 해군 비행장을 만들자 했다.

그리고 미평역에서 이 비행장까지 철도를 놓기 위한 땅을 다듬기 위해 신월동에 형성되어 있던 세 마을을 철거하여 새암기미 마을로 옮겼다. 이 비행장 공사는 일본 토목회사들이 맡아 했다. 인부들은 여수를 비롯해 전남 동부 6군에서 끌려온 근로 보국대원들이 2개월씩 돌아가며 일한으로써 해방될 무렵 약 90% 가까운 공정을 보였을 때 일본이 항복했다.

신월동·국동·여서동에 걸쳐 있는 구봉산 서남쪽 산자락에는 1976년 여러 가지 화약류 제품을 생산하는 한화여수사업소가 세워졌다. 이곳은 과거 일본 해군이 만든 ‘여수 항공기지', ‘여수 수상기기지’로 불린 군사 시설이 있었던 자리이다.

▲여수 신월동 하수종말처리장 모습.

여수 항공기지 배치도에는 기지의 가장 왼쪽 끝 바닷가에 폭탄고가 표시돼 있다. 지하에 수도, 즉 땅굴 형태로 만들어졌다. 면적은 125㎡이다. 지금 그 자리에 하수종말처리장이 들어서 있다.

항공기지 터에는 탄약고 등으로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시설물들이 여러 개 남아 있다. 기지 가운데 거주구 지역에 콘크리트 일체형 벙커가 2개, 정문 오른쪽 위로 1개가 있다. 정문에서 좀 더 올라간 길옆 경사지에 땅굴을 파고 콘크리트로 마감한 동굴이 2개 있다.

한화 여수사업장 정문에서 조금 올라가 헬기장이 있는 곳 아래쪽에 콘크리트로 만든 동굴의 입구가 남아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콘크리트로 만든 대형 벙커가 지하에 구축되어 있다. 약 30m 정도로 벽면은 아주 정교하게 마감돼 있다. 안쪽 깊숙한 곳에는 붉게 녹슨 두꺼운 철문도 그대로 남아 있어 여수 항공기지의 지휘 벙커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화사업장 정문 오른쪽 산기슭에 ‘비상대피소’라는 간판이 붙은 땅굴 입구가 5개 줄지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만든 지하 시설이 있다. 해방 직후 여수·순천 10·19 사건을 주도했던 제14연대가 이 지하 공간을 지휘본부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여수구항 선로 지도. (사진=여수시 문화원)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는 여수 미평역에서 신월동 해군기지를 연결하는 철도를 부설하는 공사를 했다. 이 공사를 위해 신월리에서 넘너리로 들어가는 고개 아래에 철도 터널을 뚫었기 때문에 ‘넘너리 터널’이라 부른다. 여수 항공기지는 진해 경비부 아래의 수상기가 기지로 만들어졌다. 자체적인 항공대는 갖추지 못했다. 일본 본토의 사세보에 1944년 12월 15일 만들어진 제951 항공대의 일부 분견대가 배치돼있다.

●여수·순천 10·19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병사들은 지창수 상사를 중심으로 단독 선거·단독 정부 수립 반대와 제주도에서 일어난 4·3항쟁을 진압하러 갈 수 없다며 파병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14연대가 주둔했던 막사 (사진=여수시 문화원)

제14연대는 1948년 5월 4일 여수 신월리에 창설됐다. 이곳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일본 해군이 가막만과 구봉산 뒷산의 지형을 천연 요새로 살아 해군 수상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주민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근로보국대를 동원해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일본의 패망으로 빈 막사와 격납고 등이 남아 있던 곳에 미군은 ‘앤더슨 기지’라 이름 짓고 14연대의 주둔지로 사용했다.

14연대 부대원은 광주 4연대에서 뽑힌 김지회, 홍순석 등 좌익계 장교들과 지창수 등의 하사관이 포함돼 여순봉기를 주도한 인물들이 많이 속해 있었다. 14연대가 봉기를 일으켰을 때 4연대가 합류했다.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 4·3항쟁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 작전을 위한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됐다. 10월 초순에 다시 시작된 유격대의 공격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에는 제주도의 9연대뿐만 아니라 6연대 1개 대대, 부산 5연대의 1개 대대와 해군함정이 증원될 예정이었다.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 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선포했다. 중산간 마을에 대해 초토화 작전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겠다는 공개적인 발표였다.

10월 19일 아침 7시 14연대에는 육군본부로부터 ‘전차양륙정 10월 19일 20:00 시에 출항하라. 제주경비사령관 김상겸 대령에게 반드시 통보할 것’이라는 내용의 일반 전보가 여수우체국을 거쳐 연대장에게 전달됐다.

당시에는 육군본부와 연대 사이에 직접 무선 통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밀리 전달되어야 할 작전 명령이 우체국 일반 전보로 전달됐다. 따라서 14연대는 제주도민을 상대로 동족상잔의 전쟁을 수행해야만 하는 처지에 빠졌다.

제주도 출병을 위한 준비로 종일 분주했던 1948년 10월 19일 19시 50분 비상 나팔 소리에 따라 부대원들이 연병장에 모이자 지창수는 연단으로 뛰어 올라가 “지금 경찰이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지금 조선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 중에 있다.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서 행동한다”고 연설 했다.

지창수가 연설을 마치자 미리 봉기 계획을 논의했던 남로당 세포원들과 대부분 사병들은 찬성을 표시했다. 이를 반대한 하사관 3명은 그 자리에서 즉시 사살당했다. 봉기한 사병들을 제지하려던 장교들은 사살되거나 피신해야만 했다

▲여수 경도 해양관광단지 개발 조감도. (사진=미래에셋)
▲여수 경도 해양관광단지 개발 조감도. (사진=미래에셋)

●대경도 해양관광 단지

대경도는 남해안 해양 관광자원 개발을 통한 단계별 인프라 구축 및 지역경제 활성화를 목적으로 2009년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다. 2012 여수세계박람회 지원 시설 및 관광단지 조성 계획이 승인되면서 박람회 참가자의 숙박과 레저활동 지원을 위한 100실 규모의 콘도미니엄과 9홀의 골프코스가 2012년 5월에 만들어졌다.

섬으로 구성된 경호동은 대경도에 해양 관광단지 개발로 골프 등 해양관광 및 레저 스포츠의 기반이 마련됐다. 2024년까지 신월동과 야도를 있는 340m의 아치교와 야도와 경도 사이 520m의 사장교 및 접속 도로 660m를 포함한 길이 1.52km, 폭 13.8m의 연륙교가 연결될 경우 많은 변화와 발전이 기대되는 섬이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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