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떡샘골경로당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구봉산 기슭 아래 샘을 보수하고 정자를 세워 떡샘이라 부르게 돼 ‘떡샘골’이라는 땅 이름도 있다.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1976년 국동 어항단지 조성공사 광경과 현제 모습. (사진=여수시) 
▲1976년 국동 어항단지 조성공사 광경과 현제 모습. (사진=여수시) 

⑧국동

1945년 해방 때까지 여수읍 봉산리에 속했던 ‘국포’는 바닷가 매립으로 주거지와 인구가 크게 늘면서 1962년 신국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1964년 신월동과 국동으로 나뉘었다.

구봉산 자락의 경사가 급한 산지와 매립지로 이루어진 국동은 해발 386m의 구봉산 남쪽에 자리하여 가막만과 마주하고 있다. 구봉초등학교, 라인아파트를 거쳐 구봉중학교까지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다.

전남대학교 국동캠퍼스를 비롯한 바닷가 쪽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부터 매립된 평지이다. 『읍지』에 “구봉산은 서쪽 5리에 있는데,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돌단이 있어 기우제를 지낸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9마리 봉황과 관련된 전설이 있는 구봉산을 오횡묵은 봉황이 돌아오는 산이라는 의미를 지닌 ‘귀봉산’으로 불렀다. 봉 새는 황 새와 암수 짝을 이루어 일반적으로 ‘봉황’이라 부르는데, 그 생김새가 닭, 용, 제비, 거북 등 상서로운 동물을 조금씩 닮았다 한다.

성군이 덕치를 펴면 민중들이 볼 수 있다는 신령스러운 상상의 새로, 봉황은 천하가 태평할 때에만 나타나는데 큰 산과 넓은 바다 위를 날며 오로지 거대한 오동나무만 찾아다닌다고 한다. 따라서 구봉산은 봉황이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발은 땅에 붙이고 앉은 모습이며, 봉황이 날자 오동나무에 달이 걸치고 대나무에 바람이 이는 형세이다.

국동과 관련된 땅 이름은 국포 또는 바닷가를 의미하는 포를 우리말로 푼 ‘국개’가 대표적이다. 지형이 국화꽃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졌다. 무사안녕을 빌며 굿을 하던 바닷가라는 ‘굿개’에서 비롯됐다.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 나오는 ‘구질포’도 이두 표기법으로 보아 ‘굿포’에 해당한다.

지금은 완전히 매립됐지만 1918년 지형도에 따르면 지금의 국동인 국포리와 봉산동의 봉산리가 서로 마주 보는 곳은 모래가 쌓여 뻗어나간 ‘사취’에 의해 만들어진 ‘곶’이 있어 그사이는 자연스럽게 좋은 항구가 형성됐다고 한다.

▲전남민속자료 제44호 여수영당. (사진=여수시)
▲전남민속자료 제44호 여수영당. (사진=여수시)

국포 마을을 중심으로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바다를 이용한 어업이 발달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곶의 동남쪽에 이순신 영당이 있었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사람들은 강한 바람과 높은 파도를 함께 몰고 오는 태풍 등의 자연재해가 커다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풍어를 기원할 수 있는 신앙적 존재가 필요했다.

굿개에서 바라보이는 영당에는 최영·이대원·정운·이순신 장군 등이 모셔져 있었다. 이들 공통점은 바다를 통해 쳐들어오는 왜적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해 옛날 국동에 살던 사람들은 이들을 신앙처럼 모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명절을 비롯해 삶의 터전인 바다로 나가기 전에 그들은 영당을 향해 무사함과 만선을 기원하는 굿을 올렸다. 여기서 ‘굿개’라는 땅 이름이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떡샘골경로당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구봉산 기슭 아래 10여 세대가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흐르는 물이 깨끗하고, 물맛이 떡과 같이 좋다”하여 주민들이 샘을 보수하고 정자를 세워 떡샘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떡샘골’이라는 땅 이름도 있다.

▲1980년대 중반 신월동, 국동 일대. (사진=여수시)
▲1980년대 중반 신월동, 국동 일대. (사진=여수시)

1975년 국동에 살던 인구는 879세대에 4642명에 불과했다. 1971년 구봉중학교가 들어섬으로써 새로운 학구 형성과 1970년 후반에 만들어진 택지와 약 1400세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공 1, 2단 지가 만들어지면서 1990년 국동 인구는 4710세대 1만 8793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1995년에는 1990년에 비해 약 208세대 1991명의 인구가 감소했다. 1995년 여수의 수산업이 크게 쇠퇴하면서 국동 지역 인구 감소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또 1980년 후반 여서·문수 지구의 신도시 개발과 1986년 여수국가산업단지의 배후 도시로서 여천시의 형성 등이 국동을 비롯한 여수 구도심 인구를 감소시켰다.

1996년 국동 경남아파트와 라인아파트 건설로 인구는 다시 증가했다. 세대별 평균 인구수는 1975년 5명, 1985년까지 4.5명 이상, 1990년대부터 2005년까지 3~4명 수준이었다. 2010년 이후에는 2명 이상으로 세대 수와 비교하면 인구는 감소하여 핵가족화 및 단독 가구가 지속해서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 여수지역 부분 확대도. (사진=여수시)
▲대동여지도 여수지역 부분 확대도. (사진=여수시)

●조선 시대 -내례포만호진-

조선 초기 여수를 중심으로 남해안을 지키던 수군진이 언제 설치됐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세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화양면 용주리의 돌산 만호진과 삼일동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진례만호진이 고려 말 또는 조선 초에 설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초기 수군의 편제는 각 포진마다 수군도절제사·수군도첨절제사·수군처치사 등을 두었다. 세종 때에 들어서 수군도절제사가 수군도안무처치사가 됐다. 그 아래에 도만호·만호가 있었다.

따라서 여수에는 전라좌도 도만호 아래에 진례만호와 돌산만호가 왜구 방어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1423년에 진례만호를 여수시 국동으로 추정되는 내례포로 옮겨 내례만호가 됐다.

『세종실록 지리지』 전라도 관방편에 “내례포는 순천부 남쪽 며포에 있다.”라고 기록 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순천도호부 산천조에는 “며포는 순천부의 동쪽 61리에 있다. …대경도와 소경도가 모두 며포의 남쪽에 있다.”라고 기록한다. 두 기록을 통해 볼 때, 내례만호는 대경도와 소경도의 북쪽에 위치한 며포로, 오늘날 국동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내례만호진은 전라좌도에 분포한 수군 기지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하여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전선 가운데 중간 크기의 배인 중선과 왜구를 따라잡아 무찌르는 쾌속선으로 볼 수 있다. 별선뿐만 아니라 군인과 뱃사공이 도만호가 담당하던 여도량 다음으로 많기 때문이다.

세종 때 여수와 전라도 동쪽 바다를 지키던 내례만호진이 있었지만, 성종 대에 들어와 잦은 왜구의 침입은 여수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즉 왜구의 잦은 침입과 군기와 화약을 약탈당했음에도 이를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한 조선 정부는 여수 지역을 비롯한 전라좌도의 군사력을 강화하고자 1479년 내례만호를 없애는 대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을 설치했다.

●근대 사회 -국동 일대 간척 사업-

1930년 12월 25일 육지에서는 서울로 가는 기차가 운영됐다. 바다에서는 시모노세키로 가는 뱃고동이 울리자 여수의 발전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지만, 시가지가 좁아 거주 면적이 부족했다.

해마다 공유수면 매립 공사를 되풀이해왔다. 공익적 목적보다는 자신의 필요 또는 이익을 위해 그때그때 조금씩 메운 것에 불과해 시가지 확장의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었다.

훨씬 더 많은 바다를 메워 시가지를 크게 넓혀야 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중·일 전쟁으로 일제가 대륙 침략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던 때였다. 모든 국력을 전쟁 수행에 집중함으로써 공유수면 매립과 같은 일은 민간 차원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일본인 츠카사 요시노부, 요시모리 엔리, 다나카 후쿠이치와 한국인 김영준, 명창순 등이 앞장서 구항과 국동의 전남대학교 국동캠퍼스 일대에 이르는 약 10만 평의 공유수면을 1, 2코스로 나누어 매립하고자 했다.

▲1944년 신항 일대. (사진=여수시문화원)
▲1944년 신항 일대. (사진=여수시문화원)

1코스는 중앙시장 앞과 옛 시민극장을 거쳐 교동 병모가지를 지나 남산동 수산센터에 이르는 공간이었다. 제2코스는 봉산리 앞에서 전남대 국동캠퍼스에 이르는 광활한 공유 수면을 매립 범위로 잡았다.

1940년 8월 15일 자본금 100만 원으로 ‘여행매축조합’을 설립해 계획적인 매립 사업을 진행했다. 여수의 골격을 다루는 대규모 공사였기 때문에 많은 자금과 인력이 필요한 모험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은 전쟁 중이었기에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노동력은 근로 보국대에 빼앗기고 식량을 비롯한 모든 물자는 통제령에 묶여 전쟁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이 매립 공사는 총독부로부터 소외되어 물자 배급도 받을 수 없었다.

공사 자재도 제대로 살 수 없는 등 날이 갈수록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김영준과 다나카 후쿠이치가 빠져나가고 남은 3명이 어려움과 싸우면서 매립 공사를 추진했다. 해방 2년 전인 1943년 제1코스 1공구인 옛 종대 앞에서 중앙 극장까지 3800평을 메워 어렵게 정부의 준공 검사를 마쳤다.

그러나 이 매립지도 통제 경제령에 묶여 정부에서 58만 원이라는 헐값을 매겨버렸다. 투자 자금도 건지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와 요시모리와 명창순도 손을 떼게 됐다.

혼자 남은 츠카사 요시노부는 사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일부 매립된 땅을 현물로 은행에 출자했다. 전 재산을 은행에 담보로 맡겨 은행 빚을 얻은 뒤 ‘여수토지건물흥업주시회사’를 차렸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미군의 공습이 잦아지고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는 전시 상황 속에서 더 공사를 진행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빠지게 된 요시노부는 자신이 메운 제2코스의 신월리에 이르는 철도부지 계획서를 부산철도사무소에 28만 원에 팔았다.

여수시는 1964년 국동 지역 바닷가를 다시 메우기 시작했다. 4만6000평 규모의 택지 조성과 공설 운동장을 상부 기관에 공유수면 매립 허가를 신청해 4000만 원의 공사비를 들여 그 해 6월 13일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이 공사에 동원된 가난한 주민은 하루 수백 명을 헤아렸다. 대부분이 부녀자들 또는 중학생 또래의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괭이나 삽, 호미로 흙을 파면 부녀자들이 이고 와 바다를 메우는 방식이었다. 이 매립 공사는 매일 수백 명씩이 참여하여 몇 년 동안 바다를 메우다 보니 ‘티끌 모아 태산’처럼 우공이산과 같은 기적이 일어나 예상외로 공정이 많이 진행되고 있던 무렵, 구호양곡이 끊겨 버렸다.

시에서는 공사를 계속 이어가자니 재원이 문제가 되고 중단하려니 그동안의 성과가 아까운 상황에서 여수국가산업단지와 국동어항단지가 들어서게 됐다.

시는 앞으로 많은 주택지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해 자조 근로 사업을 도시 건설사 업으로 바꿔 11만4000평의 대규모 매립 사업에 들어감과 동시에 일제 강점기 다카세 농장에서 매립해 놓고 방치해 두고 있던 간척지를 다듬는 공사까지도 아울러 시행함으로써 1970년 8월 20일 38만 평의 택지 조성을 완공했다.

▲1976년 당시 국동 어항단지 조성공사 광경. (사진=여수시)
▲1976년 당시 국동 어항단지 조성공사 광경. (사진=여수시)

●국동항

국동항은 여수의 어항단지로 바다 쪽으로는 가장도와 야도를 비롯해 신월항으로 둘러싸인 공유수면이다. 육지 쪽은 봉산동 일대까지 포함되는 곳으로 여수 수산업의 중심지이다. 1979년 국가 어항으로 지정됐다.

『어촌·어항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이용 범위가 전국적인 어항, 섬, 외딴곳에 있어 어장의 개발 및 어선의 대피에 필요한 어항으로 규정돼있다.

1980년대에는 국동항을 국내 최대 수산 가공단지와 제빙시설, 수산물 시장, 조선소 등을 갖춘 어업 전진기지로 만들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980년대 말까지 180여 척에 달하는 여수의 안강망 어업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1988년 항만 기본 조사와 시설 계획을 수립, 1992년 2단계 항만 기본시설 완공, 1996년 정비계획을 다시 세워 2004년 완공, 2003년에는 다기능어항 선정을 위한 조사 용역 실시, 2005년 기본 설계 과정을 거쳐 2012년 마무리됐다.

▲1976년부터 2016년까지 국동 개발 현황.
▲1976년부터 2016년까지 국동 개발 현황.

다기능어항은 어업 활동이 주로 추진되는 어항을 중심으로 다양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기능을 더해 지역 경제를 이끌어 가는 곳이다. 어항 기능에 물류·유통, 관광, 휴양 등 복합적으로 연계되어 다양한 경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1979년 국가 어항으로 지정된 국동항 다기능어항은 어 시설 노후화와 기능 쇠퇴에 따라 지난 2004년 국가 다기능어항으로 지정돼 개발이 본격 추진됐다.

2013년 준공식을 가진 국동항 다기능어항은 수변 공원, 방파제, 물량장, 주차장, 광장, 복지시설 등 주요 시설물이 포함돼 수산업 기반시설로서 역할과 함께 관광 인프라와 연계한 복합 어항이다.

▲1917년 당시 진남관 입구 계단 좌측 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 (사진=여수시)
▲1917년 당시 진남관 입구 계단 좌측 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 (사진=여수시)

●전남대학교 국동캠퍼스

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생긴 수산학교였다. 여수지역은 전국적으로 훌륭한 어장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기후가 온난하며 어패류의 서식에 적합해 예로부터 수산 자원이 풍부했다.

여수군 수산 교사 오가와 하지메는 여수에 수산학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라남도에 건의해 1917년 5월 1일 진남관의 부속 건물인 부청에 수업연한 1년의 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를 개설했다.

당시 수산업을 천시하는 인식 때문에 학생을 모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개교 당시에는 교직원들은 전라남도 내를 돌아다니며 입학을 권유하여 학생을 모았고, 학생들은 실습하지 않으려고 해 애를 먹었다고 한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인식도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는 취미를 갖도록 교육과정을 펴갔다. 여수의 각 기관에서도 수산학교 졸업생들을 각 분야에서 우선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점차 입학 희망자가 늘어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여수간이수산학교 제2회 졸업사진. (사진=여수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여수간이수산학교 제2회 졸업사진. (사진=여수시)

1921년 4월 1일부터 수업연한 2년의 공립수산학교로 승격됐다. 1922년 4월 도비로 종포에 687평의 땅을 마련해 본관 42평 창고 및 기타 시설 39평의 건물을 지어 옮겼다. 1923년에는 입학 자격을 보통학교와 심상소학교 6학년 졸업 이상으로 올렸다. 1924년 수업연한을 3년으로 늘림과 동시에 4300평의 땅을 사 지금의 중앙초등학교 자리로 옮겼다.

1932년 4월 총독부에서 항일 학생 운동에 대한 보복 조치로 수업연한을 2년으로 낮추고 각 학년을 어로·제조의 두 과로 나누어 4학급으로 만들었다. 단기 1년의 양식전수과를 설치했다. 1933년에는 실습선 범고래 호를 20마력으로 바꾸고 제조 실습 공장을 비로소 만들었다. 그해 8월 남해군 화원면 마산리에 1350평의 전수과 땅을 사들여 학교 건물과 주택을 지었다.

1935년 5년제 갑종 수산학교 승격 문제가 드러나 당시 중추원 참의였던 김한승이 전라남도 내 각 부와 군을 돌아다니면서 승격 운동을 전개했다. 1937년에는 동창회, 학부형 후원회, 여수읍 승격 기성회 등에서도 전라남도와 갑종 학교 승격 운동을 강력히 전개했다.

당시 총독부의 방침은 통영수산학교와 여수수산학교 중 땅 1만 평을 확보하는 곳을 승격시킨다는 조건이었다. 여수와 같이 땅이 좁은 곳에서 1만 평의 땅을 확보한다는 것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어서 포기하는 상태가 됐다.

이렇게 안타까운 상황을 지켜본 여수매축조합의 츠카사 요시노부가 자신이 메운 국동의 땅 1만 평을 학교에 선뜻 희사함으로써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됐다. 지역 주민들은 하나가 되어 학교 건축비를 모아 통영보다 먼저 승격 요건을 갖춰 1941년 3월 28일 승격 문제가 매듭지어졌다.

▲1944년 국동이로 이전한 수산학교. (사진=여수시)
▲1944년 국동이로 이전한 수산학교. (사진=여수시)

1944년 10월 준공함으로써 11월 지금의 전남대 국동 캠퍼스 자리로 옮겼다. 1946년 2월 수업연한을 6년으로 하는 어로·제조·증식 세 과를 두고 18학급 700명을 모집했다. 1951년 9월 수산고등학교로 인가돼 서중학교가 분리됐다. 수업연한이 3년으로 줄었다.

1963년 8월 여수수산고등전문학교로 승격 인가됐다. 1979년 2월 28일 국립여수수산 전문학교, 1975년 3월 1일 2년제 수산전문대학, 1987년 4년제 여수수산대학, 1995년 여수수산대학교로 둔덕캠퍼스 인문사회학관, 1998년 여수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6년에는 전남대학교와 통합했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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