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덕정은 서문 밖 연등천 옆에 있어 이충무공이 활쏘기를 익히던 정자였다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1990년 초 문수삼거리-여수종합버스터미널 간 도로. (사진=여수시)
▲1990년 초 문수삼거리-여수종합버스터미널 간 도로. (사진=여수시)

⑤광림동

광림동은 1997년 7월 25일 광무동과 오림동이 통합되어 만들어진 행정동이다. 광무동의 한재터널 부근은 경사가 아주 급하다. 호랑산에서 남산동으로 흐르는 약 5km에 이르는 연등천의 1.2km가 광림동을 거처 흘러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을 나타낸다.

오림동은 장군산의 북동쪽과 북쪽에 해발 280m의 호암산, 남쪽 385m의 마래산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 지형이다. 시외버스터미널, 진남체육공원, 시민회관, 문예회관 등이 분포해 여수의 도로 교통의 중심지 역할과 다양한 체육·문화·예술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1789년 기준으로 작성된 『호구총수』의 여수면에 속한 마을은 전라좌수영 성의 서문 밖 길 아래 마을이 6곳, 서문 밖 길 위 마을 6곳을 비롯해 오림정, 소미평, 사철리, 대치리, 신근정, 기동, 구질포, 대·소경도, 천구미 등의 땅이름이 있다

지금의 광무동은 서문 밖 길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림동은 ‘오림정’에 해당된다. 1897년 5월 16일 여수군이 설치되었을 때에는 옛 여수 시내 권역은 좌수영성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었다. 광무동은 서쪽 마을 가운데 일부였을 것으로 보인다. 오림동은 오림리가 이어져 온 것이다.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통폐합됨에 따라 좌수영 서쪽에 있던 마을의 하나인 광무동은 일본식 땅이름 표기인 ‘서정’에 포함됐다. 오림리는 마을 이름을 간직하다 해방된 뒤 1946년 일제 잔재를 없애기 위해 행정구역의 명칭을 ‘정’에서 ‘동’으로 바꿀 때 오림동이 되었다. 

1997년 7월 25일 광무동과 오림동의 행정동 통합에 따라 광림동 되었다. 광무동의 땅이름은 활을 쏘던 정자가 있었다는 ‘사정’이나 ‘궁동’이 나타난다. 이는 모두 관덕정과 관련이있다.

옛날 서문 밖 연등천 옆에서 이순신 장군이 활쏘기 연습을 했던 정자인 관덕정이 있었다가 없어졌다. 이후 일제 강점기 1935년 군자동에 있던 군자정을 옛 광무동 사무소 뒤편의 산비탈에 강제로 옮김으로써 이곳에 활터가 있었기 때문에 1971년까지 동 이름이 ‘궁동’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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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2월 3일 보호수로 지정된 오림동 느티나무. (사진=여수시)

오림동은 옛날 좌수영성 서문에서 5리 떨어진 곳에 ‘오리정’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리정은 오림동 터미널 근처에 있다. 이곳에 심어진 느티나무와 관련되어 만들어진 땅이름으로 이 나무는 1982년 12월 3일 보호수로 지정됐다. ‘홀어미 정자나무와 홀아비 정자나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두 나무의 전설은 다음과 깉다

"초가삼간 오두막집에서 남편은 과거 급제를 목표로 글공부에 전념하고 부인은 남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떡장수로 어렵게 생활해 가는 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자리에 눕자 부인은 모든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병은 악화되어만 갔다.

하루는 남편이 부인의 손을 잡고 “결혼한 지 10년 동안 남편 노릇 한번 못하고 당신 고생만 시켰으니, 내 죄가 너무 커서 어찌 눈을 감고 죽을 수가 있겠소. 살아서 못다 한 인연을 저세상에서 만나 다시 이루어 봅시다”라는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아내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밤만 되면 문밖에서 남편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매일 밤 이러한 일이 계속되자 남편이 그리웠던 부인은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살하려고 했다.

마침 길을 가던 늙은 스님이 목이 말라 물을 마시기 위해 주인을 찾다가 이 모습을 보고 급하게 부인의 생명을 구했다. 부인의 사정을 알게 된 스님은 “당신 남편의 한이 너무 깊어 극락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고 있으니, 남편의 영혼을 달래려면 여러 사람을 위해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부인은 스님께 “저에게 재산이 없는데 어떻게 많은 사람에게 공덕을 베풀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스님은 “많은 사람에게 공덕을 쌓는 일은 돈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정성에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는 일, 하천에 돌다리를 놓는 일, 길 가는 행인이 쉴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는 것도 모두 공덕에 해당합니다.”라고 일러 주었다.

그 후 부인은 남편의 극락왕생을 위해 무엇으로 많은 사람에게 덕을 쌓을까 고민한 끝에 느티나무 한 쌍을 심었다. 두 그루의 나무를 통해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바람과 이 나무들이 크게 자라서 커다란 그늘이 만들어지면 오고 가던 사람들이 쉬어 가는 자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같은 나무에 다른 전설도 이어진다. 한 젊은 선비가 열심히 공부했지만, 과거를 볼 때마다 떨어지자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언덕에 앉아 한숨을 짓고 있었다. 그때 언덕 밑으로 외롭게 서 있는 한 그루 나무가 보이자 자기 신세처럼 처량하게 느껴졌다.

선비는 같은 종류의 나무 한 그루를 사다가 옆에 심어 외로움을 달래주었는데 두 나무가 크게 자라자, 동네 사람들이 그 나무 밑에 모여 회의도 하고 놀기도 하였다. 그 뒤 동네 사람들은 이 나무를 ‘홀아비 정자나무’라고 불렀다 한다."

오림동 느티나무는 2016년 산림청에서 ‘이야기가 있는 보호수’라는 주제로 우리나라의 보호수 가운데 100그루를 골랐을 때 전설이나 설화가 전해지는 대표적인 나무에 포함됐다. 여

▲1978년부터 1981년까지 연등천을 따라 제2토지 구획정리 사업지구에 광무동 지역에 포함됐다. (사진=여수시)
▲1978년부터 1981년까지 연등천을 따라 제2토지 구획정리 사업지구에 광무동 지역에 포함됐다. (사진=여수시)

광림동의 인구는 1978년부터 1981년까지 연등천을 따라 이루어진 제2토지 구획정리 사업지구에 장군산 아래의 광무동 지역이 포함되면서 1980년부터 인구는 증가하기 시작한다. 1990년대 오림동에 570세대 규모의 공동주택인 아파트가 세워진 것이 영향으로 1995년부터 이후 광림동의 인구는 감소하여 주거 기능이 약해진다. 이어 여서·문수 지구를 비롯해 웅천 등에 대규모 아파트가 세워져 인구 감소에 연관성도 있어 보인다.

▲오림동 지석묘군 지방기념물 제150호. (사진=여수시)
▲오림동 지석묘군 지방기념물 제150호. (사진=여수시)

●선사시대 '오림동 고인돌'

광림동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 시대부터였다고 판단된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서는 광무동 한재터널 앞 장군산 자락에 7기 오림동 오림쟁이에 3기의 고인돌을 보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림쟁이 마을 앞에 분포하고 있던 고인돌의 일부가 진남체육공원을 만들면서 묻힐 위기에 놓이게 되자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1989년 12월 26일부터 1990년 1월 19일까지 25일간에 걸쳐 덮개돌이 있는 9기 가운데 6기와 덮개돌이 없는 9기의 무덤방을 발굴, 조사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 조각, 석기류, 청동기, 옥 등 다양하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발굴된 고인돌 가운데 전남 지방에서 유일하게 고인돌 덮개돌에 그림이 새겨진 것이 있어 1994년 1월 31일 지방기념물 제150호로 지정했다. 지금은 화장동 선사유적공원으로 옮겨 놓았다.

●삼국시대 '자산산성'

▲자산산성 (사진=여수시문화원)
▲자산산성 (사진=여수시문화원)

여수 지역에는 지표 조사와 발굴을 통하여 고락 산성, 테미 산성, 자산산성 등 백제 시대에 쌓아진 성이 확인됐다. 오림동 여수종합버스터미널 옆에서 문수 삼거리로 가는 도로 오른쪽에 있는 야트막한 산은 해발 100m로 ‘자산’ 또는 ‘척산’으로 불린다. 이 산 정상을 중심으로 쌓아진 성이 자산산성이다.

성벽의 총 둘레는 약 264m이나 대부분 무너져 있다. 내벽과 외벽의 너비 630cm, 외벽의 높이 120cm, 내벽의 높이는 약 90cm이다. 산 정상부의 일정한 공간을 두르고 있는 테메식 산성이다. 대부분 성의 안과 바깥쪽에서 함께 돌을 쌓은 협축식이며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 조사한 결과 건물이 있었던 터로 추정되는 3곳과 많은 기와 및 토기 조각을 찾을 수 있었다.

자연석이나 돌을 대충 납작하게 깨서 쌓았지만, 이 성의 일부 구간은 두부처럼 반듯하게 다듬은 무사 석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여수 지역에 위치한 백제 시대 성 가운데 가장 정성을 기울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관덕정'

1899년에 간행된 『읍지』에 “관덕정은 서문 밖 연등천 옆에 있다. 이충무공이 활쏘기를 익히던 정자였는데 오늘날에는 없어졌다”라고 기록됐다. 1897년 순천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행정구역인 여수군이 만들어 지면서 오횡묵1897년 4월 초대 군수로 부임해 1899년 6월까지 여수군수로 있으면서 지방행정에 관한 기록인 『여수총쇄록』을 남겼다.

여수총쇄록은 여수의 이름난 곳, 아름다운 경관 등을 읊고 위치를 함께 밝힌 106수의 연작시 『여수잡영』이 포함되어있었다. 2018년 이를 번역하고, 설명을 덧붙인 책이 발간되어 여수 지역의 특성을 밝히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여수잡영'에는 조선 시대 광무동의 역사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관덕정’이라는 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활쏘기로 덕을 쌓고 자기 공로 사양하며

예를 다해 차례 지켜 정성들여 맞이했지

변방에도 지금은 전운이 돌지 않아

쓸쓸한 정자 터엔 나뭇가지만 웃자랐네"

관덕정은 서문 밖 연등천 가에 있었으나, 오횡묵이 군수로 부임했을 때 정자는 없어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시는 관덕정이 섰던 빈터에서 활쏘기를 상상하고 현재의 쓸쓸한 심정을 읊은 것이다.

▲진남경기장 들어서기 전과 현재의 오림동 일대. (사진=여수시)
▲진남경기장 들어서기 전과 현재의 오림동 일대. (사진=여수시)

●진남체육공원

1978년 여수시는 여서동에 총면적 3만 6000평의 시립 공설운동장을 만들기로 했다. 11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메인 스타디움의 터 닦기와 233m의 진입로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곳은 하수가 많이 흘러넘치는 지역에 주 경기장을 산비탈의 동-서 방향으로 깎아 축구와 같은 경기는 오전에는 서쪽의 골키퍼와 선수가, 오후에는 동쪽의 골키퍼와 선수가 해를 보고 경기를 해야 했다.

풍향, 풍속 등 공인 기록 경기가 어려운 상황 속 8년이 지나도록 경기장은 방치됐다. 1986년 8월 여서·문수 지구 신도심 개발 공사 때, 이 운동장을 흡수할 것을 조건으로 사업자를 찾았다. 이때 경남기업이 30억 원에 이를 인수하고 공사를 맡았다. 종합 운동장의 설치가 필요했던 여수시는 서울에 있는 건축사에 용역을 맡겨 후보지를 고른 결과 바람의 방향이나 일조량 및 물 빠짐 조건이 좋은 오림동 9만 5000평의 분지가 가장 좋은 위치로 파악됐다.

여수시 오림동 123번지 일대에 조성된 진남경기장은 1990년 4월 30일 종합경기장으로 준공됐다. 체육 시설과 여수시장애인국민체육센터 다목적 광장 같은 시설들이 한데 모여 시민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공원으로 변했다.

▲여수시민회관은 1977년 지역 사회단체와 시민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건립에 착공했다. (사진=여수시)

●여수시민회관

1970년대 여수 지역은 수산업이 호황을 맞이하는 등 지역 경제가 발전해 이와 더불어 지역 문화예술 활동도 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전문 공연시설이 없어서 다실에서 전시공간을 마련하는 등 문화예술 환경이 너무나 열악했다. 이에 여수 지역의 문화예술인과 여수 시민이 주축이 되어 성금을 모아 여수시민회관을 마련하고자 여수시에서도 지역 문화예술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구체적인 지원을 시작했다.

▲1977년 10월 21일 제1회 여수 예술 발표회 (사진=여수시)
▲1977년 10월 21일 제1회 여수 예술 발표회 (사진=여수시)

1977년 여수시민회관 건립 기금 모금을 목적으로 제1회 여수예술제가 시행됐다. 여수 지역 사회단체와 시민의 자발적인 모금의 결실로 1983년 7월 22일에 여수시민회관 건립에 착공했다. 1987년 6월 10일 ‘여수시민회관 조례’ 제1267호가 지정됐다.

1987년 6월 28일 여수시민회관 개관식을 가졌다. 여수시민회관은 여수 시민을 위한 문화예술 공간으로 사용을 원하는 여수 시민은 누구나 신청을 하면 심의와 허가를 받은 후에 요금을 내고 사용할 수 있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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