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1946년 일제 잔재를 없애기 위해 ‘정’ 을 ‘동’으로 바꾸면서 고소동·중장동·교동이 됐다. 중장동은 1953년 중앙동으로 이름을 바꾼다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 1권, 2권, 3권을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1934년 2013년의 중앙동, 교동 일대. (사진=여수시)
▲1934년 2013년의 중앙동, 교동 일대. (사진=여수시)

③중앙동

중앙동은 여수시 동남쪽에 있는 종고산과 장군산 사이를 흐르는 연등천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동쪽으로부터 중앙로와 이순신광장로를 따라 일제 강점기부터 바다를 메워 형성된 ‘교동’과 ‘중앙동’을 계산(雞山)을 중심으로 ‘고소동’의 세 법정동을 포함한 행정동이다. ‘장군도’도 포함되어 있다.

동쪽은 종화동과 관문동, 서쪽 남산동과 서교동, 남쪽은 바다, 북쪽은 군자동과 마주하고 있다. 교동에 위치한 여수연안여객선터미널은 여수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섬들로 오가는 많은 여객선이 모여 해상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다.

서교동 로터리에서 나뉘는 중앙로와 여객선터미널에서 건어물 상가가 있는 바닷가에 형성된 이순신광장로가 중앙동 로터리에서 만나 다시 종화동 해양공원 쪽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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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중앙동 구항 수장. (사진=여수시)

중앙동은 보물 제571호인 통제이공수군대첩비와 제1288호의 타루비가 있다. 과거에 7곳의 중심 금융기관이 분포하여 과거에는 여수의 중심 업무 지구역할을 담당했다. 중앙동과 교동은 거의 바다를 메워 형성된 간척지이다. 가장 높은 곳은 해발 고도 117m의 계산으로, 고소대가 있다.

『호좌수영지』에는 “동문 좌포루는 5칸으로 장군 지휘소를 겸하는데, 곧 고소대의 옛터이며 1774년 절도사 김등이 새로이 지어 물거정 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그 현판 이름을 직접 썼다”라고 기록됐다.

1897년 여수군이 새로운 행정 구역으로 만들어졌을 무렵 전라좌수영성을 기준으로 동·서로 나누어 각각 21개와 12개 동이 있었다. 동쪽의 소동은 지금의 고소동이다. 서쪽의 교동은 연등교가 있었던 지역으로 지금의 교동으로 추정된다.

1914년 일본에 의해 행정 구역이 통폐합될 때 좌수영 동쪽에 있던 21개 마을은 여수면 ‘동정’으로, 서쪽의 12개는 ‘서정’에 포함해 해방 후 1946년 일제 잔재를 없애기 위해 ‘정’ 을 ‘동’으로 바꾸면서 고소동·중장동·교동이 되었다. 중장동은 1953년 중앙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장군도는 섬 주변에서 고래를 많이 잡았기 때문에 ‘참경도’라고 불렀다

1997년 7월 25일 제1차 행정동 통합에 따라 고소동과 중앙동을 합쳐 중앙동으로 바꾸었다. 1998년 2월 1일 제2차 동 개편에 따라 고소동·중앙동·교동을 통합해 중앙동으로 변경했다. 중앙동에 포함된 장군도는 섬 주변에서 고래를 많이 잡았기 때문에 ‘참경도’라고 불렀다.

진남관 아래로 옮겨진 비석들 가운데 ‘이장군함천군휘량방왜축제비’ 비문에 따르면, 1643년 이량 장군의 5세손이며, 감사를 지낸 이배원이 글을 짓고, 6세손 함릉부원군 이해가 글씨를 비석에 새겨 장군도에 세운 것이다.

▲1930년대 중앙동 거리, 지금의 중앙동 로터리 동편 쪽에서 종고산 쪽 박이비인후과 의원 앞을 향해 촬영한 시가의 일부이다. (사진=여수시) 
▲1930년대 중앙동 거리, 지금의 중앙동 로터리 동편 쪽에서 종고산 쪽 박이비인후과 의원 앞을 향해 촬영한 시가의 일부이다. (사진=여수시) 

장군도가 일본인들에 의해 훼손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때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을 미화하는 시설을 설치했음을 알려 주고 있다. 1908년 10월부터 어업법이 시행되면서 일본인도 어업권을 인정받게 됐다. 일본에 살면서 어업 시기에 맞춰 우리나라로 와서 고기잡이하던 통어어업에서 수산업의 입지 조건이 좋은 지역으로 이사와 정착하여 어업을 하는 형태로 변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인들의 어업권 장악이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에 여수 지역 어민들의 반발은 클 수밖에 없었다.

의병들의 주된 공격 대상은 일본 군인과 경찰, 순사 주재소, 재무서 뿐만 아니라 일본 어부들도 많았다. 그들은 일본 침략의 앞잡이임과 동시에 한국인 어부들의 어장을 빼앗거나 근대적인 배와 그물 등으로 어족자원을 싹쓸이함으로써 한국 어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했다.

"여기 슬퍼해야 할 운명이 일본인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즉 1908년 말부터 1909년에 걸치는 의병의 봉기가 그것으로 특히 전남 지방은 그 소굴로 지목되었는데, 일본인의 피해는 그칠 새 없이 귀청을 때렸다. 여수군을 침범한 의병은 고흥 혹은 완도방면에서 습격해 온 자들로서 당시 일본인의 수는 적었는데, 아직 군대의 보호조차 받을 수 없었다."

여수 지역 의병 활동이 이 지역에 와있던 일본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일본인이었던 가타오카 하카루가 쓴 『여수발전사』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재향군인회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칭다오를 빼앗는 승리를 거두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장군도를 해상공원으로 만들고 이곳이 여수항의 얼굴이며 이순신 장군의 유적일 뿐만 아니라 장군도란 이름 자체가 군인 정신에 알맞다는 이유를 붙였다. 이들은 1916년 3월, 전 회원이 잡초를 베어 내고, 다카세 농장 주인 오오 츠카 지사부로와 이마모토 다케이치로 두 사람으로부터 벚나무 1000그루와 단풍 나무 500그루를 기증받아 심었다 이때 충용비와 포탄탑을 세웠다.

▲지금의 대첩비각 밑에 자리한 해월루. (사진=여수시)

여수 신사는 동정의 작은 산 고소대에 있는데 눈앞에 항구를 바라볼 수 있다. 『영성도』에는 전라좌수영성 남문 밖에 ‘수장’이 표기되어 있는데 1924년 그 안쪽을 메워 마을이 형성되어 ‘수장동’이라 했다.

진남상가길에서 교동북1길로 가는 골목에는 지금은 운영하지 않은 남도여관이 있다. 이 건물 앞에는 커다란 암반이 있었는데, 겨울에 이곳에서 따뜻한 온천수가 나왔다고 하여 ‘탕수바구’라고 불렀다.

교동과 중앙동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 때부터 바다를 메워 만들어진 간척지에 새로운 시가지가 만들어지면서 상업 기능이 집중되었다. 고소동은 계산을 중심으로 자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거 기능이 강했다.

1975년 1980년대 여수수산업의 발달과 여수국가산업단지 조성으로 인구는 늘고 경제가 활성화가 된다.1985년 여서·문수 지역 개발로 인해 인구는 감소한다. 이어 1999년 고소동 433세대 공동 주택이 만들어졌음데도 불구하고 전체의 인구는 늘지 않고 줄어든다.

'장군성' 우리나라 유일한 수중성

잦은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한 이량 장군은 근본적으로 막을수 있는 방법이 절실함을 깨달았다. 왜구가 자주 드나드는 전라좌수영 일대의 길목이었던 돌산도와 장군도 사이의 바닷속에 돌을 석성을 쌓는 것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0여 년 전인 1497년 쌓은 이 성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수중성이다.

장군도와 돌산 사이의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왜구가 침범하면 잡기가 어려웠고, 이를 막기 위하여 장군성을 쌓은 것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장군도에는 ‘장군성’이라 음각된 비석이 있다.

이량 장군의 후손들이 두 차례 걸쳐 세운 ‘방왜축제비’가 진남관 아래 있다. 이량 장군은 전라좌수사로 있을 때 왜구들이 지금의 고흥군에 속한 삼산면 지역에 침범해 고기 낚고 나무하는 사람 4명을 죽이고 다시 금오도를 공격했다. 이들을 추격해 배 한 척을 잡고 8명을 쏘아 죽이고  2명을 생포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중앙동 산1번지에 해당하는 장군도는 옛날 대나무가 많은 탓에 ‘대섬’이라 했다.

▲여수시 고소3길에 위치한 고소대. (사진=여수시)
▲여수시 고소3길에 위치한 고소대. (사진=여수시)

'고소대' 여수 8경 중의 하나

전투가 벌어졌을 때 성과 내에서 군사들을 지휘하기 쉬운 높은 지점에 쌓은 장수의 지휘소인 장대로 보인다. 『호좌수영지』 영성도에는 안산 기슭에 3칸의 건물로 표현되어 있으나 언제 없어졌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고소대는 여수의 아름다운 경치 8가지 중 하나로 1947년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3간 맞배지붕이다. 원형 기둥머리 위에 익공 재를 놓고 그 위에 보의 머리를 얹힌 비각이 있다. 고소대 정자형 비각 안에는 보물 제571호 통제이공수군대첩비와 보물 제1288호인 타루비를 비롯해 동령소갈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는 길이 3.6m, 폭 1.27m, 두께 27cm로, 현재 국내에 있는 비석 중에 가장 크며, 역사적 가치가 인정돼 1973년 5월 4일, 보물 제571호로 지정됐다.

▲ 보물 제1288호인 타루비. (사진=뉴스탑전남)
▲ 보물 제1288호인 타루비. (사진=뉴스탑전남)

타루비의 ‘타루’란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중국의 양양 사람들이 양호를 생각하면서 비석을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고사성어에서 인용하였다. ‘기실비’는 1698년에 세워졌는데, 현감 심인조가 대첩비를 건립하는 과정과 참여한 인물들, 그리고 건립하기까지의 어려움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뒷면에는 남구만이 대첩비를 세우게 된 배경과 이유를 쓴 글을 새겼으나 많이 훼손됐다.

▲오른쪽 2층 건물 당시 전남수산주식회사. (사진-여수시)
▲오른쪽 2층 건물 당시 전남수산주식회사. (사진-여수시)

'일제 강점기 매립 사업’

1924년에 생긴 여수수산(상호)은 지금의 중앙동 선어시장 자리인 바다 위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아 생선을 위판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여수수산은 전남수산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고, 1925년 그 자리를 메우기 시작해 1927년 6월 20일 준공했다. 그때 매립된 면적은 1063평이었다.

일본인과 인구 증가에 따라 많은 땅이 필요하게 된 1926년 여수의 지방자치 단체와 유지들은 여수 발전을 위해서 항만의 준설과 바다를 메우는 것이 가장 급하다는데 뜻을 모았다.

그들은 일본인 다사카 노부지를 회장으로 하여 여수항만준설기성회를 만들었다. 당시 군수였던 백흥기 등이 관계 기관에 도움을 부탁한 결과 총독부로부터 준설선을 빌리는데 성공하여 신·구항의 준설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1924년 중앙동 어시장 일대 (사진=여수시)
▲중앙동 어시장 일대 (사진=여수시)

중앙동과 교동 지역의 간척 사업은 해방 전까지도 계속되었다. 1, 2코스로 나누어 매립하기 위해 1940년 8월 15일 100만원의 자본으로 ‘여항매축조합’을 세워 구항과 국동의 전남대학교 국동캠퍼스 일대에 이르는 약 10만 평의 공유수면을 메우고자 하였다. 1코스는 중앙시장 앞에서 옛 시민극장과 교동 병모가지를 지나 남산동 수산센터에 이르는 공간이다.

해방이 된 뒤에도 병모가지라고 불린 교동에 매립되지 않은 48.000명의 놋강이 시내 한복판에 있었다. 시민들의 쓰레기 처리장이 되어 온갖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여수·순천 10·19 사건과 6·25 한국전쟁 등으로 여수시에서는 미처 손을 쓰지 못하고 숙제로만 미루어 왔다.

1956년 3월 매립 계약을 체결했지만 공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1958년 익산에 있는 금림건설주식회사쇼가 맡아 13년 만에 다시 매립 공사가 시작되어 5·16 군사 쿠데타 전 약 21,000평을 메웠으나, 다시 중단되었다가 1962년 5월 22일 완전히 매립됐다.

'이순신광장’ 이순신 장군 어릴 때 이름 '여해'

이순신 장군의 본관은 덕수이고, 어릴 때 이름은 '여해'였다. 죽은 뒤 공덕을 칭송 하기 위해 붙인 이름인 시호는 충무이다.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로 부임하였다.

여수에 도착한 장군은 수군에 대한 군기를 엄히 하면서 허물어진 성벽을 쌓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종포로 추정되는 곳에서 돌산까지 쇠사슬을 설치하는 등 주민들과 힘을 합처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영 관할 5관 5포 수군들로 함대를 편성하고, 경상도로 출전하여 처음 치러진 옥포해전을 비롯해 사천·당포·당항포·한산도·오골포·부산포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1593년 전라좌수영 수군들로 한산도에 진매을 설치하였으며, 삼도수군 통제사 겸 전라 좌수사로 임명되어 통제영인 여수와 한산도 진을 오가며 남해안 일대의 왜군을 물리쳤다.

1598년 묘도를 중심으로 왜교성 전투를 이끌다 퇴각하는 왜군과 남해 노량 관음포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장군과 그를 도운 많은 사람들을 소개하여 역사적인 현장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중앙동에 만든 공원이 ‘이순신 광장’이다.

▲고소벽화마을 3구간 여수 출신 만화가 허영만 화백의 작품 (사진=오지선 기자)
▲고소벽화마을 3구간 여수 출신 만화가 허영만 화백의 작품 (사진=오지선 기자)

'고소천사벽화마을’ 원도심 활성화 주도

고소천사벽화마을은 2009년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초기 1004m의 골목길을 벽화로 장식하였기 때문에 '고소천사마을'로 이름 지어졌다 현재는 1650m의 거리를 10개 구간으로 나누어 각 코스마다 여수의 역사, 문화, 생활 및 지역 이야기를 담고 있다.

1구간은 골목길에 어린왕자와 청춘을 예찬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2구간은 작은 전망쉼터와 고소동 천사 전망대가 있는데 날개를 단 백마 포토존 및 여수풍경과 카피라이트 벽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3구간은 여수 출신 만화가 허영만 화백의 작품들로 꾸며져 있는데 벽화마을을 만들 때 캐릭터 사용을 흔쾌히 허락하여 ‘허영만 벽화 갤러리’가 완성되었다. 4구간은 계단 아래로 하트 포토존과 잠시 쉴 수 있는 정자가 있다.

5구간은 달빛 갤러리와 이순신 전술 신호연 박물관이 있다. 또 오포대공원으로 길을 안내하는 고양이 캐릭터를 만날 수 있는데, 오포대는 일제강점기에 정오를 알리던 ‘포’를 쐈던 곳이다.

6구간 시작점에는 여수 바다를 배경으로 한 포토존들이 있다. 7구간은 역사 이야기로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와 여수의 옛 사진이 타일로 꾸며져 있다. 8구간은 진남관, 향일암, 여자만오동도 등 여수 8경과 이순신 장군 전술연에 대한 설명, 각공 연의 모습을 그려 놓았다.

9구간은 바닷속이야기로 이순신광장문 앞에 서면 119개의 계단을 마주한다. 2020년 6월 오행 사상을 표현하는 오방색으로 다시 단장했다. 10구간은 카페가 밀집한 공간으로 기존의 벽화골목과는 또 다른 감성을 제공한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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