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대마을은 ‘짐대마을’이라 불러, 이곳에 있는 굴을 ‘금대굴, 황새봉굴’이라 불러
조선시대 순천부 소라부곡, 1897년 여수군 덕안면, 일제감정기 이후 여천군 소라면, 3여통합 이후 여수시 소라면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여수시 소라면 장척마을 여자만 갯벌노을체험행사. '여자만'은 여수.순천.벌교.보성을 감싸고 있는 큰 바다이다. (사진=여수시)
▲여수시 소라면 장척마을 여자만 갯벌노을체험행사. '여자만'은 여수.순천.벌교.보성을 감싸고 있는 큰 바다이다. (사진=여수시)

㉑소라면

여수의 중앙에 있는 소라면은 총면적 60.56㎢, 해안선은 22km에 이르고 70%가 산지로 구성돼 심한 높낮이와 경사가 급한 산이 많다. 서쪽 여자만은 굴곡진 해안선이 많아 청정 갯벌에서 생산되는 수산 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해넘이 경관 등 천혜의 자연자원을 지니고 있다.

과거에는 서쪽 여자만의 바다를 이용하여 벌교·보성·고흥 지역과 교류했다. 근대 사회 이후 덕양역을 통해 전라선의 순천·전주와 같은 도시를 비롯해 경전선의 벌교·보성·광양·하동 등의 장시와 교역했다.

소라면은 황새봉·가마봉·안심산·비봉산·중산 등의 산이 있다. 그밖에도 진등산·장군봉·소복등·가치산·시러봉·범바위산·소우산·망매산·북상두·성주산이 있다. 소라면 봉두 당촌 서북쪽 긴 골짜기 속에 있는 금대마을은 김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았다 해서 ‘김대 마을’을 구개음화 하여 ‘짐대 마을’이라고도 했다. 이곳에 있는 굴을 ‘금대굴’, ‘황새봉굴’이라 한다.

금대굴 정상은 황새봉으로 ‘관학산’이라는 이름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396m의 나지막한 산으로 지세가 험한 편이다. 정상에 오르면 광양만과 여자만이 눈 아래 펼쳐진다. 구름이 산허리를 휘감아 돌고 있는 모습을 보면 학이 나는 모습을 그릴 수 있다.

▲여수시 화정면 여자도 전경. (사진=뉴스탑전남)
▲여수시 화정면 여자도 전경. (사진=뉴스탑전남)

여자만은 화정면 여자도를 중심으로 보성군·순천시·여수시·고흥군으로 둘러쌓여있다. 면적 0.48㎢, 해안선 길이 7.5km로 대여자도와 소여자도의 2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 내에는 2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흩어져 북쪽의 경우 보성군 장도를 중심으로 해역에 전형적인 갯벌이 펼쳐져 있다. 만 안쪽의 순천만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에 둘러싸인 호수와 같은 곳으로써 드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다. 순천만으로 유입되는 하천인 동천 하류의 염생 습지에는 갈대가 자라고 있다.

1454년 완성된 『세종실록』에 포함된 『지지리』에 따르면 소라면의 땅이름은 고려 시대 향·부곡·소라는 특수 행정구역 가운데 부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소라부곡은 순천부 동쪽 30리에 있다”고 기록했다. 1897년 5월 15일 칙령 제21호 『전라남도 구역 내 전 좌수영에 여수군을 신설하는 일』을 결재하고 허가하여 세상에 널리 알렸는데 이전까지 순천부에 속했던 율촌·여수·삼일·소라 4개의 면이 여수군에 포함됐다.

칙령 제21호에 따라 새로운 행정구역으로서 군이 된 여수지역의 관련 자료를 정리해 1899년 전라남도여수군지가 간행됐다. 이 책에는 소라면의 이름이 덕안면으로 바뀌었고, 50개의 마을로 구성됐다. 소라면은 일제감정기 이전에는 ‘조라포면’이라 했다. 한자 ‘소召’는 ‘조’라고 읽기도 해 ‘조라포’ 라 쓰고 ‘조랏개’로 읽었다. 조개는 해산물을 담는 ‘조락’ 이란 의미로 지금의 관기들이 있는 해안선의 모양인 조락개에서 유래돼 ‘조’를 ‘소’라고 발음한 일제 강점기 이후에 ‘소라면’으로 읽고 쓰게 됐다.

소라면 소재지인 덕양을 중심으로 볼 때 서쪽의 가사리·달천·궁항·장척·복촌 마을 등은 여자만을 끼고 있어 반농반어적 성격이 강했다. 중앙과 동쪽 산줄기 주변 마을들은 농업이 중심 산업이었다. 1980년부터 2005년까지 인구가 감소했지만 2007년부터 시작된 죽림지구 택지개발 사업과 여수국가산업단지 확장에 따라 2010년부터 인구수는 증가했다. 소라면은 2020년 기준 8819세대 2만 558명이 거주하고 있다.

▲소라면 죽림리 차동 유적은 3곳으로 나누어 2008년 1월 7일부터 그해 7월 31일까지 시굴 및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소라면 죽림리 차동 유적은 3곳으로 나누어 2008년 1월 7일부터 그해 7월 31일까지 시굴 및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소라면 죽림리 차동 유적은 크게 3곳으로 나누어 발굴했다. 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 9기, 청동기~삼국 시대 주거지 83기, 움 2기, 가야계 고분 21기, 백제~고려 시대 돌덧널무덤 30기, 기와로 만든 무덤 1기, 조선 시대 널무덤 1기, 옹기가마 1기 등 청동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많은 숫자의 유구가 확인됐다.

4곳의 묘역에서 확인된 무덤방은 총 8기로 대부분 돌덧널무덤이다. 무덤방의 위치에 따라 땅을 깊고 넓게 파 무덤방이 완전히 땅속에 위치하는 경우 경사면을 계단 모양의 2단으로 파낸 이단 굴광식무덤방과 무덤방만 겨우 땅속에 위치하는 형태로 구분된다. 무덤방에서 출토된 돌창과 돌화살촉 9점으로 돌끌, 돌화살촉, 무늬없는 토기 등은 묘역 주변에서 주워 거둔 것이다.

돌화살촉은 자루 속에 들어박히는 뾰족한 부분인 슴베가 없고, 몸통 부분의 단면이 편평한 모양으로 청동기 시대 후기 중 전반기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고인돌과 관련된 유물은 무덤방에서 출토된 돌창과 돌화살촉 9점이 있다. 돌끝, 돌화살촉, 무늬없는 토기 등 묘역주변에서 주워 거둔 것으로 청동기시대 후기 중 전반기에 사용되었음을 추정됐다.

▲여수 죽림 택지개발지구에서 발견된 가야계 석곽묘. 
▲여수 죽림 택지개발지구에서 발견된 가야계 석곽묘. 

● 초기 철기 시대~삼국 시대 주거지와 널무덤

차동 유적 1·2지구에서 발굴된 초기 철기 시대~삼국 시대 주거지 60기의 긴축 방향은 등고선을 따라 평행한 것이 대부분이다. 일부 직각으로 만나는 것도 확인됐다. 주거지와 주거지가 겹치지 않은 편으로 후대 돌덧널무덤이 들어서면서 파괴된 것도 있었다.

1·2지구 주거지에서 전체가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아 정확한 평면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대부분 원형 또는 타원형으로 사각형 모양도 있었다. 긴축 길이 7m가 넘는 큰 주거지 7기 정도가 완만한 경사 지역에 있었다. 1·2지구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와 석기류 및 적은 양의 철기류로 토기류는 경질 무늬없는 토기부터 무늬를 두드려 넣은 토기까지 출토됐다.

석기류는 숫돌, 갈돌, 홈을 두드려서 떼어낸 홈돌이 확인됐다. 차동 유적 1·2지구의 초기 철기 시대~삼국 시대 주거지는 크게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경질 무늬없는 토기만 출토돼 토기는 다시 무늬없는 것과 무늬를 두드려 넣는 기법이 보태진 것으로 나뉘어 두 토기 사이에는 약간의 시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2단계는 경질 무늬없는 토기와 무늬를 두드려 넣은 토기가 함께 나타나는 단계로 전형적인 경질 무늬없는 토기와 적갈색 연질 및 회청색 경질 토기가 있어 경질 무늬없는 토기에서 무늬를 두드려 넣는 토기로 변화해 가는 전환기로 볼 수 있다. 만들어진 시기는 3세기대로 볼 수 있다.

가야계 널무덤은 모두 8기가 조사됐다. 평면 형태는 좁은 사각형으로 긴축 방향은 모두 등고선과 나란한 북동 남서로 무덤방의 규모는 길이 193~300m, 너비 56~120cm, 깊이 10~30cm이다.

▲죽림지구에서 발견된 가야시대 토기. (사진=여수시)
▲죽림지구에서 발견된 가야시대 토기. (사진=여수시)

널무덤은 가야계 돌덧널무덤과 섞여 분포하고 있으나 서로 겹치지 않도록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만들어졌다. 바닥에는 아무런 시설 없이 맨바닥을 그대로 이용했다. 토기류 1~2점, 철기류 1~2점을 껴묻었으나 예외적으로 철기류 7점 또는 옥 2점이 함께 출토된 예도 있다.

● 고려 돌덧널무덤

고려 돌덧널무덤은 총 8기가 확인됐다. 주로 백제 무덤보다 낮은 위치에 분포하고 있었다. 바닥은 모두 맨바닥을 그대로 이용하였고 쌓아 만든 방법에 따라 크게 3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Ⅰ유형은 판판하게 돌을 세워서 벽을 만들고 그 윗단에는 뚜껑돌의 무게를 분산하기 위해 직사각형으로 돌을 눕혀 쌓아 돌널의 너비는 비교적 좁은 형태이다. 대부분의 고려 무덤이 이에 해당한다.

Ⅱ유형은 구들장처럼 크기가 크고 판판한 돌을 아랫단 쪽에 세운 뒤, 나머지 공간은 깬돌을 채워 벽을 쌓고 판석을 뚜껑돌로 덮었다. Ⅲ유형은 부정형의 깬돌을 무질서하게 쌓아 만들었는데, 짧은 벽은 일부 판석형의 석재를 세우기도 했다.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에 있는 전라선과 여천선의 역. (사진=힐링 여수야)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에 있는 전라선과 여천선의 역. (사진=힐링 여수야)

● 덕양역

역참은 관원이 공무로 다닐 때 숙식을 제공하고 귀한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객사이다. 왕명과 공문서를 전달하거나 공공 물자의 운송 혹은 통행인 규찰 등을 위해 고을 곳곳에 이를 설치했다. 덕양 역참은 여수와 돌산으로 들어가기 위한 숙박시설이었다. 역은 고려와 조선 시대 국가에서 운영하던 교통 시설로 지역의 역참 관리는 역승 또는 찰방 이 맡았다. 역의 실무는 역리 등이 담당했다. 이들은 신분을 세습하면서 역일에 종사했다.

그 대가로 얼마의 땅을 받고 이를 경작하여 제반 경비에 충당했다. 이들이 살았던 역촌은 촌락이 형성돼 큰 시장이 발달했다. 덕양역은 전라좌수영 동헌으로부터 30리 지점에 있었다. 오군수(오횡묵 1897년 4월 초대 여수군수)가 찾았을 때 덕양 역참은 갑오개혁을 계기로 역참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한 뒤였는데 읍지에는 “덕양역은 서쪽으로 30리에 있었는데 폐지되었다”고 기록됐다.

▲역의암은 기생과 관계있는 바위라 해서 ‘여기암’이라고도 불렀다. (사진=여수시)
▲역의암은 기생과 관계있는 바위라 해서 ‘여기암’이라고도 불렀다. (사진=여수시)

● 역의암

역의암은 덕양 북쪽 냇가에 있고 여기암이라고도 한다. 이는 역의암의 같은 소리, 다른 뜻이다. 임진왜란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같은데, 주인공이 다르다. 여기암 주인공은 기생이었으나 역의암 주인공은 충무공과 주민들이다.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대적하자니 중과부적이었다. 충무공은 마을 사람들을 동원했다. 그리고는 푸른 옷과 붉은 옷을 입혀 군사들과 함께 계속해서 바위를 돌게 했다. 아군을 많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책략이었다.

이를 본 왜군들이 거꾸로 대적할 수 없겠다고 판단하고 도망가 버렸다. 작전은 승리였다. 이래로 이 바위 이름이 옷을 바꿔 입었다는 역의암이 됐다. “작은 나라는 진실로 큰 나라를 대적할 수 없고, 적은 숫자로 진실로 많은 사람을 대적할 수 없으며, 약한 나라는 진실로 강한 나라를 대적할 수 없다”맹자가 한 말이다. 과부적중, 중과부적이 여기에서 나왔다.

지금은 역의암을 바라보면 방치된 바위일 뿐이다. 이 바위를 배경으로 언제 세웠는지 2기의 불망비가 나란히 앞을 가로막고 있다. 오 군수는 역의암을 오히려 큰 전공을 세운 단단하고 아름다운 돌이라 했다.

● 동학 농민 운동

1994년 5월 8일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해 각 지역에 농민 자치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행정과 치안을 맡게 되자 금구 출신 김인배는 전남 동부 지역 농민군과 함께 순창을 거쳐 순천 지역으로 돌아와서 6월 순천부를 장악한 뒤, 영호도회소를 설치했다. 1894년 7월 22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여 양과 왕비를 감금하고 친일 정부를 세우게 하자 농민군들은 일본을 물리칠 것을 주장하며, 제2차 봉기를 결정했다.

순천의 영호도회소도 음력 8월 말부터 새로운 활동인 본격적인 무력 투쟁을 전개하게 됐다. 농민군의 활동이 강화되자 조선 정부에서는 대구판관 지석영을 토포사로 임명하여 진주와 하동 쪽의 농민군을 공격했다. 일본은 충청·전라·경상도의 3방면으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이는 동학농민군을 전라도의 서남쪽 구석으로 몰아 공격하고자 한 것인데, 여기에는 순천·흥양·영암·나주 등도 포함됐다.

일본군은 11월 5일에 지석영이 이끄는 관군과 합류해 경상도 쪽에서 영호도희소를 압박했다. 따라서 영호도회소는 일본군과 광군 및 최수영에 포위되는 형상이 됐다. 농민군들이 목숨을 걸고 좌수영을 포위하여 공격하자 전라좌수사 김철규는 일본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일본군과 함께 농민군을 진압하고자 했다.

지원 요청을 받은 일본군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농민군의 진압에 앞장섰다. 좌수영 점령을 위해 모인 전남 동부 지역의 농민군은 일본군과 좌수영군대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하자 한 부대는 영호도회소의 거점이었던 순천으로 물러났다. 또 한 부대는 화양면으로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여수 소라면 여자만 노을. (사진=여수시)
▲여수 소라면 여자만 노을. (사진=여수시)

● 여자만 갯노을길

남파랑길은 부산의 오륙도에서 시작해 전남 해남 땅끝마을까지 이어지는 1470km의 걷기 여행길로 모두 90개 구간이 있다. 59코스는 ‘여자만갯노을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가사리~복산~대곡~달천~궁항 마을 등 소라면이 중심이다. 여자만은 동쪽 여수와 서쪽의 고흥에 둘러싸인 바다로 드넓은 갯벌과 구불구불한 리아스식 해안을 자랑한다.

특히 1~2등급의 청정해역을 유지하고 있어서 각종 해류와 어류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과 흑두루미를 비롯해 많은 철새가 겨울나기를 하는 천혜의 해양 환경을 지녔다. 가사리 생태공원은 고즈넉한 어촌 마을과 드넓은 갯벌을 비롯해 쪽빛 바다와 리아스식 해안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이곳은 바다와 하천이 만나는 지역으로 넓은 습지가 이루어져 있다.

바람이 불면 갈대 부딪히는 소리와 해넘이 시간에는 갈대에 비친 노을과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에 붉은 해가 더해져 환상적인 경치를 제공하여 2018년 국토교통부에서 남해안 오션뷰 20선에 정해졌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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