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숙 열사, 창무리에서 태어나 3월 10일 만세 운동 펼쳐 
백야곶 봉수대 '전라좌수영의 최전방 통신 기능 담당'
화양농공단지가 있는 곳은 '온돌고개', 화동삼거리-안정리 방향은 '반돌고개'로 불러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펀집자주)

▲화양면은 국도 7호선인 백리섬섬길이 공정마을에서 화정면 조발도와 조화대교로 연결돼 고흥까지 이어진다. 사진은 바다와 섬이 연결된 여수섬섬길. (사진=여수시)
▲화양면은 국도 7호선인 백리섬섬길이 공정마을에서 화정면 조발도와 조화대교로 연결돼 고흥까지 이어진다. 사진은 바다와 섬이 연결된 여수섬섬길. (사진=여수시)

㉓화양면

화양면은 유인도 1개, 무인도 17개, 해안선 114.46km로 서쪽 여자만과 남쪽의 가막만을 향해 뻗어 나온 반도로 천혜의 어장을 형성할 수 있는 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과거 공동 어장을 중심으로 한 연근해 어업과 최근 양식업의 증가는 화양면의 지리적 특성을 잘 활용했다.

가막만·장수만·여자만으로 둘러싸인 화양면은 국도 7호선인 백리섬섬길이 공정 마을에서 화정면 조발도와 조화대교로 연결돼 고흥까지 이어진다. 국지도 22호선이 확장돼 교통 인프라가 구축됨으로써 여수 관광의 새로운 거점이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지리적 위치 때문에 돌산 군내리에 방답첨사진이 만들어지기 이전까지 돌산포 만호진이 있어 이 지역의 군사적 거점으로 활용됐다. 화동마을을 중심으로 백야곶 목장이 운영됐다. 또 장등과 원포 마을 뒷산에 있는 봉화산 봉수는 돌산 방답진 봉화산에서 받은 봉수를 고흥 팔영산~장흥 천관산~진도 여귀산 등을 통하여 서울까지 바로 연결하던 직봉 제5거의 하나였다.

과거 여천군에 속했던 화양면은 서쪽 여자만을 이용해 고흥 지역 및 화정면, 남쪽의 가막만을 통하여 돌산과 남면 등과 교류했다. 1998년 4월 3여 통합에 따라 여수시의 행정 구역이 됐다. 화양면은 오랜 침식을 받은 육지가 많고 구릉성 산지와 만의 해안선 사이에 긴 고돌산 반도가 형성되어 있다. 해안은 침강 작용과 해수면 변동에 따라 만의 입구가 길고, 해안선의 드나듦이 복잡한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이다.

화양면의 산지는 해발고도 400m 이하의 낮은 산이 곳곳에 자리해 산과 산 사이가 협곡을 이루어 넓은 평야가 발달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원을 이룰 수 있는 큰 산이 없어 작고 좁은 하천들이 분포하고 있다. 화양 지역은 큰 산이 없으므로 하천 발달이 미약하다. 농업용으로 이용되는 하천은 옥적천과 화양천 등이 있다. 비봉산을 수원으로 하는 옥적천은 북쪽으로 흐르다 여자만으로 들어가는 약 5km의 하천으로 하구에 간척지가 조성됐다.

화양천은 고봉산에서 물길이 비롯되어 남서쪽 화동 들판을 꿰뚫어 흐르다 여자만으로 들어가는 약 4.5km의 하천으로 중류에 화동 저수지가 있다. 자매 마을 바닷가에는 약 200년생 느티나무 90여 그루와 400여 그루의 굴참나무, 팽나무 들이 방풍림으로 조성됐다. 이 방풍림 앞에 펼쳐진 바다에는 넓은 갯벌이 형성되어 있는데, 장수만의 갯벌은 그 보전 상태가 아주 좋아 생태 기행과 환경 탐사에 적합한 곳이다.

▲1872년 제작된 순천고돌산지도에 당시 화양면 지역의 마을이 표기되어있다. (사진=여수시)
▲1872년 제작된 순천고돌산지도에 당시 화양면 지역의 마을이 표기되어있다. (사진=여수시)

화양면이라는 땅이름은 1897년 여수군이 새롭게 만들어질 때 처음 가지게 됐다. 이곳은 조선 시대 백야곶목장부터 시작해 곡화목장이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태조가 서울에 도움을 정한 뒤에 광진의 들판에 살곶이목장을 설치했고, 세종이 정자를 세우라고 했다. 정작 이름이 없어서 유사눌이 이름을 ‘화양정’으로 지었다.

따라서 화양면이라는 땅이름은 근대 사회에 들어 행정구역의 개편과 더불어 만들어졌으나, 과거 목장이 있었던 역사성이 반영되어 평화를 지키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어진 임금들의 고사가 담겨 있다. 1789년 작성된 『호구총수』에는 장성려·항도·소제·사장·호두·초말·고성내고성외·나지포·돌고개·안정려·흘포·세포려·백야도·절이도·대화도·소화도·사도·낭도·두음방도·조발도·장등·장척동·수문동·자을매려·벌구미려·이목구미려·당동·서이산려·옥적동·삼이대려·오동 천·창무정·신대려·성본려·상관·하관·죽림려·신송려·상금곡·하금곡·미지려가 소라포면 상도에 포함됐다.

지금의 안산·소호동·화정면의 여러 섬과 소라면의 일부 를 비롯해 화양면 전체가 소라포면 상도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화양면은 서쪽 장수만, 남쪽 가막만, 북쪽 여자만으로 둘러싸여 바닷가에 있는 마을들은 반농반어적 경제 활동을 했다. 내륙에 있는 마을들은 농업을 중심 산업으로 삼았다. 농업은 논농사를 통해 벼를 재배하는 것이 중심으로 밭농사는 1930년대까지 일제가 남부 지방에서 면화 재배를 늘리는 정책에 따라 목화를 중심으로 잡곡을 함께 재배하다가 남면 금오도에서 고구마가 전래 돼 이를 얇게 썰어서 볕에 말려 판매했다. 수산업의 경우 가막만 멸치잡이와 새고막 양식, 장수만 굴양식, 여자만에서 고막을 비롯한 각종 패류를 양식하고 있다.

▲여수시 화양면 화동리에 있는 청동기시대 무덤군. (사진=거북선여수)
▲여수시 화양면 화동리에 있는 청동기시대 무덤군. (사진=거북선여수)

● 청동기 시대

화양면은 남쪽 가막만, 북쪽 여자만, 서쪽에 장수만과 마주하고 있다. 이 지역의 고인돌 대부분 가막만을 바라보는 곳에 분포했다. 이는 농경 생활과 관련되어 태양을 숭배하는 의식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화양면의 고인돌은 해가 뜨는 가막만을 바라보게 배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화양 농공단지가 있는 곳을 예전에는 온돌고개라 하고, 화동 삼거리에서 안정리 방향으로 가는 길을 반돌고개라 했다. 반돌고개 고인돌은 힛도까지 연결되는 도로를 만들면서 훼손됐다. 화양농공단지가 세워지기 전 온돌고개 고인돌에서 많은 돌화살촉을 주었다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볼 때 많은 고인돌이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2000년대 초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서 화양면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을 조사한 결과 화양면에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 가운데 화동 안골 (바) 유적은 남-북 1열로 배치되어 있다. 나진 웅동 고인돌은 남-북 2열 구조를 지니면서 각 열에 이중 개석식 고인돌을 1기씩 두고 있다.

▲대곡화목관 선정비. (사진=거북선여수)
▲대곡화목관 선정비. (사진=거북선여수)

고인돌이 개발 때문에 훼손되는 경우가 많은데 화동리 안골 마을은 경지 정리를 하면서 논에서 흙을 걷어 내자 고인돌 덮개돌로 추정되는 5개의 바위가 확인되었으나 모두를 엎어 버렸다. 화동 (나) 유적에는 2기의 고인돌 덮개돌에 조선 시대 화양면 지역에 있었던 곡화목장 감목관 선정비를 새겨 놓았다. 1기는 3명, 다른 1기는 2명에 모두 5명이 기록되어 있다. 화양면 고인돌 가운데 화동리 안골과 소장 고인돌은 2002년과 2003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이 이루어졌다.

안골 유적은 해발 324mm의 안양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산기슭 아래에 있었다. 조사 전에는 논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이 유적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작은 하천을 따라 1km 정도 내려가서 소장 유적이 자리하였는데 간척되기 전에는 유적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화동리 안골 고인돌은 발굴조사 결과, 63기의 매장 주체부가 확인되어 훼손된 부분을 고려한다면 만들어질 때는 적어도 70기 이상의 무덤방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돌산포만호진

돌산포만호진은 화양면 용주리 고진마을에 있던 조선 시대 수군진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관하 오관·오포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전라좌수영의 서쪽 30리 거리에 있어 전라좌수영이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던 수군 기지였다. 수군진이 언제 설치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에 돌산만호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아 돌산만호진은 고려 말 또는 조선 초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수에는 전라도 도만호아래 삼일동 신덕 또는 낙포에 진례만호가 있었다. 화양면 용주리에 있던 돌산만호가 왜구 방어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세종 5년에 진례만호는 여수시 국동으로 추정되는 내례포로 옮겨 내례만호가 됐다. 세종 5년에 설치된 내례만호가 1479년 전라좌수영으로 승격함으로써 돌산포만호진은 자연스럽게 전라좌수영 아래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 무렵 수군들은 항상 바다에 떠 있어 병장기도 바닷바람에 녹이 슬어 손실이 심했다. 따라서 성종 때에 들어와서 수군진에 성을 쌓아 무기를 보관하고 수군들도 육지에서 쉬게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 1485년 연해안 수군진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돌산포만호진도 1490년 6월 성이 완성됐다. 돌산만호진성이 쌓아지고 32년 뒤인 1522년 남해안 수군진의 일부를 보강과 정비 할 때 지금의 돌산읍 군내리에 방답진을 새로 만들면서 돌산포의 군선을 그곳으로 옮김으로써 돌산포만호진은 없어졌다.

▲돌산포만호로 설치될 때 축성된 고돌산진.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돌산포만호로 설치될 때 축성된 고돌산진.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11년 돌산포진에 고돌산진이라는 새로운 수군진을 만들어 지휘관으로 권관을 두고 그 후 별장이 맡게 했다. 고돌산진에 소속된 병사들은 대부분 지금의 화양면에 살던 사람들로 이들은 곡화목장 안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곡화목과 군사적으로는 전라좌수영, 행정적으로 순천부에 의해 많이 수탈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돌산만호진성은 뒤에 수박등을 두고, 산 위에서부터 바닷가에 이르는 완만하게 경사진 곳을 이용하여 성곽을 두르고, 북쪽 고외 마을로 통하는 길목에 북문을 냈다. 남문과 수구문 밖이 바로 바다로 연결되어 그곳에 굴강을 만들었지만, 성은 허물어지고 굴장은 메워져 옛 모습을 찾기 힘들다.

돌산포만호진성에는 이 성을 쌓기 위해 여러 고장에서 부역 나온 사람들이 자신들이 맡은 구역을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 흥양·장흥에 등의 땅이름이 성돌 군데군데에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새로운 도로가 나면서 모두 없어졌다.

● 백야곶목장

조선 시대 나라에서 세운 국립 목장은 병조의 외청격인 사복시의 감독을 받았다. 태조 때 사복시는 임금이 타는 수레와 말·소나 말을 먹여 기르는 일 등을 담당했다. 세종과 단종 때 전라도 전체의 목장을 관리하는 감목관을 두고 각 지역에 있던 목장은 그 지방의 행정을 맡았던 수령이나 군대를 지휘하는 만호 등이 관리하게 했다.

백야곶목장의 설치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세종실록』의 기록을 볼 때 1434년 이전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백야곶 목장이 만들어진 초기의 감목관은 돌산포만호진의 만호가 겸했을 것으로 보이지, 『충무공전서』에 따르면 감목관을 따로 파견하기도 하였으며 순천부사가 맡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 곡화목장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백야곶목장이라는 이름과 함께 섞여 사용됐다. 곡화목장은 쌍봉 소호 바닷가로부터 화양면 오천 마을까지 곡화목장분 계성을 만들, 그 서쪽 화양반도를 목장으로 삼아 말을 놓아서 길렀다. 당시 목장에서 길렀던 말은 1027필, 목자는 446명이었다.

소호 바닷가로부터 창무 마을을 거쳐 오천 마을까지 돌로 성을 쌓고, 봄에는 통구미산, 여름 이영산, 가을 천마산, 겨울 서이산 등 계절에 따라 말들을 옮겨 길렀다. 밤이면 말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이웃 장수 마을까지 1km의 산등성이에 등불을 밝혔다. 곡화목장의 정문은 어목문이었다. 조선 시대 창무 마을 일대는 군마 사육장이었다.

곡화목장은 오 횡 묵(1897년 4월 초대 여수군수)이 여수에 부임하기 3년 전인 1895년에 폐지됐다. 어목문은 전라좌수영에서 서쪽으로 30리, 여수시 화양면 창무 마을 입구에 있던 곡화목장과 경계가 되는 문으로 지금도 이곳을 ‘문구지’, ‘뭉꾸지’라 부른다. 그유구는 현재 소호동 소제 마을로부터 소라면 관기 마을까지 약 3km에 걸쳐서 거의 일직선 상으로 남아 있다.

▲여수시 화양면 장수리와 안포리 사이 봉화산에 있는 조선시대 봉수대. (사진=여수시)
▲여수시 화양면 장수리와 안포리 사이 봉화산에 있는 조선시대 봉수대. (사진=여수시)

● 백야곶 봉수

화동 산전 마을 뒷산을 오르면 옛날 백야곶 봉수가 있었던 흔적으로 연기나 불을 올려 신호를 보내던 시설인 봉돈을 볼 수 있다. 이 봉수는 서울까지 곧바로 가는 직봉으로 돌산방답진에서 신호를 받아 고흥 팔영산으로 연결하던 봉수였다.

백야곶 봉수의 위치에 대해 『승평지』, 『동국여지승람』, 『호남읍지』 등의 옛 문헌에 “순천부 동쪽 100리에 있으며, 서쪽으로는 고흥 팔영산, 동쪽으로 돌산도와 응한다”고 기록됐다. 화양면 장수리~안포리 사이 해발 371m의 봉화산에 있던 이봉수에는 봉군 6명, 오장 2명을 배치했다.

봉수대에 직접 배치되어 있던 하급 장교인 오장과 봉졸인 봉수군은 모두 봉수대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을 임명했다. 다른 군역에 종사할 수 없었고 오직 봉수에 관련된 일에만 전념하도록 했다.

또 봉수군이 노약하거나 질병으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때 사사로이 다른 사람과 바꿀 수 없었다. 만일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을 세웠을 때 봉화군이 근무에 태만하게 하여 봉화가 통하지 않았을 때도 처벌을 받아야 했다. 감독관인 수령이나 진장들도 책임을 져야 했다. 상황의 긴급함에 따라 가해지는 형벌의 가볍고 무거움이 달랐다.

1447년 기준으로 살펴보면 국방의 최전선에 설치됐던 연변 봉수의 연대는 높이 7.5m, 둘레 21m로 쌓았다. 연대 밑의 각 면은 9m가 되도록 하였고 주위에 외침을 막기 위해 폭 3m, 깊이 3m의 참호를 판 뒤, 위를 날카롭게 깎은 약 1m의 말목을 박았다. 이렇게 방비를 한 연대 위에 집을 지어 무기와 생활용품을 보관하도록 했다. 내지 봉수는 봉화를 올리는 높이 3m의 아궁이만 설치하게 했다.

● 화양면의 동학 농민 운동

1894년 11월 10일 일어난 여수 지역 동학 농민 운동은 종교·정치적 측면과 더불어 전라좌수영과 영호도회소 간의 군사적 역학 관계, 순천부와 좌수영 지역민과의 대립, 곡화목 감목관의 착취에 대한 반감 등의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화양면 동학 농민 운동은 화양면과 돌산 죽포 주민들간 대립 관계에 대한 증언으로 전해지고 있다. 첫 번째는 1894년 11월 10일에 일어났다.

첫 번째 사건은 조세 징수 과정에서 감목관들의 횡포가 돌산 사람들을 자극했거나, 동학 농민군들이 전라좌수영을 공격하는 데 필요한 군수물자를 죽포에서 강제로 거두었기 때문에 갑오년 동짓달 초열흘날(1894.11.10.) 돌산 사람들이 곡화목을 공격한 것을 알 수 있다.

▲화양 도집강 심송학이 살았던 봉오마을. (사진=네이버 블로그 탁암)

심송학은 전남 동부 지역의 동학 농민군 조직이었던 영호도회소에서 도집강이라는 상부 조직에 속했다. 하동 전투까지 참여할 정도로 적극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심송학이 수천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화양면에 있던 고돌산진과 백야곶 봉수뿐만 아니라 돌산 방답진을 공격하여 무기와 전쟁에 필요한 물품을 강제로 거두였을 때, 죽포마을이 포함됐다. 군기를 확보한 농민군들은 11월 10일 좌수영 공방전에 참여했다.

좌수영 공방전에 참여하기 위해 화양면 농민군들이 여수로 이동함으로써 화동마을을 비우자 이때 돌산 주민들이 화동을 공격해 민가와 곡화목의 건물들을 불태워버렸다. 불에 탄 흙과 도끼 자국 등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두 번째 시기는 관군이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들어온 때로 그해 12월로 추정된다. 11월 10일은 순천에 있던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이 전라좌수영을 본격적으로 공격한 날로 가장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16일과 20일에도 좌수영 공방전이 있었다. 좌수영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좌수사 김철규는 11월 23일과 25일, 일본 쓰쿠바 함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11월 26일 쓰쿠바 함대의 1중대 병력 200명과 인근 섬에 살던 일본 어부를 합하여 좌수영군과 함께 농민군을 양쪽에서 공격했다.

곡화목장분계성은 화양면 농민군들의 방어 거점으로 활용될 수 있었지만, 과거 곡화목 지역은 반도로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고흥·보성 지역 등의 농민군은 일본군과 중앙군을 비롯해 좌수영 군대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거문진과 같은 섬에 있는 수군진에서도 농민군이 들어올 것에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호도회소가 완전히 무너지자 전라좌수사 김철규는 1894년 12월 중순부터 동학농민 운동에 함께 했던 사람들을 찾아내 무자비하게 죽였다

화양면에 들어온 좌수영 군대는 순천과 광양 등지의 농민군을 진압한 다음 소수의 좌수영 군인들과 어업을 위해 이 지역 섬에 살다 일본군과 덕양 전투에 참여했던 일본인을 비롯해 돌산 주민도 일부 포함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화양면 농민군을 이끌었던 사람은 화동에 살던 34세의 김지홍과 서촌 마을에 살던 김지홍의 사촌 동생이었던 28세의 김처홍으로 추정된다.

화양면 농민군들이 죽포에 가서 농민운동에 필요한 군수품을 강제로 거둔 것에 대한 보복으로 돌산 주민들이 화동을 공격해 곡화목 관아 등을 불태웠지만, 김지홍은 당시 좌수영 공방전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11월 26일 덕양역 전투에서 패배하고 화양면으로 돌아온 농민군들은 세력도 크게 줄어 위축됐다. 12월 중순부터 좌수사 김철규의 농민군 색출과 살해, 관군과 일본 어민으로 추정되는 일본군이 개입한 두 번째 시기에 화형당한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여수 출신 독립운동가인 윤형숙 열사는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헌병 군도에 왼팔 상단부를 절단 당했다. 만세운동이 호남 전 지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고, 2004년 건국포창을 받았다. 묘소는 화양면 창무리에 자리하고 있다. 
▲여수 출신 독립운동가인 윤형숙 열사는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헌병 군도에 왼팔 상단부를 절단 당했다. 만세운동이 호남 전 지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고, 2004년 건국포창을 받았다. 묘소는 화양면 창무리에 자리하고 있다. 

● 윤형숙 열사

윤형숙 열사는 1900년 여천군 화양면 창무리 4통 5호에서 윤치운씨의 3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치운은 한학자였다. 윤형숙 열사가 7세 되던 해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아버지 윤치운은 어린 딸을 순천에 있는 미국 남장로고 선교사 집에 맡겨 초등학교를 마치게 했다. 열사는 지금의 순천 매산여고인 성서학원을 마친 뒤 18세에 광주 지역 최초의 여성 중등 교육 기관인 수피아여학교, 지금의 수피아여고에 진학했다.

윤형숙 열사는 ‘반일회’'라는 모임에 들어가 학교 행사에 적극 참여하고 연극을 무대에 올려 민족의식을 키우고 있을 때, 서울에서의 3·1 만세 운동 소식을 들었다. 광주에서도 3월 10일 만세 운동을 펼치기로 하고, 오후 3시쯤 큰일을 벌일 장소인 작은 장터로 모이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과 수피아여학교·숭일학교 학생들은 광주천, 일반 시민은 지금의 광주우체국 앞에서 황금동으로 가는 길인 서문통, 농업학교 학생과 군중은 충장로 2가에서 충장파출소에 이르는 북문통을 거쳐 이곳으로 약 1000여 명이 모였다.

누군가 ‘대한 독립 만세’를 먼저 외치자 사람들의 분노를 높이려는 글과 태극기가 머리 위로 뿌려졌다. 몇몇은 지팡이처럼 짚고 있던 막대기에 태극기를 매달고 휘저었고 쌀장수는 됫박을 든 채 시위대에 따라붙었다. 걸인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장타령 대신 만세를 불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 헌병과 경찰은 군중의 기세에 눌려 시위를 막지 않았다. 하지만, 시위대가 지금의 동구 금남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있는 광주지방법원 앞을 지나 광주경찰서 쪽으로 향하자, 총과 칼을 휘두르며 사정없이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과정에서 일본 기마 헌병이 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던 운형숙열사의 왼팔 위쪽 부분을 칼로 내리쳤다. 잘려나간 팔은 밝은 피를 뿌리며 땅에 떨어졌다. 갑작스럽게 많은 피를 흘린 열사는 잠시 정신을 잃기도 했지만, 떨어져 나간 손은 여전히 태극기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온몸이 핏물에 젖은 열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오른손으로 잘려나간 일환이 움켜쥐고 있던 태극기를 뽑아 든 뒤 더 큰소리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과정에서 100여 명이 경찰서에 갇히게 됐다.

윤형숙 열사
▲윤형숙 열사

한쪽 팔을 잘리고도 만세를 외친 윤형숙 열사의 행동에 일본 군인과 경찰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응급 치료를 받은 그녀는 일본 경찰의 조사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며, 너를 조종한 배후는 누구냐?”며 압박하는 경찰에게 윤형숙 열사는 “나는 보다시피 피를 흘리는 조선의 혈뇨다”며 꼿꼿하게 버텼다.

한쪽 팔을 잃은 윤형숙 열사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한 채 심문을 계속 당했다. 일본 경찰은 굽히지 않는 그녀를 가혹하게 고문해 오른쪽 눈까지 멀게 했다. 징역 4개월을 선고하고, 열사가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4년간 다른 사람과 만나지 못하도록 떨어뜨리면서 괴롭히기를 그치지 않았다.

윤형숙 열사는 이 같은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왼팔은 조국을 위해 바쳤고, 나머지 한 팔은 글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바친다”는 신념으로 헌신적인 삶을 이어갔다. 함경남도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마친 뒤 전라북도 전주로 내려가 기독교 학교와 전북 고창의 유치원 등에서 어린이 교육에 힘썼다. 건강이 더 나빠지자 오빠가 사는 여수로 내려와 봉산학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여수제일교회와 중앙교회 전도사로 활동했지만 역사는 윤형숙 열사에게 가혹했다.

‘외팔이 선생’으로 불리며 아이들을 가르치던 그녀는 1950년 6:25 한국전쟁이 터져 인 민군이 여수를 점령하자 남면 심포마을로 피신하였다. 예수를 믿게 하는 전도사라는 이유로 내무 서원에게 잡혀 갇혀 있던 중 서울이 수복되던 날인 1950년 9월 28일 지금의 정수장인 둔덕동 과수원에서 손양원 목사와 함께 인민군들의 총에 맞아 5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윤형숙 열사의 숭고한 삶은 죽은 뒤 54년이 지나서야 가치를 인정받았다. 2004년 정부는 그녀의 나라 사랑하는 정신을 기려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화양면 용주리 비봉산 중턱에 위치한 사찰. 비봉산에서 내려온 용이 절을 지나고 고내마을 앞 바다로 들어갔다 해서 용문사라 이름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사진=여수시)
▲화양면 용주리 비봉산 중턱에 위치한 사찰. 비봉산에서 내려온 용이 절을 지나고 고내마을 앞 바다로 들어갔다 해서 용문사라 이름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사진=여수시)

● 용문사

용주리 건너편에 비봉산이 있고 이 산 중턱에 1962년 조계종 산하의 화엄사 말사로 등록된 용문사가 있다.

1967년 4월 주지 스님이었던 혜월에 의해 신축된 관음전을 비롯해 칠성각, 요사 등 3동의 건물이 있는데 배치 형태는 무탑식 산지 가람으로 일주문이 없고, 요사채가 남남동의 좌향, 오른쪽에는 종각, 뒤로 관음전, 다시 축대를 쌓아 칠성각을 남동향으로 배치했다.

사찰에서는 가을밤 힐링 산사음악회가 열린다. 종교를 떠나 누구나 편안하게 음악을 즐길 수 있다. 정중하고 가라앉은 산사의 분위기이지만 흥겨운 풍물이 곁들여지기도 한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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