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마을' 소나무가 많고, 마을 앞 나무 밑에 샘이 있어 식수와 빨래를 해 송정
'취적마을' 등묘산과 적대산이 징을 치고 피리부는 형태와 같다 하여 적대를 분다 해 불 취吹와 피리 적笛을 따 취적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여수시 율촌면 여수공항. 1971년 5월 활주로 및 계류장을 완성하고 8월 25일 여수공항 임시청사가 건립됐다. 이후 1990년 6월 한국공항공사 여수지사가 설립한 뒤 1992년 12월 여수~서울간 여객기가 취항됐다. (사진=여수시)
▲여수시 율촌면 여수공항. 1971년 5월 활주로 및 계류장을 완성하고 8월 25일 여수공항 임시청사가 건립됐다. 이후 1990년 6월 한국공항공사 여수지사가 설립한 뒤 1992년 12월 여수~서울간 여객기가 취항됐다. (사진=여수시)

㉒율촌면

율촌면은 여수와 순천을 연결하는 목에 해당하는 위치해 동쪽에 광양만, 서쪽으로는 여자만을 끼고 보성·고흥과 바다를 경제로 마주하고 있다. 지리적 특징은 해안선의 드나듦이 복잡하고 섬이 많아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고 있다. 광양만과 여자만에 넓게 발달한 갯벌에는 패류, 어족 등 수산 자원이 풍부하다.

율촌 지역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인 고인돌은 약 18개 떼 280기가 보고 됐다. 그 중 치동 마을에는 99기가 몰려 있어 여수 지역 단일 고인돌 때로는 최대를 나타내고 있다. 산수리 왕바위재에는 860x580x210cm 크기의 고인돌이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가장리 평촌 마을에 문화 마을을 만들면서 3기의 고인돌이 발굴되어 2점의 돌칼이 출토됐다.

삼국 시대 당시 백제의 삼평군 아래 원촌현, 통일 신라 시대에는 해읍현에 속했고 고려 시대에 들어 여수현의 율촌 부곡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에는 교통·통신 조직이었던 역원 가운데 성생원이 이 지역 신산 마을에 있었다. 한편 광양만은 고려 시대에는 왜구가 침입해 왔을 때, 이를 물리친 정지 장군의 관음포 대첩과 임진왜란 때 왜교성전투 및 노량해전의 중심지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이 지역의 성생원장을 중심으로 장시가 개설되면서 주변 석보장·내례포장·돌산장·화양면의 나지개장 및 현재 순천 지역의 순천부장·해창장 뿐만 아니라 구례, 남원까지도 교류하고 있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여수의 다른 지역에서는 파악하기 어려운 접주와 성찰 등 동학 조직이 확인됐다. 전남 동부 지방에서 가장 먼저 크리스트교가 전래 돼 1905년 장천교회가 설립되는 등 종교 활동에서도 지리적 특징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앵무산은 여수 율촌면 산수리와 순천 해룡면 해창리에 걸쳐있는 산이다. (사진=수헌의 산이야기 13392546)
▲앵무산은 여수 율촌면 산수리와 순천 해룡면 해창리에 걸쳐있는 산이다. (사진=수헌의 산이야기 13392546)

율촌면에서 가장 높은 산은 호랑산으로 수암산·앵무산·국사봉 등으로 주로 400m 이하의 낮은 산지 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앵무산은 여수 율촌면 산수리와 순천 해룡면 해창리에 걸쳐있는 산이다. 여수반도 영산·조산·주맥으로 불리며 여수의 주산으로 여겨져 왔다. 예로부터 열두 산하를 거느린 산이라는 의미로 ‘앵무산 12머리’라 했다. 12머리란 새머리(봉두)·뱀머리(외청)·누에머리(외천)·학머리(김대)·여우머리(호두마을)을 가리킨다.

취적산은 율촌에 있어 적대산이라고도 하는데, 국사봉 줄기가 동으로 뻗어 등묘산과 적대산을 형성했다. 등묘산은 징을 치고, 적대산은 피리를 부는 형국에서 이름을 취했다. 취적산 정상에 오르면 광양만이 눈 아래 호수처럼 펼쳐진 광경을 볼 수 있다.

율촌 지역은 큰 산이 없으므로 하천 발달이 미약하다. 율촌천·평촌천·연화천의 준용하천과 청산천 등 10개의 작은 하천이 있다. 그중 준용하천을 제외하고는 비가 올 때 급류가 바다로 유입하고 가뭄이 들면 말라버리는 건천 형태로 농사를 지을 때 저수지와 지하수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저수지의 경우 청산리 외청 마을에는 지금은 ‘감자보’라 부르는 감사보가 있다. 전라감사가 청대천에 저수지를 설치했기 때문이라 전해진다. 일본인들은 율촌 지역에서 쌀과 면화 등 농산물을 수탈하기 위하여 1920년대부터 신풍·조화·광암·두봉·취적 마을 등에 간척사업을 실시했다. 다카세 농장과 미야다 농장이 대표적이다.

1861년 간행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율촌 앞바다에 상개산·하개산·궁·사안·장고·장·녹·다노·말개 등의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사안도는 방조제를 만든 이후 유지가 되었다.

다 노도는 외진 간척 사업 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해안 침식 지형으로서 해식애와 파식대는 율촌 지역의 송도, 대도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구암 마을에 있는 거북바위는 바위 가운데 있었던 자갈류가 해식 등의 작용으로 빠져나간 뒤, 염분 등에 의해 계속 풍화되어 형성된 타포니가 있다.

▲대동여지도 여수(율촌)부분. (사진=여수시)
▲대동여지도 여수(율촌)부분. (사진=여수시)

‘율촌’의 땅이름은 『세종실록지리지』 나오는 ‘율촌 부곡’이 가장 빠른 기록이다. 1789년 작성된 『호구총수』에는 율촌면의 험산려·신대촌려·수전·율동려·관음동·대초·동교·사항·장도·송도·조화·호산·월임청대·조촌·삼궁동·가장·평촌·중산·고덕·양수채·합동·상려·입촌·내리·삼산·반월·이당항·화노미마을과 소라포면 경원 때 하도에 속한 장전려·외당두·중흥려·구영포려·구암려·조목려·학서려·소용당·성생원·사당동·수문포·외진려·취적산 마을이 기록됐다.

또 1872년 제작된 지방도 가운데 『순천부지도』에는 신대·평여·주용·봉두·삼산·중산·화노·반월·동교·사항·장도·송도의 11개 마을과 소라포면에 속한 취적·원촌·산곡·장전·구암·수문 마을이 표기됐다.

율촌의 인구수는 1975년 기준 2848세대로 약 1만 6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율촌면의 들판은 일제 강점기 간척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반농반어적 성격이 강한 농촌이다. 1970년대부터 공업화가 본격화되면서 1980년부터 1990년까지 평균 –10%까지의 인구가 감소했다.

1994년 138세대가 입주한 조화아파트, 2011년 357세대 동양엔파트가 세워졌지만, 율촌면의 인구는 지속해서 감소했다. 감소 원인은 율촌은 고등학교가 없어 여수 시내권이나 주변 순천으로 진학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율촌지방산업단지의 활성화와 483세대 규모의 공동 주택이 세워지는 등 앞으로 인구 변화가 예상된다. 현재 2020년 기준 3300세대로 6424명이 거주하고 있다.

▲'나' 왕바위재 유적에는 6기의 고인돌이 있다. 그중 1기는 860x580x210cm 로 여수에서 가장 큰 고인돌로 확인됐다. (사진=여수시)
▲'나' 왕바위재 유적에는 6기의 고인돌이 있다. 그중 1기는 860x580x210cm 로 여수에서 가장 큰 고인돌로 확인됐다. (사진=여수시)

청동기 시대

율촌 지역의 청동기 시대 대표적 유적인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곳은 27개 떼 328기가 보고 됐다. 신대 ‘나’ 왕바위재 유적에는 6기의 고인돌이 자리 잡고 있다. 그중 1기는 860X580X210cm 규모로 여수에서 가장 큰 것으로 확인됐다. 무게는 약 210t으로 추정된다.

신대 ‘가’ 유적은 21기의 고인돌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어 영국 솔즈베리 평원에 자리 잡은 스톤헨지를 연상하게 하고, 봉두 ‘가’ 유적은 등고선에 따라 고인돌이 배치되어 있다. ‘다’ 지역에서는 99기의 단일 고인돌 떼로 가장 많은 고인돌이 집중됐다. 유적은 청대에서 치동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앞으로 광양만과 묘도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고대 사회

율촌 지역에는 청동기 시대 사람이 살았음을 알려주는 유물 산포 지가 월산리 외청 마을을 비롯해 약 30곳에 분포한다.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의 『남도문화연구』에 따르면 청동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 이어지는 유적지가 5곳, 철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 1곳, 삼국시대 20곳, 통일 신라시대 유적지 1곳, 삼국~조선 시대 1곳, 조선 시대 3곳 등이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물은 시대별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흔적을 알려주는 유물로는 무늬없는 토기와 홈자귀 조각, 숫돌 조각 등이 있다. 지역적으로는 치동 마을 앞, 외청 마을 2곳, 월평, 송정 마을에서 확인됐다. 삼국 시대 유물은 대부분 연질과 경질 토기 조각으로 가장 많다. 율촌 지역에서 발견된 경질 토기는 거의 회청색을 띠고 있어 굴가마에서 생산됐다.

고려시대 ‘정지 장군의 관음포대첩’

공민왕 후기부터 여수·순천 지역에 주목을 끄는 인물은 정지 장군이다. 그는 1347년 나주에서 아버지 이履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정지는 1377년 6월 순천·낙안 등에 쳐들어온 왜구를 처음으로 물리쳤는데 이때 병마사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이어 같은 해 12월 다시 왜구를 물리침으로써 전공을 세웠다. 이후에도 전라도로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치는 데 앞장섰다.

1393년 4월 정지는 해도원수로 나주와 목포에 머물면서 군사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때 왜적이 전선 120척을 이끌고 경상도 남해도에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합포원수(지금의 창원) 유만수가 정지에게 원군을 요청하게 됨으로써 관음포 대첩이 이루어졌다. 고려 시대 왜구를 물리친 진포·황산 대첩과 더불어 3대 대첩에 포함되고 있다.

▲ 전남 여수시 만흥동 만성리에 있는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사진=뉴스탑전남)
▲ 전남 여수시 만흥동 만성리에 있는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사진=뉴스탑전남)

‘여수·순천 10·19 사건’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여순사건 실태조사 보고서』 제1집에 따르면 여수·순천 10·19 사건 때, 율촌면의 인명 피해는 36명인데, 좌익으로 분류돼 형무소에 끌려가 처형된 사람이 12명으로 가장 많다. 지방 좌익 세력과 봉기군에 의해서 3명, 진압군에게 4명, 경찰에 의해 7명이 죽었고, 행방불명된 사람이 8명이었다. 14연대 군인으로 전사한 사람이 2명이었다.

지역적으로는 취적 마을이 28%, 득실 25%, 신풍 17%로 율촌면의 동남부 지역에서 많은피해가 있었다. 취적 마을의 피해가 가장 컸던 것은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해 ‘독서회 사건’으로 투옥 생활까지 했던 유지선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여순사건 실태조사 보고서』를 요약하면 득실 마을의 경우 마을 간 갈등으로 인해 많은 희생자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원래 면사무소가 득실에 있어 면의 중심부라는 자부심이 강했지만, 철도 부설 이후 면사무소가 율촌역 주변으로 옮겨 가면서 여흥리와 갈등이 나타났다. 해방되면서 여흥의 장천교회를 중심으로 우익 단체가 만들어지고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지식이 많았던 득실 마을은 좌익계가 형성됨으로써 갈등의 폭이 더욱 커졌다.

율촌면의 모스크바라 불리던 득실 마을 청년들이 서북 청년단에 의해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강력히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좌우익 간의 갈등이 표출됐다. 특히 수도 경찰이 이 지역에서 여순사건 가담자와 좌익 세력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우익 세력의 도움을 받았다. 여흥 마을의 이은성과 한상득이 대표적으로 이들은 득실 마을 사람들과 묵은 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컸다고 보고 있다.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율촌 지역에도 광암 마을의 35세 채상영을 중심으로 인민위원회가 구성돼 치안 등 인민 행정을 실시했다. 채상영처럼 직접 좌익 활동을 하거나 적극 가담자로 분류된 득실의 서정일, 취적의 이재하, 봉정의 김용갑 등은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수도 경찰 박승구의 일본도에 참수됐다. 박승구는 적극 가담자 또는 주도적 좌익 세력을 일본도로 즉결 처분함으로써 공포심을 유발한 다음, 무자비한 폭력으로 가담자를 밀고케 했다.

율촌 지역에서 우익 인사의 적극적인 협조와 수도 경찰 박승구의 무리한 가담자 색출은 6·25 한국전쟁 때 좌익 또는 좌익으로 몰린 사람들에 의해 보복이 이루어졌고 국군에 의한 수복 이후 다시 좌익 사범 검거로 이어져 수많은 젊은이가 이념 대립의 희생양이 됐다.

▲등록문화재 제301호 율촌역. 1930년 12월 25일 사설 철도회사인 남조선철도주식회가 광주와 여수를 잇는 철도 영업을 시작하면서 건축한 기차역.
▲등록문화재 제301호 율촌역. 1930년 12월 25일 사설 철도회사인 남조선철도주식회가 광주와 여수를 잇는 철도 영업을 시작하면서 건축한 기차역.

국가등록문화재 제301호 율촌역

여수~순천~광주를 잇는 160km의 철도인 광여선은 국가에서 직접 운영하는 것이 아닌 남조선철도주식회사가 1929년 2월 27일 공사에 들어가 1930년 12월 25일 개통해 여객과 화물 운송을 시작했다. 1936년 3월 1일 운영 주체가 조선총독부로 넘어가면서 송정리와 여수를 잇는다는 의미의 ‘송려선’이라 철도 이름을 바꾸었다. 같은 해 12월 1일 익산에서부터 순천까지 철도가 연결되면서 ‘전라선’이 됐다.

익산에서 여수를 잇는 전라선은 대전과 목포를 연결하는 호남선과 더불어 조선총독부의 전략적 판단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총독부는 호남선의 종착지인 목포 신항은 무역항, 여수항은 군사적 항구로 개발하기 위해 철도를 놓았다. 1929년 전라선을 착공하여 8년만인 1936년 12월 1일 개통함으로써 율촌역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1930년대 초기에 지어져 근대 철도 건축사적 가치가 커 2006년 12월 4일 국가등록문화재 제301호로 지정됐다.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 장천교회.
▲2004년 12월 31일 국가등록문화재 제115호로 지정된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 장천교회. 

국가등록문화재 제115호 장천교회

장천교회는 1905년 10월 율촌면 조화리 139번지에 세워졌다. 전남동부권에서 가장 먼저 설립되어 여수를 비롯한 주변 지역에 기독교를 포교하는 중심 교회가 됐다. 1904년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뒤 우리 군대를 해산시키고 경찰권을 빼앗아 가는 등 시국이 어수선해지자, 율촌면 조화리 지역의 선각자들은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기독교를 통한 민중 계몽 운동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교회를 건립했다.

이 지역의 유지인 조일환·이기홍·박경주 등이 자유로운 삶을 찾아 만주로 가던 중 미국인이 경영하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기로 마음먹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목포선교부에 찾아가 더 깊은 진리를 배워 1905년 조일환의 집에서 미국인 선교사로

1903년 한국에 건너와 1940년까지 37년간 여수·목포·광주·순천 등 호남 지역에서 선교 및 교육 활동을 했던 변요한 목사와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설립된 것이 장천교회다. 1905년 10월 15일 율촌면 여흥리에 초가집인 장천예배당에서 시작되어 1912년 부속 교육 기관으로 장천 예배당내에 사설 여흥학교원 를 세우고 관내 주민을 위한 근대 교육을 펼쳤다.

지역 주민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일본어·산술·이과·지리·창가 등의 신학문을 가르쳤기 때문에 여수 육지 지역에서 가장 먼저 개화한 곳이 율촌이다. 여흥학교는 개교한 지 23년째 되는 1935년 국어 폐지와 신사 참배 강요 정책을 받아들일 수 없어 자진 폐교했다. 장천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종교 탄압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24년 건축된 예배당 건물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율촌면 최초의 석조 건축물이다. 건물 벽제와 지붕만 남기고 내부와 앞부분의 계단은 원래의 모습에서 모두 고쳐졌다. 1973년 교회 주변 땅에 또 하나의 석조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본당의 역할은 신축 건물로 이관되었다. 기존 건물 1층은 식당 등 다목적 용도로, 2층은 어린이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3년 다시 그 옆에 철근 콘크리트조의 현대적인 예배당이 건립됐다.

장천교회는 우리나라 근대 교회의 성립과 당시의 건축 양식을 온전히 전해 주는 문화유산의 하나로 교회사적,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녀 2004년 12월 31일 국가등록문화재 제115호로 지정됐다.

▲1926년 신풍 애양원 일대 모습. (사진=여수시)

국가등록문화제 제32호 애양원교회 및 제33호 애양병원

한국에 와서 의료활동을 통해 크리스트교를 전파하던 포사이트가 광주에서 활동하던 오웬의 병세가 급하다는 전보를 받고 광주를 향해 말을 달릴 때, 길가에 쓰러져 있는 여자 한센병 환자를 발견하여 그 여자를 자신의 말에 태우고, 자신은 광주까지 남은 길을 걸었다.

진료소에서 이틀 밤을 지낸 뒤, 윌슨이 낡은 벽돌가마에 그녀의 임시 거처를 마련해 줬다. 이를 계기로 1909년 선교사들이 특별히 기금을 모아 ‘한센환자의 집’이라고 부르던 작은 집을 지어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해 1911년 4월 23일 당시 전라도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 광주한센병원을 세웠다. 하지만 1924년 광주군에서 윌슨 원장에게 시민위생과 도시계획 문제를 들어 병원을 옮길 것을 요구했다.

1925년 조선총독부가 병원의 바닷가 이전 정책을 추진해 1926년 11월 9일 여수군 율촌면 신풍리로 옮기도록 하는 강제 명령을 내렸다. 광주 한센병원을 여수로 옮기는 과정은 기차를 탈 처지가 못 되어 몸으로 침상과 가방을 나르며, 낮에는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산기슭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이동하는 ‘눈물의 이주’였으나 그들은 희망을 품고 약 140km를 그냥 걸었다.

1928년 이주 당시 비도 울프라는 사업가가 애양원 내의 시설을 지어주는 대신 병원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주라고 요구해 ‘비더울프 한센병 환자 수용소’라고 불렸다. 그러나 사업가가 일을 완성하지 못한 채 죽었고 개인의 이름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 당시 원장 윌슨은 1935년 환자들에게 현상 공모해 ‘애양원’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새롭게 지은 교회는 이주 당시 땅이름을 떠서 ‘신풍교회’라고 하였으나 미국인 석은혜 씨가 후원하여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석은혜예배당’으로 불렸고, 1935년 애양원이 되면서 ‘애양원교회’로 바꾸었다. 애양병원 건물은 미국 선교사에 의해 지어져 1900년대 초반 한국의 초기 선고 의료사의 소중한 자료로 상부 구조가 조금 바뀌었지만 뼈대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999년 애양원 역사관으로 수리, 보존되어 당시의 의료 기구와 사진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처음 모습을 온전히 찾아보기 어렵지만, 돌로 쌓은 기본 골격과 창문의 형태 등 전체적인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1900년대 초반 한국선교사를 살펴볼 수 있는 근대 종교 건축물이기 때문에 2002년 5월 31일 국가등록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됐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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