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계동은 1914년 ‘봉강’과 ‘계원마을’의 첫 자를 따
해산동은 ‘해지’와 ‘오산마을’ 한 글자씩 따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1967년 2월 호남정유 여수공장 설립 공사를 시작으로 여천공업단지가 본격 조성됐다. (사진=여수시)
▲1967년 2월 호남정유 여수공장 설립 공사를 시작으로 여천공업단지가 본격 조성됐다. (사진=여수시)

⑱주삼동

주삼동은 여수의 중앙에 위치해 여수·순천 간 국도 제17호선이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또 여수국가산업단지와 시내권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여수국가산업단지가 넓혀지면서 일부 마을이 포함된 농촌 지역이지만 봉계지구에 공동 주택 단지가 형성됐다.

호랑산과 전봉산이 만든 골짜기 사이에 있는 동북쪽은 산지, 서남쪽은 석창들판으로이 형성돼 있다. 대곡·봉계1~2·해산 저수지 등이 있어 농사짓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주민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했다.

주삼동의 지형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전봉산이다. 동남쪽 솔시봉과 동북쪽 천마봉의 줄기를 만든 산이다. 옛 여천시에서 세 번째로 높아 주삼동의 주삼과 봉계동, 삼일동의 월하와 평여동을 만들어 냈다. 주위에 월앙·월산·월평·반월·월미·월하·월성 등의 마을을이 있다.

정상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봉계동으로 향한 바위는 깊이 6~7m 정도가 뚫려 돌지붕을 만들었다. 천정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밑에 암반의 오목한 곳에 물이 고여 샘처럼 돼 이것을 ‘산샘’ 또는 ‘영천’ 이라 불렀다. 산샘 밑에 ‘전봉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독립 가옥 철거 정책에 따라 선원동 도원으로 옮겨 ‘쌍용사’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때 군대가 훈련하거나 주둔했다고 전해진다. 

호랑산에서 시작된 주삼천은 봉강, 월앙을 거쳐 계원 마을을 가로질러 흐른다. 전봉산에서 발원한 주삼천은 봉계동과 주삼동 사이를 흘러 주삼동주민센터 앞에서 만난다. 호랑산에서 발원한 쌍봉천이 대곡 마을을 지나 여수시농업기술센터 남쪽에서 쌍봉천과 합류한다.

주삼동은 1914년 주암과 삼동마을의 첫 자를 따 만든 행정동이다.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지방 행정구역 일람표에 따르면, 소항리와 주암리로 독립돼 쌍봉면에 포함됐다. 1914년 앞의 두 마을과 군장리 및 삼일면의 오산리·용혈리 및 삼동을 함께 넣어‘주삼리’라 했다.

봉계동은 1914년 봉강과 계원 마을의 첫 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호랑산과 전봉산이 만든 큰 계곡 사이에 있는 월앙·봉강·계원·대곡의 4개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해산동은 고려 시대부터 삼일포향에 속해 삼일 지역에 해당됐다. 1914년 해지와 오산마을을 합쳐 쌍봉면에 포함시키고 첫자와 끝 자를 따 만든 이름이다.

『호구총수』에 따르면 삼일포면에 속한 삼동·해지·용혈의 땅이름이 기록돼있다. 지금의 주삼동이다. 주삼동은 1897년 여수군이 새롭게 생길 때 여수군 쌍봉면에 포함된 뒤 1908년 여수가 현내면으로 분리돼 쌍봉면에 그대로 남게됐다.

주삼리 주암, 소항, 주동, 삼일면에서 편입된 삼동

봉계리 봉강, 월앙, 계원, 대곡

해산리 해지, 대평, 삼일면에서 편입된 오산

▲주삼동 전봉산, 동남쪽 솔시봉과 동북쪽 천마봉의 줄기를 만든 산이다. (사진=여수시)
▲주삼동 전봉산, 동남쪽 솔시봉과 동북쪽 천마봉의 줄기를 만든 산이다. (사진=여수시)

전봉산에 굴 둘이 있었다. 이곳 스님이 부처님께 공양하려 하면 매일 한 굴에서는 식량이 나왔고, 다른 굴에서는 물이 나왔다고 한다. 하루는 스님이 식량이 나오는 굴에 먹을 것을 좀 더 달라고 빌었다. 그랬더니 그 뒤로는 쌀과 물을 다시 볼 수 없었다는 전설이 있다.

농업이 중심 산업이던 여천동의 인구가 1981년에 비해 1985년 점차 늘어난다. 2000년부터 봉계동의 아파트 단지가 건설돼 주삼동의 인구는 증가하게 된다. 2009년 삼동마을 131세대가 철거됐다. 여수시 전체 인구 감소와 주변 지역의 개발로 점차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 선사시대

봉계동 대곡과 월앙마을에 위치한 고인돌 떼는 1987년부터 시작된 경지정리 사업으로 일부는 파손 및 훼손됐다. 나머지 고인돌에 한정하여 1988년 3월 14일부터 4월 4일까지 발굴, 조사됐다.

쌍봉천과 봉계천 사이에 동서로 좁은 평지가 형성돼 하천을 따라 고인돌이 열을 지어 수 기씩 떼를 이루며 분포하고 있었다. 발굴 대상이 된 고인돌은 경지정리 작업으로 인하여 훼손될 대곡 지구 4기, 월앙 지구 10기 등 모두 14기였다. 월앙 마을 고인돌의 경우, 무덤방이 뒤틀리거나 파괴된 것이 5기였다.

대곡 유적은 둔덕에서 석창 방향으로 가는 오른쪽 논에 있던 것으로, 많은 고인돌이 있어 마을 사람들은 ‘장석거리’라고 불렀다. 경지정리 이전에 22기가 분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14기가 파괴되어 8기가 남았으나, 경지정리 지구에 해당하는 4기를 발굴해 4기는 그대로 남겨 놓았다.

월앙 유적은 월앙마을 앞 평지에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었다. 이곳에 자리 잡은 고인돌 가운데 경지정리 지구에 해당하는 10기가 발굴 대상이었다. 무덤방이 확인된 것은 7기였다. 대곡 지구 고인돌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봉계동 계원마을 당목산성 (사진=여수시)

● 통일 신라 시대부터 고려 시대

당목산성은 봉계동 계원마을 뒷산인 해발고도 76.1m의 당목산 낮은 구릉에 위치한다. 1942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따르면 “당목산성터는 쌍봉면 봉계리에 있는데 국유지이며, 여수읍 서쪽 약 2리 떨어진 계산 정상에 있다. 2단으로 나뉜 토성으로 둘레는 약 250칸이다”고 기록됐다.

문화공보부 문화재 관리국에서 발간한 『문화유적총람』에 따르면 ‘토성으로 둘레가 150m 정도이지만, 대부분 무너진 것’, 1986년 전라남도에서 간행한 『문화유적총람』에는 “주삼동 봉계리 석창성 동북쪽 야산에 있는 토성으로, 기와·자기 조각과 주초석으로 보이도 돌 등이 있으며, 원형을 이루고 있다”고 기록됐다,

당목산성은 해발고도 70m를 전후한 지점을 따라 쌓아진 테뫼식 산성으로 체성은 전체적으로 비슷한 높이에 위치한다. 성의 평면 형태는 모서리 각도를 죽인 긴 네모꼴 모양으로 쌓아졌다. 총 둘레는 361m, 너비는 5~10m이다. 성벽 안과 바깥쪽에는 땅을 깊게 파내 적들이 성으로 쉽게 들어올 수 없도록 만든 내황과 외환도가 확인된다.

계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능선의 위쪽과 남서쪽으로 내려가는 계곡 부분에는 문지로 추정되는 시설이 있다. 동문지와 관련된 시설물로는 82X58cm 크기의 판석형 석재가 문지의 서쪽 가장자리 부분에서 확인됐다. 수습된 유물은 기와와 토기가 중심이다. 기와는 대부분 통일 신라 시대로 추정된다. 평기와 바깥면의 무늬는 선무늬, 문살무늬, 새의깃 모양으로 새긴 무늬, 복합무늬, 무늬가 없는 것 등이다.

토기는 모두 경질토기 조각으로 그릇의 형태를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지만, 바깥면에는 문살무늬, 선문, 무늬가 없는 것과 돋음 띠가 만들어진 것 등이다. 비교적 정선된 점토질로 선무늬와 돋음띠가 돌려져 있는 토기 조각들은 통일 신라 시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 여천초교 인근에 있는 일제강점기 일본 해군 임시사령부 지하벙커 입구. 길이 100m의 이 벙커는 일제강점기 때 여수 신월동에 위치한 일본해군 202부대가 미국과 연합군의 공습을 대비해서 만들었던 지하벙커로 알려졌다. (사진=마재일 기자. 2022)
▲주삼동 일제강점기 일본 해군 임시사령부 지하벙커 (사진=뉴스탑전남)

● 여수수상기기지 지하사령부 추정 벙커

태평양 전쟁 시기 지금의 여수중학교 자리에 나무로 막사를 짓고, 일본군 요새사령부·요새중포병연대·요새방공대·육군병원 및 기마대가 같이 있었다. 일본군은 여수 지역의 방공을 위해 1941년 11월 8일 요새방공대의 편성 명령을 내렸다. 모두 145명으로 이뤄진 방공대는 마산에서 준비를 마친 뒤 여수로 옮겼다.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던 1944년 4월에는 ‘여수요새고사포대’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인원도 527명으로 늘렸다. 일본군 고사포 진지는 자산공원에 있었다. 구봉산 서남쪽 산자락에는 1976년 여러 가지 화약류 제품을 생산하는 한화여수사업소가 세워졌다. 이곳은 과거 일본 해군이 만든 ‘여수항공기지’ 또는 ‘여수수상기기지’로 불린 군사시설이 있었던 자리이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여수 항공기지. (사진=여수시 문화원)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여수 항공기지. (사진=여수시 문화원)

신월동에 있는 여수 항공기지의 일본군 부대가 미국과 연합군의 공습을 대비해서 만들었다고 추정된 지하벙커가 여수시농업기술센터 및 여천초등학교에 있다. 벙커는 군사적 목적을 위해 콘크리트로 만든 요새를 말한다. 여천초등학교에 위치한 지하벙커는 타원형으로 2개의 입구가 연결돼 있다. 높이 3m, 길이 100m이다.

지하벙커는 웬만한 폭탄 공격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마을 사람 들은 “나지막한 산을 잘라 콘크리트 지하벙커를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은 뒤, 나무를 심어 시설을 숨겼다”고 한다. 지하벙커는 1990년대까지 민방위 방공호로 사용됐다. 언제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반도는 일제의 군사요새였다』를 펴낸 KBS 이완희 PD는 일본의 전쟁 유적 연구가 츠카사키 마사유키의 자문을 통해 이 벙커를 해군 지하사령부로 추정했다

벙커 중간 왼쪽의 높이 5m, 폭 5m, 길이 10m 규모로 땅을 판 공간은 지하사령부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에는 오랫동안 지하에서 머물 수 있도록 물탱크가 만들어져 있다. 음식을 만들 때, 나오는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환기구를 설치했다. 화장실로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하수구도 있다. 중앙 바닥에 발전기를 설치하고 벽에는 전기 배선을 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 해군 통신시설용 지하벙커 (사진=뉴스탑전남)
▲일제강점기 일본 해군 통신시설용 지하벙커 (사진=뉴스탑전남)

지하 공간을 칸막이로 나누어 시설한 흔적도 발견됐다. 지하벙커를 육군이 아닌 해군 사령부로 판단한 근거는 태평양 전쟁 당시 육군보다 해군이 시멘트와 철근 등의 물자를 훨씬 풍부하게 보유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통신시설용 지하벙커가 따로 있어서 신월동 해군기 지가 공격을 받았을 때, 임시로 피신해 사용할 수 있는 지하사령부라고 추정됐다.

여수 항공기지가 있었던 신월리에는 수상비행기의 활주로·공장·격납고 등 다양한 군수 시설이 분포해 적에게 노출될 위험성이 컸기 때문에 비상 상황을 대비하여 내륙 깊숙한 곳에 제2의 지휘부가 필요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 대곡 저수지 둘레길

봉계동 대곡 마을은 골짜기가 깊고 커서 ‘큰골’이라는 우리말 이름으로 불렸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골안’과 ‘골밖’으로 나뉘어, 골안마을 입구 왼쪽 베틀다리와 북산 사이를 가로막아 저수지를 만들었다.

둑의 길이 112m, 높이 10.7m 면적 21.99㎢로 1943년 11월 30일 준공돼 항상 베틀 아래에 두고 바디가 무뎌지면 기름을 칠하는 기름단지에 해당하는 곳에 못이 있어 수량이 풍부했다. 하지만 저수지 아래로는 여전히 농경지가 대부분이어서 논농사가 중심인데, 꽃과 난 등을 기르는 화훼농업도 이뤄지고 있어 대곡 저수지는 아래 대곡 마을의 골밖과 월산 마을에 이르는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여수국가산업단지 삼동지구.
▲여수미래혁신지구. (사진=여수시)

● 여수국가산업단지 삼동지구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던 삼동은 여수국가산업단지가 확장되면서 삼동지구에 포함되어 철거됨으로써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2019년 6월 이산화탄소와 산업 부산물을 이용해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을 지원하는 ‘CO·전환·활용기술센터’가 삼동지구에 완공됐다. 센터는 이산화탄소를 광물·화학 물질로 전환하는 기술 검증에 필요한 시험평가 장비와 시스템 등을 집적화해 탄소 포집·활용 제품 개발과 그 제품의 시험·분석·평가하게 된다.

이를 통해 주요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를 유용한 자원으로 재활용해 고부가가치 물질로 바꿔 화학제품 생산, 재생 연료 전환, 친환경 고분자 생산 등에 활용하도록 한다. 또 CCU 분야에 대한 공동 연구개발과 기술지도 및 컨설팅 등이 가능해 신산업 창출의 주춧돌이 될 전망이다.

사업이 활성화돼 성숙기에 접어들면 CO²를 연간 596만t을 감축해 파리기후변화협약 대응은 물론, 건축과 기초화학 소재 등 제품 생산의 다양화를 통해 중소기업 육성 및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보인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관련기사

저작권자 © 뉴스탑전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