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일제 행정개편
마래터널은 국내 유일 자연 암반 터널로 2004년 12월 31일 국가지정등록문화재 제116호로 지정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2012여수세계박함회장 조성 이전과 이후의 덕충지구 (사진=여수시)
▲2012여수세계박함회장 조성 이전과 이후의 덕충지구 (사진=여수시)

⑭만덕동

만덕동은 1998년 오천·만흥·덕충동의 행정동 통합으로 만흥동의 '만'과 덕충동의 '덕'을 따서 만들어진 행정동이다.

만흥동은 북쪽에 천성산, 남쪽에 마래산이 있다. 사이에 하천이 흘러 만성리 해수욕장으로 흘러가는데 하천 주변에 비교적 넓은 농경지를 형성하고 있다. 여수시가 발간한 『을지』에 “마래산은 동쪽 5리에 있다. 경상도 남해의 금산과 마주하고 있다. 산 아래 충민단과 석천사가 있다”라고 했다.

전라좌수영의 동북쪽에 있는 ‘마래산 산 위로 떠 오른 햇살’은 여수팔경의 하나였다. 마래산 남쪽으로 깎아지른 절벽 위로 구름이 오가는데 옛날에는 이곳을 해운대라 불렀다. 그런 지형으로 인해 해상에서 산으로 오르기는 쉽지 않다. 마래산은 군사적으로 전라좌수영을 엄호하는 천혜의 요새였다.

덕충동에는 충무공과 관련된 최초의 사액 사원인 충민사와 충민사를 관리하던 석천사가 있다. 만흥동에는 만성리 해수욕장, 오천동에는 모사금 해수욕장이 있다.

▲호좌수영 영성도에 표기된 덕대마을. (사진=여수시)
▲호좌수영 영성도에 표기된 덕대마을. (사진=여수시)

『호구총수』에 따르면 여수면 상도에 오만여와 모사여가 있었다. 수영 동면에 덕대동마을과 만흥1·2동이 있었다. 호구총수에 나타난 땅 이름에서 여수면 상도에 속한 오만과 모사 마을은 오천동, 수영 동면의 덕대동 마을은 덕충동, 같은 면의 만흥1·2동은 지금의 만흥동으로 추정한다.

지금의 오천동 지역은 오천리에 오만과 중천 마을이 포함되어 만흥동에는 마래산과 천성산 사이를 흐르는 만흥천을 따라 만성리가 형성됐다. 상류 만흥, 중류 만중· 하류에 만평마을이, 덕충동에는 덕충리의 덕대와 석천사 남서쪽 아래에 기왓골이 있었다.

오천동의 오만리는 주변이 산지로 둘러 쌓여있다. 오천천이 남쪽 중천 마을 거처 여수해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에 촌락이 입지해 동·서·북쪽이 산으로 막히고, 남쪽이 터져 있어 ‘ㄷ’자 모양의 지형을 ‘오목한 곳’이라고 했던 의미를 여수 사람들이 ‘오만이’로 부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수동사』에 따르면 오만 마을은 1948년 여수·순천 10·19 사건과 관련되어 반란에 참여한 사람들이 살았다 하여 없애 버리고, 중천 마을은 1942년 준공된 오천 제2수원지를 만들면서 사라졌다. 모사 마을만 남아 있다가 1949년 여수시가 되면서 오천동으로 바뀌었다.

오천 제2수원지는 1930년부터 기차가 여수까지 운행되면서 일본과 연락선이 취항하면서 갑자기 인구가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제빙 공장과 수산물 가공 공장, 목욕탕, 여관, 음식점, 병원 등 수돗물을 대량으로 사용하는 업체가 늘면서 미평 제1수원지 하나만으로는 그 수요를 따라갈 수 없었다.

1936년 11월 6일 중천 마을에 제2수원지를 만들고자 공사를 시작했다. 노동력이 부족해 6년의 긴 공사 끝에 1942년 6월 7일 준공돼 미평 제1수원지와 더불어 1일 평균 4500t의 수돗물을 공급했다.

▲만성리해수욕장은 1939년 일제강점기에 해수욕장으로 지정됐다. (사진=여수시)
▲만성리해수욕장은 1939년 일제강점기에 해수욕장으로 지정됐다. (사진=여수시)

만흥 마을은 ‘만행이’라고도 불렀다. 만흥천의 상류에 형성된 윗마을 상촌, 가운데 마을 중촌, 하류의 평지에 형성된 하촌 또는 평촌이 모여 만흥동이 됐다. 만흥동의 세 마을을 묶어 만성리라 표기된 것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바꾸면서 ‘만흥’이 일본어로 ‘망코’ 또는 ‘만쿄’였다. 당시 일본인이 발음하기 어려워 천성산의 가운데 음인 ‘성’을 따 ‘만성’이라 전해진다.

만덕동 인구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치는 지역은 덕충동이다. 1928년부터 시작된 여수-광주 간 철도 공사를 비롯해 1930년대 여수 신시가지 조성공사를 함으로써 지역 개발의 기초가 마련되어 인구가 집중됐다. 오천동과 만흥동은 자연 마을이 형성돼 외부 인구를 흡수할 만한 시설이 부족했다.

덕충동은 여수역과 신항이 가까워 육상과 해상 물류 수송의 중심지가 됐다. 난방 연료였던 뗄감 대신 연탄이 보급되면서 원료인 무연탄이 기차와 배로 운송되어 신항 동남쪽 끝인 오동도 입구에 쌓이게 되자 1963년 덕충동 일대 1만 500평에 연탄공장 단지가 만들어졌다.

▲2011년 박람회장으로 변하기 직전 쌍용시멘트 여수공장 (사진=여수시)​​​​​​​
▲2011년 박람회장으로 변하기 직전 쌍용시멘트 여수공장 (사진=여수시)

1969년 덕충동과 가까운 수정동에 시멘트 생산과 출하가 동시에 가능한 쌍용 양회 여수 공장이 세워져 1970년에는 덕충동에 김 가공 공장이 들어섰다. 1980년에는 동양시멘트 여수 레미콘공장이 만들어졌다. 함께 세워진 시멘트 저장고는 2012 여수세계박람회 당시 여수 스카이타워 전망대로 고쳐졌다.

1981년 중소기업진흥공단과 전라남도 여수시가 공동으로 오천동에 오천지방산업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해 1983년 12월 준공했다. 공단에 들어선 수산물 가공업체 노동자는 1987년 4000여 명에 달했지만, 오천동의 인구에는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아산 현충사보다 103년 앞서 지은 제1호 충무공 사당. (사진=여수시)
▲아산 현충사보다 103년 앞서 지은 제1호 충무공 사당. (사진=여수시)

충무공 관련 최초의 사액 사원 충민사

충민사 입구에는 높이 1.4m, 너비 42cm, 두께 10cm 크기의 작은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하마비’라 쓰여 있다. 하마비는 말 그대로 말馬 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비는 원래 동산동 벅수에서 충민사 쪽으로 약 100m쯤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었다. 우회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충민사는 해발 385.2m의 마래산 기슭에 있다. 1601년 체찰사 이항복이 임금의 명을 받아 임진왜란 이후의 민심을 살펴본 뒤, 통제사 이시언에게 세우게 했다.

충민사를 세우자 우부승지 김상용이 임금께 이 사우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간청해 선조가 직접 이름을 지었다. 그것을 새긴 현판을 받음으로써 이충무공과 관련된 최초의 사당이 됐다. 함께 충무공을 기리는 통영의 충열사 보다는 62년, 1704년에 세워진 아산의 현충사보다는 103년 전에 건립됐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가장 먼저 제사를 모셨다. 그다음으로는 의민공 이억기, 충현공 안홍국이 좌우에 있다. 그 뒤 1709년 충민공 이봉상을 신묘해로 모시고, 석천제를 처음으로 세웠다. 1732년 사우를 다시 손을 대 고쳤다. 1868년 충열사가 통영에 있다는 이유로 충민사와 현충사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충민단만 남기고 모두 철거됐다.

1873년 지역 유림들의 진정으로 건물을 다시 세워 판서 윤용술이 쓴 충민사 현판을 걸었으나, 1919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됐다. 1947년 2칸 집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다 지역 주민의 노력으로 다시 세워져 1993년 6월 1일 국가 사적 제381호로 지정됐다.

▲1926년 완성된 여수 마래 제2터널, 2004년 12월 등록문화재 제116호로 지정됐다. (사진=여수시)
▲1926년 완성된 여수 마래 제2터널, 2004년 12월 등록문화재 제116호로 지정됐다. (사진=여수시)

마래 제2터널

여수엑스포역에서 만성리 방향으로 가는 옛 도로 길목에는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두 개의 터널이 있었다. 마래 제1터널로 불리는 곳은 1926년 군사용 식량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창고였다. 길이는 83m로 현재는 입구가 막혀 있다.

마래 제2터널은 총 길이 640m, 폭 4.5m, 높이 4.5m로 자연 암반을 깎아 1차로의 도로를 만들었다. 당시 터널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쇠망치와 정을 이용해 자연 암반을 파내 벽과 천정은 마감이 되지 못한 채 울퉁불퉁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국내 유일의 자연 암반 터널이라는 점에서 2004년 12월 31일 국가지정등록문화재 제116호로 지정됐다.

여수엑스포역

▲1928년 남조선철도주식회사 소속 기술진들. (사진=여수시)

일제 강점기 여수 지역의 개발은 경제적으로 우리나라의 곡식, 면화 등의 자원을 수탈해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철도와 항만을 건설하는 것과 더불어 남조선철도주식회사(이하 남철)의 이익을 크게 늘리고자 하는 새로운 도시 건설 세 가지 방향에서 전개됐다.

남철은 대여수항을 건설하기 위해 1923년 5월 24일 옛 여수역과 대한통운에 이르는 7655평 크기의 바다를 메우기 시작했을 때, 여수에 살던 일본인 츠카사 요시노부가 광주에 출장을 갔다 우연히 남철의 철도 부설 계획을 보게 됐다.

계획은 삼천포를 연결하는 철도가 1순위였다. 여수와 광주를 잇는 철도는 3번째로 밀려 있었다. 여수로 돌아온 그는 당시 군수였던 후지타니 사쿠지로, 면장 유국준 등과 힘을 합해 철도 유치 운동을 펼쳤다.

남철이 토지를 사들이는 것은 평당 10~20전이던 땅값이 5~6원으로 폭등함으로써 남철과 좁은 땅을 가진 지주들 사이에 토지를 사고파는 협상이 어려움을 겪었다. 여수군수가 직접 중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남철과 좁은 땅을 가진 우리나라 지주들과의 대립은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땅값이었다. 처음 남철이 제시한 가격은 평당 논 1원 50전, 대지 2원 50전, 임야 45전이었다. 농민들은 땅값이 떨어져 반대했다.

▲여수신항 매립 및 철도부지 조성 사업에 따라 1928년 바다였던 덕충동 앞 일명 귀환 동포촌 일대에 대한 매립 사업이 추진됐다. (사진=여수시)
▲여수신항 매립 및 철도부지 조성 사업에 따라 1928년 바다였던 덕충동 앞 일명 귀환 동포촌 일대에 대한 매립 사업이 추진됐다. (사진=여수시)

이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포함된 여수의 자본가들이 ‘여수철도용지매수알선위원회’를 만들어 회사와 평당 2원씩으로 협의했다. 하지만 실제 농민들에게는 1원 50전이라고 속여 일부 농민들이 땅을 팔기도 했다. 갑자기 땅값이 평당 1원으로 떨어짐으로써 소지주들이 강하게 저항했다.

남철은 건설 용지 30만 평의 3/4 정도를 사들였지만 남은 땅은 도저히 사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직원들을 시켜 평당 1원씩을 더 주기로 하고 몰래 사들였다. 투기 업자들이 직원을 시켜 3원씩을 더 주고 수천 평을 몰래 산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알선위원회에 부대껴 이미 생명의 원천인 땅을 이미 헐값에 팔아 버린 수백 명의 농민은 군수의 개인적 토지 거래 금지와 알선위원장의 가격이 오르면 더 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음을 비판했다. 급기야 1929년 7월 9일 동정 솔밭 거리에 있는 정자에서 ‘농민지주회’를 조직했다.

철도를 놓고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기 위해 많은 땅이 필요했지만 적은 땅을 가졌던 농민들이 지주회를 조직해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여수군이 중심이 되어 토지를 사고파는 것이 잘 되도록 도와주기 위해 만든 단체가 ‘철도용지매수알선위원회’였다. 당시 여수면장이였던 유국준이 스스로 위원장을 맡았다.

더불어 군수가 앞장선 알선위원 대표 11명이 도쿄까지 건너가 남철 사장 네즈를 만나 가격 40만5000원의 신시가지 건설 기지 27만 300평과 정거장 기지 2만 평을 기부하기로 협약해 버림으로써 농민들의 반발은 더욱 커졌다.

남철 측이 남은 토지를 사들일 때 나중에 높은 가격이 매겨지면 1원 50전으로 먼저 사들인 땅에 대해 그 차액을 돌려주기로 계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남은 토지에 대해 6~7원의 높은 가격으로 사들이는 일을 진행하면서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농민 대표 3명이 천 리 길을 걸어서 서울에 올라가 총독부와 철도국의 수뇌부를 만나 호소했으나 어떠한 해결책도 보여주지 않았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남철을 통해 헐값에 사들인 토지와 강제 수용령 등 강압적인 방법으로 땅을 확보해 1928년 2월 27일 일본인 아베가 완성할 것을 약속했다.

이 공사에 필요한 인원이 하루에 2000명에 이르자 노동자를 전국에서 모집했다. 또 바다를 메우는데 엄청난 양의 흙이 필요했다. 이 흙을 지금 여수교육지원청이 있는 와우산을 깎아 공급했기 때문에 지금도 이곳을 ‘흙산’이라고 부른다.

▲1937년 여수항역을 설치해 1980년 12월 여수역으로 이름을 신축했다. 2011년 10월 여수엑스포역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사진=여수시)
▲1937년 여수항역을 설치해 1980년 12월 여수역으로 이름을 신축했다. 2011년 10월 여수엑스포역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사진=여수시)

당시 노동자의 임금은 30~40전이었다. 값싼 노동력으로 중국인들이 철도 건설에 참여해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줄게 됨으로써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중국인 노동자의 건설 현장 참여를 제한하는 조치를 마련했다.

철도는 1930년 12월 25일 개통됐다. 광주와 여수를 잇는 철도가 만들어진 목적은 산업적으로 우리나라의 곡창 지대인 호남 지역의 식량을 일본으로 보내는 운송비와 수송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군사적으로는 군대 수송을 편리하게 하여 남해안에서 전쟁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1980년 12월 27일 여수역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역사를 세웠다. 이곳이 2012 여수 세계박람회의 중심 광장에 해당해 2009년 말 장소를 약간 옮겨 다시 짓고 2011년 10월 여수엑스포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2007년 11월 27일, 2012세계박람회 여수유치 확정됐다. (사진=여수시)
▲2012여수세계박람회 유치 성공에 시민들은 열광했다. (사진=여수시)

여수세계박람회장

여수에는 한려해상국립공원·다도해해상국립공원 금오도 지구와 거문도·백도 지구의 3개의 국립공원을 가지고 있다. 여수시는 이같은 자연경관을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살아있는 바다 숨쉬는 연안’을 주제로 2012년 5월 12일부터 8월 12일까지 3개월동안 ‘여수세계박람회’를 개최했다.

빅오쇼를 비롯해 스카이타워 전망대, 아쿠아플라넷 등 박람회를 위해 설치된 시설들 가운데 일부는 지금까지도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거대한 바다를 뜻하는 빅오쇼는 세계 최고의 해상 분수와 레이저 조명을 이용한 멀티미디어 영상 연출이 가능한 공연 시설이다. 해상 무대와 최대 3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

아쿠아플라넷에는 벨루가, 바이칼물범 등 280여 종의 다양한 해양 생물들이 있어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다양한 해양 생태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해양 문화의 가치를 전파하고, 생태계를 보전하려는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67m라는 아찔한 높이에서 박람회장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스카이타워 전망대는 버려진 시멘트 저장고인 사일로를 세계 최대 크기의 파이프 오르간으로 재탄생했다. ‘바다의 소리’라는 뜻의 파이프 오르간 ‘복스 마리스’는 뱃고동 음색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소리 내어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6km 떨어진 곳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박람회장 사후활용 방안이 10년 넘게 추진되지 않다가 내달 5월 14일 여수광양항만공사로 운영권이 넘어간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관련기사

저작권자 © 뉴스탑전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