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좌수영 영성도'에는 서당산 자리에 ‘사철’이라 표기 되어있다. 이곳은 철광석을 채취했던 곳임을 알리고 있다. 현재 해태동백타운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서당골’과 의관산 등에서 철광석을 채취했기 때문에 ‘사철’, ‘쇠철’, ‘새철’ 등의 땅이름이 전해진다.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1950년 구봉산의 모습과 2013년 현재의 모습. (사진=여수시)
▲1950년 구봉산의 모습과 2013년 현재의 모습. (사진=여수시)

⑥서강동

여수의 동남부 해발 386m 구봉산 북동쪽에 '봉강동'과 325m 장군산 남쪽에 ‘서교동’이 위치한다. 1997년 두 행정동을 통합해 두 법정동에서 한 자씩 따 만든 행정동이 '서강동'이다.

여수의 대표적 재래시장인 서시장을 비롯해 상업 기능이 밀집된 서교동과 주거 기능이 중심인 봉강동으로 구분된다. 국도 17호선의 좌수영로에서 한재로와 충무로가 나뉘어 서교동 로터리로부터 중앙로와 신월로 및 남산로가 연결되는 교통의 결절점이다.

1918년 제작된 지형도에는 연등천 동쪽에 ‘서정’이 구봉산과 장군산 사이에 형성된 골짜기에 '봉강' 마을이 표시되어있다. 봉강은 구봉산 기슭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 일본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지금의 봉산동인 봉서리와 국동에 해당하는 국포리를 합쳐 봉산리가 됐다. 1953년 다시 동을 세 개로 나누어 과거 봉강 마을만을 봉강동이라 하였다.

지금의 서교동 지역은 거의 바다를 메워 형성된 간척지이다. 1916년 일본인 13명이 제1차로 중앙동 일대를 매립했다. 하지만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여수 지역의 급격한 발전에 따라 더 많은 토지가 요구됐다.

▲다카세 농장 주인 오츠카 지사부는 1917년 5월부터 교동오거리-옛 충무동 파출소-서시장에 이르는 교동-충무동을 비롯해 서교동 일대와 광무동 일부가 포함된 넓은 바다를 메우는 사업에 착공해 1920년 9월 27일 완공했다. (사진=여수시)
▲다카세 농장 주인 오츠카 지사부는 1917년 5월부터 교동오거리-옛 충무동 파출소-서시장에 이르는 교동-충무동을 비롯해 서교동 일대와 광무동 일부가 포함된 넓은 바다를 메우는 사업에 착공해 1920년 9월 27일 완공했다. (사진=여수시)

당시 여수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던 다카세 농장 주인 오츠카 지사부로는 홀로 시가지 조성 계획을 세워 1917년 5월부터 교동오거리-옛 충무동 파출소-서시장에 이르는 교동-충무동을 비롯해 서교동 일대와 광무동 일부가 포함된 넓은 바다를 메우는 사업에 착공해 1920년 9월 27일 완공했다.

여수 초대 군수 오횡묵은 구봉산을 ‘봉황이 돌아오는 산’이라는 의미의 ‘귀봉산’으로 기록했다. 산 아래로 봉산·봉강·봉서 등 봉새와 관련된 땅이름이 많은 것은 이 산이름 때문이다. 봉강동의 북서쪽에 구봉산이 자리하고 있어 북서쪽은 구릉지이다. 남동쪽은 평지로, 언덕에서 보는 안개가 아지랑이처럼 나불나불 아른거리는 모습을 ‘봉강청람’이라 하여 여수 8경 가운데 하나이다.

봉강동에는 조선 시대 서당이었던 봉명재가 있었던 ‘서당골’과 의관산 등에서 철광석을 채취했기 때문에 ‘사철’, ‘쇠철’, ‘새철’ 등의 땅이름이 전해진다. 서교동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 바다를 메워 만들어져 특별히 전해지는 땅 이름보다 1934년부터 시장이 형성돼 우시장이 있었던 ‘쇠전거리’, ‘서시장통’ 등이 있다.

서강동의 인구는 1980년 0.2%가 증가하였을 뿐 지금까지도 계속 감소하고 있다. 여수의 구도심 가운데 이 지역으로 인구를 유입할 수 있는 기반시설이 부족함으로써 주변 지역으로 많은 인구가 유출되고 있다. 서강동은 면적이 0.66㎢로 좁은 지역이다.

가파른 경사의 봉강동과 대부분 매립 지역으로서 일찍부터 여수 지역의 상업 중심지였던 서교동은 비싼 땅값 때문에 2000년 만들어진 약 400세대의 해태 동백타운아파트를 제외하고는 토지의 집약적 이용이 어려웠다. 수산물을 바탕으로 형성됐던 서시장 상업 기능 또한 국동항 개발에 따른 남산동 위판장의 봉산동 이전, 교동과 남산동 등의 수산물 특화 시장, 의류 중심의 중앙시장을 비롯해 여서·문수 신도심과 옛 여천시 지역의 개발은 서시장의 기능과 서강동의 주거 기능을 약화 시켰다.

▲호좌수영영성도에는 서당산 자리에 ’사철‘이라 표기하고 있어 이곳이 철광석을 채취했던 곳임을 알리고 있다. 현재 해태 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는 자리이다. (사진=여수시)
▲호좌수영영성도에는 서당산 자리에 ’사철‘이라 표기하고 있어 이곳이 철광석을 채취했던 곳임을 알리고 있다. 현재 해태 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는 자리이다. (사진=여수시)

●사철

전라좌수영을 나타낸 옛 지도인 ‘호좌수영 영성도’에는 서당산 자리에 ‘사철’이라 표기 되어있다. 이곳은 철광석을 채취했던 곳임을 알리고 있다. 현재 해태동백타운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1992년 광양제철소 과학기술연구소는 봉강동 7통에서 채취한 사철과 봉산동 주택 담장에서 발견한 슬러그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산화규소·알루미나·산화철·산화티타늄·산화칼슘 등 현재 쓰이고 있는 철광석보다는 조금 낮지만, 철 성분이 골고루 들어 있음을 밝혔다.

연구소는 슬러그가 녹는 온도는 섭씨 1200°C~1250°C 이상에서 조업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봉강동에서 캐낸 사철을 봉산동 일대에서 순도가 높은 철로 제련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봉명재

진남관 아래에 세워진 ‘수사최공완무휼군졸청덕비’는 최완 수사를 기리는 비석이다. 그는 1720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봉명재와 종명재라는 서당을 지었다. 봉명재는 좌수영의 서쪽에 있어 ‘서서재’로 불렀다.

초대 군수 오횡묵이 이곳을 찾았을 때 건물은 오간데 없었다. 그 터엔 오동나무가 무성하게 대신하고 있었다. 조선 시대 여수에 세워졌던 서당 가운데 봉명재가 구봉산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봉강동에 ‘서당골’이라는 땅이름이 있다. 지금은 영광 김씨 문중에서 세운 ‘봉소당’이라는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1942년 서초등학교. (사진=여수시)
▲1942년 서초등학교. (사진=여수시)

●여수서초등학교

여수서초등학교는 경명학교로부터 비롯된다. 1908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연진현’이 일본어 강습을 목적으로 사랑방에서 10여 명의 학생을 모아 가르치다 곽경환·황의연 과 더불어 학교 설립을 추진한다.

노인회에서 마을 노인당과 땅 370여 마지기의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제의함으로써 군수 서리였던 김한승의 동의를 얻어 학교 설립 기금으로 2000원을 여천 군민들에게 걷기로 했다.

그러나 12월 부임한 군수 김종휴가 일반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유지들의 기부를 받을 것을 제의했다. 당시 돈 1200원을 기부받아 교비를 마련하고 설립자 김한승, 교장은 곽경환이 맡아 여수사립경명학교를 설립했다. 1909년 10월 31일 인가를 받아 같은 해 11월 19일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1930년 진남관 때 여수공립보통학교. (사진=여수시)
▲1930년 진남관 때 여수공립보통학교. (사진=여수시)

1911년 6월 15일 여수공립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학생 수가 늘어 노인당이 비좁아지자 그해 7월 12일 진남관으로 학교를 옮겼다. 1935년 6월 1일 서교동 현재의 위치로 옮겨 1938년 4월 1일 여수서정공립심상학교, 1941년 4월 1일 여수서정공립초등학교, 1945년 여수서공립국민학교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10·19사건’이 일어났다. 10월 26일 여수를 탈환한 진압군은 서초등학교에 본부를 세운 뒤 기관총을 마구 쏘아대며 남아 있던 봉기군 세력의 저항을 제압하는 동시에 시민을 집 밖으로 몰아내고 민가를 샅샅이 수색했다.

시내에서 벌어진 진압 작전은 집집을 샅샅이 훑어 나가면서 이 잡듯이 뒤지는 철저한 소탕 작전이었다. 진압군은 집집마다 들이닥쳐 느닷없이 방문을 덜컥 열어젖히면서 싸늘한 총구를 가슴에 들이댔다. 진압군과 경찰은 시민들을 서초등학교, 진남관, 동정 공설운동장, 동초등학교와 중앙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불러 모아 협력자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단순히 당시 인민위원회에 출입했던 사람이나 밥을 얻어먹으러 좌익을 따라다닌 사람 등 14연대 봉기 군인이나 좌익과 인연이 있는 사람은 모두 혐의를 받았다. 당시 ‘호박잎 하나라도 반란군에 준 사람’은 모두 혐의자로 몰렸다. ‘빨갱이’로 의심받는 시민과 학생들에겐 관용이란 없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같이 행동한 학생, 군인들에게 밥 한 끼 해준 사람, 봉기군을 숨겨 주거나 아니면 봉기군이 남기고 간 소지품을 지닌 모든 사람이 봉기군에 협조한 사람으로 찍혀 억울하게 죽어갔다.

여순사건의 진압 작전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총괄적인 통계는 정확하게 파악은 어렵다. 하지만 희생자 대부분은 10대에서 30대로 소년과 청장년층으로 여수 지역에서는 이 연령층이 전체 희생자의 96%이다.

▲1945년 서시장 다리와 2013년 현재의 서시장 모습 (사진=여수시)
▲1945년 서시장 다리와 2013년 현재의 서시장 모습 (사진=여수시)

●서시장

해군사관학교에는 1815년 간행된 『호좌수영지』가 보관되어 있다. 이 책에는 ‘순천읍지’가 포함되어있다. 순천읍지는 각 지역의 시장에 대한 기록이 있다. “내례포장은 순천부 동쪽 80리에 있으며, 좌수영성 안에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장은 미평 쪽에서 서문을 거쳐 오는 큰길과 한산사 아래의 봉강·봉산동 및 예암산 주변의 남산동 쪽은 연등교에서 만나 이어지는 작은 길을 통해 오갈 수 있었다. 남쪽은 좌수영 선소 지역으로 배들이 드나들기 편한 곳이였다고 한다.

내례포장에 관한 기록은 여수 지역의 장은 좌수영 선소 지역에서 4일과 9일에 열리는 정기시장이었다. 당시 여수는 남해안에서 가장 큰 도시로 강진·장흥·보성·벌교·광양을 비롯해 경남 하동 등에서 수많은 장삿배가 드나들었다.

1910년 조석총독부는 우리 땅을 수탈하기 위해 황무지 개간이나 간척지 매립 등을 국가 정책으로 장려해 사업자들에게 공사비의 80%를 정부에서 보조해 주고, 나머지 20%를 자체 부담하게 했다.

매립이나 개간으로 생겨난 땅에 대해서 8년 이상 세금을 걷지 않는 혜택을 주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앞다투어 이 공사에 나섰다. 여수 지역에 살던 일본인들은 총독부 계획에 따라 1914년 3월 전라좌수영 남문 아래로 지금의 중앙동 진남로상가 일부와 교동 일대의 공유수면을 메우는 공사를 시작했다.

1916년 10월 12일 완공됐다. 이 땅을 모두 일본인들이 분배함으로써 그들이 여수의 도심지를 차지하게 된 계기가 됐다. 일본인들에 의해 전라좌수영 선소 일대의 바다가 메워지면서 그곳에서 열리던 장은 사라지게 됐다. 대신 1914년 일본인들이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동정’이라고 했던 지금의 여수등기소 앞에서 동문동우체국과 알파약국 쪽으로 옮겨진 것 같다.

여수읍에서는 시가지 정비에 따라 시장을 ‘동정’으로 옮겨 여수면이 관리하면서 운영해 왔다. 남철에서 약 50만 평의 땅을 사들여 시장을 옮겼다. 역을 비롯해 새로운 시가지를 동정 지역에 건설하려는 계획이 알려졌다. 개발 이익에서 소외된 서정 주민들의 불만이 컸다. 실제 남철에 의해 1928년부터 본격화된 ‘대여수’ 건설을 위한 새로운 시가지 건설 계획에는 지금의 덕충동을 비롯해 공화동과 관문동 등이 포함된 광범위한 지역이 포함됐다.

이에 따라 서정 주민들은 서정 땅 가운데 다카세 농장에서 매립한 서정 땅 가운데 3000평을 사들여 1931년부터 1932년 3월 말까지 임시로 서정에 시장을 설치하여 운영했다. 그 뒤 동정 주민들이 시장을 다시 동정으로 옮기려 했다. 1931년까지만 여 평의 공유지에 임시로 만들어진 서시장에는 수백 세대의 임시 건물이 들어서 시장 구역 내에 150여 세대를 비롯해 시장을 터전으로 삼는 상인들이 많았다.

대부분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시장을 옮기는 것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즉 1931년 동정에서 서정으로 옮겨 새롭게 만들어진 시장에 108집의 가게를 지었다. 그 외 다른 가게까지 세워 시장에 투자한 사람들이 600여 명이 넘었다. 이들은 그들의 이익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발전사』에 따르면 여수면에서 1930년 시작한 중앙동 로터리부터 신항에 이르는 도로 공사가 완공되자 1932년 3월, 지금의 여수관문행복주택아파트가 있는 곳에 354평의 땅을 마련하여 동시장을 열었다.

▲1958년 서시장 상가거리와 2013년 현재의 서시장 모습 (사진=여수시)
▲1958년 서시장 상가거리와 2013년 현재의 서시장 모습 (사진=여수시)

하지만 철도가 개통되고 일본과 연락선이 취항하게 되면서 여수의 인구는 급속히 늘었다. 동시장 하나만으로는 그 수요를 채울 수 없게 되자 여수읍에서는 다카세 농장이 바다를 메운 지금의 서시장 위치에 있던 681평의 땅을 사들여 읍에서 운영하는 시장을 만들었다. 서시장은 가축 시장까지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남 동부 6군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성장 했다. 장날이 되면 주변 지역에서 다양한 장꾼들이 모여 장관을 이뤘다.

2019년 여수의 대표적 재래시장인 서시장의 중소벤처기업부의 ‘전통시장 시설 현대화 사업 국비 공모’에 선정돼 문화 관광형 전통시장으로 탈바꿈했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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