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동은 전라좌수영이 만들어지면서 활쏘기 등 무예를 단련하던 ‘군자정’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땅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곳에 향교가 있어 ‘예동’이라 불렀다.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 1권, 2권, 3권을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1940년대까지 여수시가지로 진입하는 국도였던 충무로는 1957년 포장공사가 이뤄졌다. (사진=여수시)

④충무동

충무동은 여수 남동쪽에 위치한 행정으로 동쪽의 종고산과 서쪽의 장군산 사이로 연등천이 흐르고 종고산 사면과 연등천 유역에 마을이 발달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군자동은 동정, 연등동과 충무동은 서정에 속했으나 1949년 8월 15일 군자동·충무동·연등동으로 나뉘었다.

1997년 7월 25일 동산동과 군자동이 합쳐져 ‘종고동’으로 교동과 충무동이 합쳐져 ‘충무동’이 되었다. 1998년 군자동·충무동·연등동 3개 동을 통합하여 '충무동'이라 했다. 이는 통제 이공수군대첩비를 보호하던 충무공비각이 원래 이곳에 있어 이순신 장군과 연관성이 컸기 때문이다.

충무동의 대부분 지역은 다카세 농장 주인이었던 오오츠카 지사부로가 1917년 5월부터 지금의 교동 오거리부터 옛 충무동파출소를 거쳐 서시장에 이르는 넓은 바다를 메우는 공사를 시작해 1920년 9월 완공했을 때 만들어진 간척지였다.

군자동의 북쪽에 종고산이 자리하고 있어 남쪽 비탈에 취락이 형성됐다. 서쪽으로는 연등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다. 북쪽은 광무동, 남쪽은 충무동과 마주하고 있다.

연등천에는 많은 학이 노닐던 ‘하구바구’와 ‘용굴’이 있다. 하구바구가 있었던 곳은 호랑산·마래산·고락산 등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합쳐져 수심이 깊어 여름이면 이 바위에서 자맥질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용굴은 조선 시대 마을 사람들에 의해 메워지고 하구바구는 연등천 주변이 개발되면서 아파트를 세울 때 기초가 됐다.

연등천의 물은 과거 미평동 일대 농경지에 농업용수로 이용되었지만, 1960년경부터 우뭇가사리 제조 공장을 비롯한 공장이 생긴 다음부터 취수가 많아져 하천 수량이 감소했다. 또 주택 단지가 들어서면서 생활 폐수의 유입으로 하천수가 심하게 오염됐다. 시민 단체들에 의해 '연등천 살리기 운동'이 전개돼 환경 보전과 수질 개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2006년 말부터 현재까지 시에서 저류시설과 하천 준설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충무동로터리 일대. (사진=여수시)

충무동은 바다였던 지역을 메웠기 때문에 '육동'이라했다. 대첩비와 비각이 있었던 곳이어서 '빗집거리'라고 하는 땅이름이 전해진다. 1946년 동의 이름을 바꿀 때 '충무동'의 바탕이 됐다.

충무동에서 교동과 군자동이 나뉘는 삼거리 부근에 이루어진 마을은 종고산 서남부와 북부 구릉 지대에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에 큰 샘이 있어 '큰샘골' 이라 했다. 군자동은 전라좌수영이 만들어지면서 활쏘기 등 무예를 단련하던 '군자정'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땅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곳에 향교가 있어 '예동'이라 불렀다.

'군자정'은 이충무공이 수군절도사로 여수에 부임한 1591년 여수공고 입구 근처에 설치했다. 1930년대 초 중앙동과 신항을 연결시키는 대판동 도로를 개설하면서 성의 일부를 뜯었다. 중앙동 바닷가를 메우면서성의 자재를 활용하기 위해 좌수영성을 해체하자 1935년에 광무동으로 옮겼다.

헤체되기 이전 전라좌수영 성곽 안에 대부분 공공 기관이 위치해 있어 주민들도 많이 거주했었다. 지형이 높아 오늘날은 인구가 크게 줄어 군자정은 1975년에 다시 종고산 쪽인 군자동으로 옮겼다.

▲여수최초의 여수교회 (사진=여수시)

여수 최초의 크리스트교 예배당은 1906년 부산에서 온 여성 '김암우'가 군자동 꼭대기에 방을 한 칸을 빌려 몇 명의 교인과 예배를 한 곳이었다. 1910년 2월 6일 ‘조의환’전도사가 부임해 4칸짜리 초가를 사들여 ‘여수교회’라고 이름을 지었다. 지금 여수제일교회의 전신이었다. ‘예배당’의 발음이 변하여 ‘이비당’으로 불렸다.

군자동에는 문화재인 진남관과 여수석인, 여수향교를 비롯해 전라좌수영 터와 군자정 터, 운주헌 터, 망해루 터, 백호정 터, 변국간 선정비, 최환 선정비, 이도빈 선정비, 이봉상 선정비, 이정규 선정비, 조동훈 영세불망비 등의 유적이 있다.

연등동은 통합 이전 여수 시내 중심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과거 외부와 전라좌수영 쪽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길이였다. 일제 강점기 만들어진 여수 최초의 도로가 통과하고 있었다. 충무동을 구성하고 있는 3개의 법정동중 1980년부터 1995년까지 인구 분포는 연등동>충무동>군자동 순이였다. 연등동은 종고산 기슭과 연등천 주변에 취락이 형성돼 주거 기능이 강했다.

충무동은 전형적인 상업 지역이였다. 군자동은 전라좌수영성이 넓은 면적을 차지해 경사가 급하여 취락 형성에 불리했을 뿐만 아니라 수산업의 쇠퇴 등 경제적 이유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 주거환경 개선사업으로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골목길에 차량 통행이 가능한 소방 도로 등을 개설하여 생활 여건이 향상되고 있다.

▲망해루. 진남관 앞에 있다. 
▲망해루. 진남관 앞에 있다. 

'전라좌수영성'

전라좌수영성은 1479년 내례 만호를 철폐하여 수군절도영을 설치하고 수군절도사를 두면서 변화했다. 1485년 초가집 대신에 성보를 쌓기 시작하여 1491년 완성되었다. 성의 둘레는 3634척, 동서 길이는 1200척, 남북 길이 908척이다.

북쪽 종고산을 배경으로 삼고, 남동쪽의 얕은 예암산을 안산으로 하여 산줄기와 그 사이에 생긴 경사 지대 위에 축조한 일종의 평지 석성이다. 남·동 및 서쪽에 성문을 내고 남문 밖이 바로 바다와 맞닿게 하여 성체의 형태는 원형에 가깝다.

영성은 다른 읍성과 비슷하게 쌓아졌다. 『호좌수영지』의 ‘영성도’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객사, 즉 진남관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 1591년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서문 해자보수를 축조했다.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충무공에 의해 거제 한산도로 진을 옮겼으나 일 년 뒤 절도사 이시언이 3도를 통제할 여러 건물을 만들었다. 1664년 절도사 이도빈이 진남관, 망해루, 결승당을 재건했지만 1716년 화재로 진남관이 불타 버렸고, 1718년 절도사 ‘이제면’이 진남관을 다시 중건했다.

▲1914년 진남관. (사진=여수시)

'진남관'

국보 제304호로 지정된 진남관은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를 지켜낸 전라좌수영성 내에 있던 많은 건물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다. 전라좌수영성 내에는 600여 칸으로 구성된 78동의 건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유일하게 남아 있는 진남관은 정면 15칸, 측면 5칸, 면적 240평의 대형건물이다.

진남관은 중앙 정부에서 내려온 손님이 묵는 일종의 영빈관이다. 지금까지도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는 진남관은 망궐례를 올렸던 객사이다. 진남관 아래에 있는 비석군에는 파손된 것을 포함하여 모두 14기의 비가 있다. 『여수잡영』 에는 ‘유애비’로 묘사하고 있다. 유애비는 송덕비를 말한다. 공덕을 칭송하는 문자를 새긴 비석이다. ‘선정비’또는 ‘거사비’라고도 한다.

진남관 서편 아래에 여러기의 비석이 있다. 선정을 베풀었거나 왜적을 물리쳤던 좌수사, 관찰사, 어사 등의 공덕을 칭송하는 불망비·선정비·시혜비·추모비 등이다.

유애비군의 위치는 충무동 로터리에서 군자동 소방도로로 진입하는 입구, 즉 한양불기구사가 있는 곳에 있었다. 그래서 그곳을 비각이 많아 ‘빗집거리’라고 불렀다. 유애비군은 군자동 소방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진남관 동쪽으로 옮겼다가 현재는 진남관 밖으로 옮겨 세워졌다.

▲정화사업 이전의 진남관. (사진=여수시)

한편 진남관은 1964년 해체해 보수한 뒤 유지·관리를 위해 부분적 손질을 해왔던 진남관에 대해 2004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지속적으로 기울기 등의 변화를 조사한 결과, 건물의 뒤틀림과 구조적인 불안정이 심하여 건물의 추가적 훼손이 우려되었기 때문에 2013년 문화재청에서 진남관을 전면 해체·보수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진남관은 보수에 들어간 상태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02호 호좌수영성 수성 창설비. (사진=여수시)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02호 호좌수영성 수성 창설비. (사진=여수시)

'호좌수영성창설사적비'

옛사람들은 시대 상황이나 개인에 대한 공적 등을 영원히 알리고자 단단한 바위에 글을 새겨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호좌수영수성창설사적비'는 연등동에 있다. 이 비석은 1779년 세워진 높이 167.5cm, 폭 63.5cm 크기의 비석으로 1998년 8월 13일 문화재 자료 제202호로 지정됐다.

비석 받침과 몸체,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다. 받침 4면에 모두 코끼리 눈 모양의 무늬 를 새겼고, 몸체의 아랫부분은 심하게 훼손 되어 시멘트로 보수했다. 비석 뒷면에 새겨진 글의 주요 내용은 당시 “여수 지역의 군인과 의승수군이 전라좌수영을 보수하고, 자원해서 지켰다”는 것이다. 건륭 44년 기해 10월이라는 기록이 있어 1779년에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왼쪽부터)동쪽 벅수‘남정중’, 서쪽 벅수‘화정려’ (사진=여수시)
▲(왼쪽부터)동쪽 벅수‘남정중’, 서쪽 벅수‘화정려’ (사진=여수시)

'연등동 벅수'

연등동 벅수는 옛 전라좌수영의 서문으로 통하는 길목에 서 있다. 동·서쪽 벅수에 각각 ‘남정중’, ‘화정려’라 새겨져 있어 마을의 잡귀와 유행병을 막고 하늘과 땅을 평온하게 진정시켜 화마와 수마를 막는 기원의 뜻도 함께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1990년 10월 10일 중요 민속자료 제224호로 지정된 이 벅수의 '남정중'은 전체 길이 174cm 머리 길이 85cm, 둘레 145cm이다. 각이 지고 위가 평평한 관모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합격 증서를 받을 때 쓰는 관매을 쓰고 치켜진 눈썹, 달걀 모양의 눈, 길고 큰 자루병코와 드문드문 이빨이 보이는 벌린 입 그리고 양 갈래의 작고 뾰족한 턱수염을 그린 형태이다.

‘화정려’는 전체 길이 166cm, 머리 길이 86cm, 둘레 130cm로 네모반듯한 관모에 올라간 눈썹, 길고 두툼한 귀, 길고 콧볼이 넓은 매부리코, 왕방울 눈, 성긴 이빨이 보이는 벌린 입을 하고 있다. 각 벅수의 머리와 눈썹, 콧수염, 턱수염 등에 검은 칠을 한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연등동 벅수는 화정려의 뒷면에 “무신년 4월 28일 12시쯤 여수군 주사 김한승이 세웠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연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무신’의 기록으로 보아 1908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24호 여수향교 (사진=여수시)

'여수향교'

여수향교는 1897년 옛 좌수영 지역에 여수군이 처음 생기면서 향교도 여수 유림들의 발의로 함께 세워졌다. 향교는 16세 이상의 양반 자제를 공부시키기 위해 조선 시대 지방 관청에서 운영하던 공립 교육 기관으로 군 단위는 50명이 정원이었다.

향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군역이 면제되었고, 소과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고을의 격에 따라 대설위·중설위·소설위로 구분하는데, 규모와 봉안하는 신위의 수에도 차이가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으뜸으로 모시고 안자·증자·자사·맹자의 네 성인과 중국 송나라 때 유학자 주돈이·정이·정호·주희를 비롯해 신라 이래 18선현을 동서로 모셔 매년 봄과 가을에 석전제를 모시고 있다.

향교의 구조는 정문 가까이에 명륜당을 두고 문묘 구역 쪽으로두 재를 피해를 배치함으로써 제향 공간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내삼문과 바로 연결되도록 계획하는 형태가 있다. 또 반대로 향교 정문 쪽에 양재를 배치하고 그 안쪽으로 명륜당을 두어 제향 공간과 교육 공간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처럼 배치하는 방법이 있다. 여수향교는 지방문화재자료 제124호로 지정됐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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